법보신문 기자가 수년 전부터 필자에게 수학과 불교를 주제로 칼럼을 써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여러 차례 제안했다. 그때마다 필자는 수학과 불교는 별 연관성이 없을 거라고 거절했다. 어느 날 기자가 수학을 주제로 쓴 불교 논문 예닐곱 편을 보내왔다. 한동안 방치하다가 그 논문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생각, 즉 일종의 영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용감하게도 그 하찮은 그리고 적은 양의 영감을 바탕으로 칼럼을 쓰마고 약속하는 일을 저질렀다.수학은 이성의 학문이다. 수학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감성일지 모르나, 수학의 내용과 탐구·증명
인류역사를 관통해 금욕과 요욕(樂慾 hedonism)이 경쟁을 해왔다. 금욕은 종교를 통해서 나타났다. 정결(chastity 성적 절제)·가난(poverty)·겸손(humility)의 형태로 나타났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절제도 있다. 그런데 끝없이 금욕을 하려면 뭐 하러 태어났을까? 종교는 내세를 약속하며 금욕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사후에 낙원에서 마음껏 술과 여자를 즐기는 종교도 있다.종교는 음악을 규제한다. 음악이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유럽 음악은 종교음악이 주를 이루었다. 유교도 음악은 주로 인간의 본성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산다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자유의지를 행사하고 사는지 살펴보자. 아침에 특정 시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다. 우리가 잠속에서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자고 결정하고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의식적인 결정은 일어난 적이 없다.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는다. 평소에 하던 행동을 하는 것뿐이다. 거의 자동적인 행동이다. 여전히 자유의지의 작용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대부분의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이것들은, 설사 자유의지가 작
자유의지로 내리는 결정이, 아무 근거가 없이 내리는 결정이라면, 기계가 내리는 결정과 뭐가 다를까? 주사위를 던져 내리는 결정과 뭐가 다를까? 거북이 등을 구워 얻은 문양을 보고 내리는 결정과 뭐가 다를까?여러 선택지 중에서 특정한 것에 더 선호도를 주는 것이 자유의지라면, 그것도 근거가 없이 그리하는 것이라면, 자유의지란 기계나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혹은, 90프로는 근거를 가지고 하고, 나머지 10프로는 근거가 없이 하는 것이 자유의지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10프로는 무작위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중요
자유의지는 종교와 철학에서 가장 심각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자유의지의 정의에는 통일된 정의가 없는데, 다 같이 동의하는 바는 결정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세상은 미리 정해진 게 아니므로,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물리세계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자연법칙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신세계는 그렇지 않아서 우리의 의지로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반대하기를, 정신도 물질인 뇌의 산물이므로 정신의 세계도 정해져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우리는 진리(眞理 truth)라는 말을 쓴다. 자연과학도 종교도 진리를 추구한다. 거짓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없다. 심지어 사기꾼들도 사기술의 진리, 즉 사기에 숨겨진 법칙을 찾는다. 진리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진리란 ‘절대적인’ 진리를 말한다. 예외 없이 성립하는 진리,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성립하는 진리, 즉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환경에 관계없이 성립하는 진리이다. 그런데 어떤 진리가 시공에 관계없이 성립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항상 어디서나 성립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연법칙조차 그러한지 증명
수학의 장점이자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이다. 불교는 분류의 학문이라 부를 정도로 독보적인 분류 체계를 자랑한다. 분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해당한다. 부처님을 의왕(醫王)으로 칭송하는 이유이다.불교는 탐진치(貪瞋痴)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이를 극복하면 고통을 벗어난 걸로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에는 육체적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정신적 고통만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고통은 탐진치를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육체적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부처님도 요통·두통·이질 등
평소 늦어도 10분이면 오던 택시가 한 시간이 지나도 안 온다. 포기하고 전철을 탈까 하는데 친구가 ‘지금까지 안 왔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금방 올 거야’ 하며 기다리잔다. 정말 그럴까? 다음 10분간에 택시가 올 확률이 평소보다 더 높을까?카지노에 가서 슬롯머신을 당길 때 잭팟이 안 터진 걸 당겨야 할까? 아니면 많이 터진 걸 당겨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안 터졌으니 이제 터질 때가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터져본 게 잘 터진다며 잘 나오는 걸 찾아간다. 마치 그 기계에 잘 터지는 성향이라도 있는 듯. 만약 평
사람은 의식적인 판단을 한다. 의식적인 판단을 하려면 지식과 정보를 되도록 소수로 축약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현재의식이라는 스크린에는 많은 창을 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폰8처럼 300개 창을 띄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띄운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될수록 간결한 표현으로 만들어 마음(뇌)에 저장한다.그게 속담·교훈·가르침에 반영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적선가필유여경(積善家必有餘慶).’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 등이 있다. 이들은 항상
자연계에는 수많은 자연법칙이 있다. 그중 하나라도 발견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에는 매순간 동시에 무수한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 법칙만 작동하고 다른 법칙들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많은 경우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상태에 진공(眞空 물질이 없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공간에 구멍이 뚫린 듯 진공이 있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이게 사실인지를 조사하는 것은 예전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연계에서 진공을
오캄의 레이저(Ockham’s razor)란 같은 값이면 더 간단한 이론을 택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동설보다는 지동설을 택하라는 것이다. 태양계 내행성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있어서 천동설이 (초창기의) 지동설만큼 정확할지라도, 주전원(周轉圓) 등 복잡한 개념을 동원하지 않는 간명한 지동설을 택하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천문학자들은 지동설이 나오고도 한동안은 천동설에 입각한 옛 방식대로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했다. 아직 천문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그게 더 정확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다!) 주전원이
불교는 28개의 하늘나라를 말한다.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질로 이루어진 욕계 6천의 경우 각 천마다 하루의 길이와 1년의 길이가 다르다. 모두 1년은 360일이나, 하루의 길이가 지구 시간으로 쳐서 50~1600년이다. 그래서 1년의 길이가, 지구 시간으로 치면, 1만8000~57만6000년이다. 구체적으로는, 맨 밑의 사천왕천의 경우 지구 시간으로 하루는 50년이고 1년은 1만8000년이다. 바로 그 위의 도리천의 경우는 지구 시간으로 하루는 100년이고 1년은 3만6000년이다.문제는 이
시간은 불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불교는 무상(無常 impermanence)을 고(苦 pains)의 원인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상한 것에 집착하는 데서 고가 생긴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무상한 것은 고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상이란 변화다. 변화는 시간을 따라 일어난다.시간은 윤회론의 바탕이다. 윤회는 시간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 악행을 하고 지옥에 태어나지, 지옥에 태어나고 악행을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불교 인과론(因果論)에 따르면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시간은 인과론의 바탕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과(因果)는 시간에 따
시간은 변화를 통해서 측정한다. 시계는 물의 운동, 해의 운동, 톱니의 운동을 통해서 또는 원자의 운동을 통해서 시간을 측정한다. 여기에는 같은 시간에는 같은 양의 운동이 일어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그런데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즉 아무 물질도 에너지도 없다면, 즉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까? 아차,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측정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므로 ‘아무 것도 없다’는 말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시간을 측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시간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많은 종교인들은 우주의 비밀이 어디엔가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비밀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곳에 가는 방법이 비밀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그 비밀을 풀까? 종교적 수련을 통해서이다. 물론 그곳에는 이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한 해법도 보관되어 있다.하지만 설사 그곳에 간다 해도 문제이다. 그 비밀을 보기만 하면 판독(判讀)할 수 있을까? 이는 처음 보는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그 비밀은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을까? 설사 그 언어를 안다 해도, 그 비밀 지식에 대한 기본 지식이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각 외로 깊은 생각을 했다. 그중에 ‘테세우스의 배(Ship of Theseus)’라는 것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괴수(怪獸) 켄타우루스를 죽인 영웅 테세우스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탄 배에는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는데, 아테네인들이 이 배를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유지·보수하였다. 그런데 부식된 헌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다 결국 모든 부품을 바꿔버리자, 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배가 그대로 남아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다른 배
종교인들 중에 진화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조신을 믿는 기독교인들과 회교도들이 많지만 불교인들도 있다. 진제 종정과 송담 스님이 대표적인 경우다.기독교인들은, 복잡한 눈을 예로 들며, 눈이 설계자 없이 우연하게 생길 확률은 야적장에 쌓인 보잉747 비행기 부품들이 바람에 날려 조립되어 비행기를 만들 확률처럼 낮다고 주장한다.그런데 이들이 간과하는 점은, 생물의 변화가 복리라는 점과 변화기간이 45억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라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이 일정한 규모를 넘어가면, 백년을 넘기 힘든 인간의 짧은 수명과 좁은 시야로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사람들은 부자들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착취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그런데 인구가 많아질수록 착취할 필요가 없어진다. 착취를 해도 많이 할 필요가 없어진다. 1억명의 사람에게서 일인당 만 원씩 착취하면 1조원이라는 거금이 생긴다. 물론 만원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큰돈일 수 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돈도 아니다. 현대의 기업이 돈을 버는 것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 싼값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기 때문이다. 삼성은 1년에
의식과 영혼은 같은 것이 아니다. 종교인들에 의하면, 의식은 영혼의 작용이다. 왜 의식은 몸을 따라 다닐까? 몸이 방안에 있으면 왜 방밖을 볼 수 없을까? 부산에 있으면 왜 서울을 볼 수 없을까? 신라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본 사람은 없다.영혼은 왜 몸을 따라다닐까? 다리가 잘려나가면, 영혼은 다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몸의 어느 부분이 잘려 나가가도, 영혼은 그 부분을 따라가지 않는다. 잘려나가고 남은 부분에 남는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 머리(뇌)이다. 머리가 잘려나가면 영혼은 머리를 따라간다. 머리가 잘려
의식과 영혼은 반드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류의, 육체에만 깃들어야 할까? 심장·허파·방광·간장·위장·대장·소장·지라·핏줄·힘줄·뇌가 있어야만 의식과 영혼이 깃들 수 있는 것일까? 이들 중 일부가 없어도 의식과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이들이, 의식이 깃들기 위한 필수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설사 심장을 기계로 바꿔치기 해도, 간이 기능을 못해 기계로 투석을 해도, 여전히 의식이 있는 걸 보면, 의식과 영혼은 기계에도 깃들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과학이 발달해 기억력·이해력·판단력·언어구사력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