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불교 중흥’에 온몸 던진 이 시대 큰 스승

  • 교계
  • 입력 2023.11.30 20:38
  • 수정 2023.12.01 13:35
  • 호수 1707
  • 댓글 2

해봉당 자승 대종사는

숱한 저항·도전 속에서도 8년 임기 모두 채운 첫 총무원장
사회약자 위한 행보로 위상 제고…신도시 포교 토대 마련
상월결사·인도 순례 등 진행하며 한국불교사 큰 족적 남겨

11월29일 ‘전법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소신(燒身)한 조계종 전 총무원장 해봉당 자승 대종사는 한국불교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든든한 문중의 뒷배도 없이 50대에 총무원장에 선출됐고, 숱한 저항과 도전 속에서도 재임에 성공해 8년 임기를 꽉 채운 첫 총무원장이었다.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상월선원 천막결사, 만행결사, 인도순례 등을 진행하면서 전법을 통한 한국불교 중흥에 앞장서는 등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자승 스님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19세 되던 해 조계종 3·9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경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러나 은사와의 인연은 깊지도, 오래가지도 않았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경산 스님은 상좌를 살뜰히 챙길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고, 자승 스님이 군에서 제대할 무렵 돌연 입적했다. 은사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음에도 첫 은사와 맺은 인연을 쉽게 저버리지 않았다. 1988년 정대 스님(30대 총무원장)과 새롭게 사제의 연을 맺으면서도 첫 은사로부터 받은 법명을 버리지 않았다.

1979년 겨울,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설악산 봉정암에서 홀로 수행했다. 군에서 물든 세간의 물을 빼고 다시 출가자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체감온도 영하 30~40도의 맹렬한 추위에도 새벽·오전·오후·저녁, 하루 4번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그때마다 2시간씩 하루 8시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목탁을 쳤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5개월여의 고된 정진은 설악에 봄이 찾아들면서 끝이 났다.

이후 사판의 길에 들어선 스님은 1986년 총무원 교무국장을 시작으로 규정국장, 재무부장 등에 임명되며 종무행정을 익혔고, 수원포교당·삼막사·연주암 주지 등을 거치며 가람수호와 대중 포교에 매진했다. 1992년 10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되면서 종단 정치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스님은 11대 중앙종회 사무처장, 12·13·14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되면서 중진스님으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폭넓은 인간관계와 종무행정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중앙정치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14대 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거치면서 이미 유력한 차기 총무원장 후보로 거론됐다.

자승 스님은 2009년 10월 총무원장 취임을 하루 앞두고 용산 참사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자승 스님은 2009년 10월 총무원장 취임을 하루 앞두고 용산 참사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스님은 2009년 10월, 제33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중앙종회 종책모임 화엄회를 기반으로 무차회와 무소속 연대의 지지에 이어 야권으로 분류됐던 보림회와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선거인단 320명 중 3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역대 최다 득표인 290표(91.48%)를 얻어 당선됐다.

스님이 33대 총무원장에 취임하며 내세운 슬로건은 ‘소통과 화합을 통한 불교중흥’이었다. “조계종이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화합하지 못한 승가의 모습으로 종도와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줬고, 어렵게 쌓아 올린 불교중흥의 기회도 스스로 놓쳤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스님은 총무원 집행부 구성도 여야를 막론하고 고르게 배분했으며, 대립보다는 화합에 중점을 두고 종단을 운영했다.

스님은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총무원장 취임식 하루 전 당시 한국 사회의 갈등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해 중재를 약속했고, 이웃종교인들을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하며 종교간 화합과 상생을 모색했다. 2010년 1월30일~2월2일 평양을 방문해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50대 총무원장의 의욕적인 행보는 2010년 3월 발생한 ‘봉은사 직영전환 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서울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해 강북의 조계사와 강남의 봉은사를 중심으로 서울 도심포교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지만, 당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거센 반발로 논란을 키웠다. 결국 조계종 화쟁위가 출범해 중재에 나서면서 1년 가까이 지속됐던 봉은사 직영사태는 일단락됐다. 봉은사 문제 해결로 안정세를 찾는가 싶었지만 그해 12월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새해 예산을 단독 처리하면서 템플스테이 예산을 일방적으로 삭감한 사건이 발생했다.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외국인들에게 전통문화를 소개하자는 취지에서 정부의 요청으로 추진됐던 사업이었다. 그럼에도 정부 여당은 템플스테이 예산을 불교계에 대한 특혜, 혹은 ‘선심성 예산’인 것처럼 호도했다. 불교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스님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더 이상 정부 예산에 발목 잡혀 끌려다니지 않겠다”며 정부 여당과의 대화 거부를 선언하고, 내부적으로 ‘자성과 쇄신 5대 결사’를 추진했다. 조계종의 단호한 대응에 정부 여당은 물러섰다. 템플스테이 예산을 복원했으며,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개선을 약속했다. ‘자성과 쇄신 결사’를 통해 사부대중이 한마음으로 결집한 결과였다. 이는 불교계의 위상을 높이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2012년 백양사에서 발생한 도박사건으로 자승 스님은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12년 백양사에서 발생한 도박사건으로 자승 스님은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백양사에서 발생한 도박사건으로 스님은 또 시련에 직면했다. 스님들이 술과 담배를 든 채 ‘포커’를 치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사건이었다. 충격적인 영상에 조계종을 향한 세간의 비판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스님은 대국민 참회문을 발표하고 종단 쇄신을 위해 100일간 108배 참회를 진행했다.

자승 스님의 재임 과정은 험난했다. 백양사 도박 사건을 수습하면서 “재임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모호한 발언이 스님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가운데 33대 집행부를 구성했던 종책모임 무차·무량·보림회 소속 스님들이 ‘3자연대’를 구성하며 호주 순방길에 나선 자승 스님의 공백을 틈타 보선 스님을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자 자승 스님도 귀국과 동시에 “선거로 종단구성원들에게 평가를 받겠다”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선원수좌회를 중심으로 자승 스님의 ‘재임반대’ 여론이 득세한 데다 3자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스님들의 상당수가 그동안 선거 경험이 많고 종단 정치에 잔뼈가 굵은 스님들이었다는 점에서 선거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다. 자승 스님은 전국의 선거인단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고, 진심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그 결과 2013년 10월 진행된 34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전체 선거인단 311명 가운데 179표를 얻어 재임에 성공했다. 

자승 스님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서울 조계사에서 희생자 넋을 기리는 법회를 열어 유가족을 위로했다. 
자승 스님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서울 조계사에서 희생자 넋을 기리는 법회를 열어 유가족을 위로했다. 

1994년 이후 첫 연임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스님은 ‘자비와 화쟁으로 이웃과 함께’를 종단운영의 기조로 삼고 “사회와 이웃을 향한 나눔과 봉사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매월 총무원 차원에서 진행됐던 자비나눔활동을 교구본사와 일반사찰로 확대시켰으며 승려복지회를 통해 중앙과 교구의 역할 분담을 통해 의료비 지원도 확대했다. 그런가하면 세종, 위례 등 신도시 종교용지를 매입해 신도시 포교의 토대를 닦았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자승 스님 재임 4년의 과정은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2014년 선학원 사태, 그해 12월 동국대 총장 선출 논란, 2015년 전 총무원장 의현 스님의 징계 재심파동 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님은 대사회적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사회노동위를 중심으로 노동자, 이주민, 다문화가정 등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활동을 강화했으며, 세월호 참사 때는 진도 팽목항에 임시법당 건립에 이어 서울 조계사에서 희생자 넋을 기리는 법회를 열어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8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스님은 2017년 10월30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조계종사에서 총무원장 8년 연임 임기를 모두 채운 것은 자승 스님이 유일했다.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자승 스님은 다시 인제 백담사 무문관에 들었다. 40여년 전 ‘군대물’을 빼고 ‘중물’을 들이겠다며 설악산 봉정암에서 정진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 ‘행정승’으로 머물러 있던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번의 무문관 수행을 거쳐 자승 스님은 2019년 11월 ‘위례 상월선원 천막결사’를 단행했다. 수행이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한 부분임을 일깨우자는 취지였다. 서릿발 같은 청규를 바탕으로 9명 스님들이 혹한에 맞서 진행한 상월선원 결사는 당시 한국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스님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듬해 10월 대구 동화사에서 서울 봉은사까지 이어진 ‘국난극복 자비순례’, 2021년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해인총림 해인사를 거쳐 영축총림 통도사로 이어지는 ‘삼보사찰 천리순례’, 2022년 ‘생명평화 방생순례’를 차곡차곡 진행했다.

이어 올해 2~3월, 한국불교 중흥과 세계평화, 생명존중을 발원하며 부처님 전법의 길을 따라 43일간 1167km 상월결사 인도 순례를 진행해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역시 부처님이 태어나고 전법하며 열반에 들었던 그 길을 걸으며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사바세계에 새로운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겠다는 자승 스님의 원력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최근까지 한국불교의 미래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생 전법’에 전념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올해 3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상월결사 인도순례 회향식에서 자승 스님은 총무원장 진우 스님과 108배를 하고 있다. 
올해 3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상월결사 인도순례 회향식에서 자승 스님은 총무원장 진우 스님과 108배를 하고 있다. 

그랬던 스님은 11월29일 자신의 기도처였던 안성 칠장사에서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인연 또한 사라지는구나”라는 열반송을 남기고 홀연히 원적에 들었다.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험난한 파고에 맞서 온몸을 던졌던 스님의 치열했던 삶은 한국불교의 변화와 쇄신을 위한 자양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707호 / 2023년 1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