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관스님이 하루는 시자를 불렀다. “무소뿔 부채를 가져오너라.” “부채가 다 부서져버렸습니다.” “부채가 부서졌다면 나에게 무소를 되돌려다오.” 시자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투자(投子)스님은 말하였다. “가져다 드리겠습니다만 뿔이 온전치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설두스님은 이에 염(拈)하였다. “나는 온전치 못한 뿔이 필요하다.” 석상(石霜)스님은 말씀하셨다. “스님에게 되돌려줄 것은 없다.” 설두스님은 이를 염하셨다. “무소는 아직 그대로 있다.” 자복스님은 일원상(一圓相)을 그리고 그 가운데 소 우(牛)자 한 자를 썼다. 설두스님은 이를 염하셨다. “조금 전엔 무엇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느냐?” 보복(保福)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스님은 춘추 높으시니 따로이 사람에게
몸 없는 무명업식의 불쌍한 존재 Q : 불교에서 신(神)을 어떻게 보나요? A :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을 경외시하거나 숭배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신을 앞세워 빌고 구하는 불교는 옳은 불교가 아니며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깨침은 내 앞에 그 어떤 것도 가려있지 않은 마음의 땅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임제선사의 살불살조(殺佛殺祖)가 깨달음의 경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교는 대각자인 석가부처님마저 신격화시키는 무리가 여기저기 수두룩합니다. 더 나아가 해탈자의 구세제민행인 보살상을 무슨 신쯤으로 여기는 수행풍토는 고불고조의 피눈물을 강요하는 배신행위입니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꿰뚫는 비법을 담고 있은 위
쉐우민 사야도 우 코살라 2002년 11월 마하시 사야도(1904-1982)의 수행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신 쉐우민(Shwe Oo Min) 사야도 우 코살라 (U Kosala) 스님(1913-2002)께서 90세를 일기로 입적하셨다. 한국의 많은 수행자들이 스님께서 주석하시던 밍갈라돈에 위치한 쉐우 민 또야 담마수카 수행센터에서 수행했고, 지금도 항상 20명 이상의 수행자들이 쉐우민 사야도 께서 인정하신 젊은 우 떼자니야 샤야도의 지도를 받으며 수행하고 있다. 9살 출가해 20살 비구 우 코살라(미얀마어로는 꼬달라로 발음한다) 스님은 9살에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고, 20살이 되던 해에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 미얀마의 전통적인 교학을 삼장과 주석서, 복주 문헌에 이르기까지 깊이
남전(南泉)·귀종(歸宗)·마곡(麻谷)스님이 함께 혜충국사(慧忠國師)를 방문하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전스님이 땅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려놓고 말했다. “말하면 가겠다.” 귀종스님이 일원상 가운데 앉자, 마곡스님은 여인처럼 다소곳이 절하는 시늉을 하니, 남전스님은 말했다. “그렇다면 떠나지 않겠네.” 귀종스님은 말했다. “이 무슨 수작이냐!” 남전 보원 : 마조도일 스님의 제자 139인 중 한 명, 남전 스님에게서 신라의 도균 선사와 철감국사가 나왔다. 마곡 스님 : 마조도일 스님의 제자로 보철(普徹)이 법명이지만 마곡사의 주석해 마곡 스님으로 더 유명하다.
Q : 얼마 전 라즈니쉬의 강의록을 읽었습니다. 그 후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우주에는 영원의 법칙이 있으며, 죽은 이후 인간은 결국 나를 있게 한 우주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주로 되돌아갈 뿐이라면 붓다는 왜 윤회를 말했을까요? A : 생자(生者)는 필멸(必滅)합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어야하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쇼 라즈니쉬의 우주관이 나오기 수천 년 전에 이미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여부에 상관없이 죽음 그 자체는 멸(滅)이 아니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우주섭리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초과학적 우주관을 정립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낮은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 진의(眞意)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
설봉(雪峰 : 822~908) 스님이 대중 법문을 했다. “남산(南山)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독사가 있다. 너희들은 조심하거라.” 장경 혜릉(長慶慧稜) 스님이 말했다. “오늘 대중들 중에 반드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으리라.” 어떤 스님이 이를 현사(玄沙)스님에게 말하자 그가 말했다. “능사형(稜師兄)이므로 이처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남산’이라는 말조차 할 거 있나?” 운문 스님은 설봉 스님 앞에 주장자를 던지면서 겁주는 시늉을 하였다. *운문문언(雲門文偃, ?~949) : 중국 선종5가(禪宗五家)의 하나로 당말에서 북송대(北宋代)에 걸쳐 성행한 운문종(雲門宗)의 개조.
Q : 깨달음이란 형체도 없고 실체도 없다는데… 조주스님이 깨달았다면, 조주스님이 깨닫기 1시간 전과 깨달은 직후에 조주스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그 변화가 손톱에 일어났습니까, 뇌 속에서 일어났습니까. 그 변화가 깨달음이라면, 그 변화를 잘 분석하여, 사람을 인위적으로 그렇게 변하게 하면 그들 모두는 저절로 깨칠 수 있는지요. 또, 깨달으면 어떻게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A : 조주의 깨달음을 말한다면 그건 조주에게 물어야 합니다. 깨달음은 정신과 육체적으로 뚜렷한 변화가 있습니다. 무심을 체험하면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마디마디 심신의 변화를 일으키지만 대체적으로 언행이 단순 명쾌해지고,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몸을 갖추게 됩니다. 깨달음을 기능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한 생
앙산 화상이 그를 찾아온 납자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에 있다가 왔는가?” “여산에 있었습니다.” “그럼 오로봉에는 가보았겠군.”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이에 화상은 이렇게 그를 질책했다. “이 사람아, 아직 산놀이도 못했단 말인가!” (운문이 이 이야기를 듣고 ‘앙산의 그 말씀은 자비심 때문에 그를 위해 쉽게 말한 것’이라 했다.) *여산(廬山); 강서성에 있는 명산으로 그 중에서도 오로봉은 빼어난 경치로 유명하다. *앙산(807∼883); 소주 회화현 출신으로 속성은 섭씨이며 법명은 혜적이다. 시호는 지통대사. 위산 영우 문하에서 선을 수행, 크게 깨닫고 스승과 함께 위앙종을 개창했다. 소석가(小釋迦)라 불릴 만큼 지혜가 뛰어났다.
Q : 많은 사람들이 업(業)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현재 모습이 업의 결과라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서구인들은 선업(善業)으로 가득하고, 제3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은 악업(惡業)으로 가득하다는 말인지요? A : 부자나라는 분명 그럴만한 복력의 토대가 있어 일마다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며, 그것은 선업의 한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나라는 동기부여가 부족한 결과로 볼 때 공동의 업이 그렇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참선수행은 좋은 국토, 좋은 부모, 좋은 스승 인연 만나는 것도 포함됩니다. 현재는 지난 삶의 거울이듯 업(業)으로부터의 자유는 지혜로서 스스로 운명을 창조하는 법도를 익히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깨우침으로서 진정한 깨달음은 물질의 유 · 무소유와는
하루는 법안 화상이 그의 문하에서 감원을 보면서도 한번도 법문을 청하지 않는 현칙에게 물었다. “나에게 묻지 않는 이유라도 있느냐?” “전 이미 청림 화상 문하에서 한 소식 했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설명해보아라.” “제가 ‘무엇이 부첩니까?’라고 물었더니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 잘못 알았을까 두렵구나. 설명해봐라.” “병정은 불이니 불이 불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너는 잘못 알았다.” 현칙이 수긍하지 않고 일어나 나갔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개운치가 않았다. 다시 돌아와 법안 화상에 물었다. “무엇이 부첩니까?” “병정 동자가 불을 구하는구나.” 이 말에 현칙은 크게 깨달았
Q : 항상 마음에서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납니다. 마치 이른 봄 땅속에 있는 씨앗이 싹이 나오고, 모든 나무와 풀잎들도 새잎이 나오고 계속 잡념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참선을 할 수 있나요? A :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없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본바탕인 생명의 본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죠.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인 것입니다. 지혜를 경험한 사람은 그런 생각들이 선심(禪心)과 같이 있고 부처마음하고 같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멀리 하려고 하지 않고 더 친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써 그걸 더 이해하게되고 그 다음에 더 친해지면은 없애려고 하는 생각 대신에 이것하고 아주 살아야겠다 그러면 그 생각이 일어난 마음
어느 날, 장경(張慶)화상이 보복(保福)에게 말했다. “아라한에게 세 가지 독이 있다고 한다고 해도 여래에게는 방편과 진실 같은 두 가지 말이란 없다. 물론 여래도 일자불설(一字不說)은 아니지만 그러나 두 가지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보복이 물었다. “그럼 여래의 말이란 어떤 거요?” 장경 화상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너 같은 귀머거리는 말해줘도 듣지 못할게다.” 보복이 발끈한 표정으로 되받았다. “흥,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걸 보니 화상께서는 여래의 말은 모르는 모양이군요?” 장경 화상이 맹랑한 놈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여래의 말이 뭐냐?” 보복이 태연히 답했다. “가서 차나 마시지요.”
Q : 참선을 할 때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거나 또 계속해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없애려고 하기도하고, 여러 가지 테크닉을 사용해서 이 일어나는 마음들을 콘트롤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뜻대로 되지 않고 불안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 여러분이 자연스럽게 좌복에 앉을 때 절대 무엇을 빨리 하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냥 붓다 가르침도 생각하지 말고, 바이블도 생각하지 말고, 법문도 기억하지 말고, 자기 마음에서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든 간에 일어난 것을 자각하고, 돌이켜보아 깨어있는 상태에 있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 가면 모든 것이 내게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선(禪)은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곳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조라는 수좌가 하도 좌선을 많이 하여 마치 죽은 사람이나 나무등걸 같았다. 그러나 회양선사는 그 때 마조의 공부에 진전이 없음을 알고 마조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합니다.” “무엇 때문에 좌선을 하는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날 회양이 벽돌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 물었다. “벽돌은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어떻게 벽돌로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 “그러면 좌복 위에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하나 수레를 때려야 하나?” 이 말끝에 마조는 확연히 깨달았다.
Q : 계율과 기도불공은 참선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 불교에는 불공(佛供)드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는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의 씨앗을 깨달아 꽃을 피워 그 향기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 꽃을 보고 향기를 경험하게 되면 모든 좋지 않은 냄새가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어두운 것들, 즉 모든 번뇌 망상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부처가 경험한 깨달음의 꽃입니다.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씨앗이 있습니다. 따라서 불공이란 씨앗이 싹을 틔우도록 하기 위해 망상을 쉬고 신심을 키우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성을 들이는 일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지나가다가 금강경 독송하는 소리에 깨달으셨습니다. 또 혜가대사도 보리달마의 한마디에 깨달
경허 큰스님이 서산의 천장암에 계실 때의 일이다. 하루는 경허 큰스님의 형이신 천장암 주지 태허 스님이 인근에 사는 갈산 김씨네 49재를 올리기 위해 장을 크게 보아다가 온갖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이 당시만 해도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라 동네에 큰 제사나 잔치가 있다고 하면 떡과 과일을 얻어먹기 위해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경허 스님이 누더기 한 벌로 보임하며 주석했던 천장암. 천장암에서 아무날 아무시 갈산 김씨네 49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장암으로 모여들었다. 산 사람에 공양물 보시 법당 안에 차려진 온갖 떡과 과일, 동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군침부터
경험·비유 통해 교리 적확히 해설 일상에서의 다양한 수행법 소개 세계적인 종교지도자 틱낫한은 스님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명상가로서 더 많이 인식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소개되거나 알려진 틱낫한 스님의 면면은 거의 다 명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틱낫한을 스님이 아닌 명상가의 측면을 애써 부각시키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출간된 틱낫한 스님 저술 편집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책을 낸 거개의 출판사들은 의도적으로 그의 책에서 불교적 색채가 짙은 내용을 삭제했다는 것은 출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다면 틱낫한은 누구인가? 스님인가, 아니면 스님의 모습을 한 명상가인가? 불교저술가 진현종씨가 연초에 번역해 내놓은 책, 『틱낫한 스님
금강경에 해박해 ‘주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던 덕산이 어느 날 남방의 마구니들이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말을 하면서 교학을 우습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혼내주려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혼내주기도 전에 풍주에서 떡장수 노파를 만나 일전을 겨뤄 참패하고 말았다. 전말은 이렇다. 풍주에 도착한 덕산은 점심때가 되어 요기를 하고자 길거리에 전을 펼쳐놓은 한 할머니를 찾아갔다. “어서 오시오. 바랑은 여기 내려 놓으시고. 그런데 바랑 속엔 무엇이 들어 있소?” “금강경 주석서요. 아주 귀한 책이오.” “그래요? 내 마침 궁금한 게 있어 물어보려고 했는데 스님이 가르쳐 줄 수 있겠소? 그리하면 내가 공짜로 점심을 드리리다.” “금강경과 관련된 것은 뭐든 물어보시오.” “경에 과거의
Q : 선(禪)하는 사람들은 책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저희는 지금까지 책 속에 진리가 있다고 배워온지라 이 말이 혼란스럽습니다. A : 수행을 하기 위해서 책을 볼 때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공(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에서 ‘공이다’라고 읽고 그만 둡니다. 그러나 공을 경험한 사람은 거기다 공이라 써놓고 어떤 사람이 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 “공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 관한 책을 읽을 때는 그런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가 없이 책을 읽으면 그때는 지혜를 놓친 관념의 세계에서 읽기 때문에 우리의 두뇌가 지쳐버려서 실제 수행을 할 때 아주 큰 방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깊은 뜻을 놓치고 맙니다. 아는 것과 지혜는
목주 화상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요사이 어디서 지내다가 왔는가?” 그러자 그 스님이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허어, 네게 일할을 당하였구나.” 그런데, 그 스님이 또다시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목주 화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서너 차례 소리를 지른 다음에는 어찌 하려는고?” 그 스님은 그만 말문이 콱 막혔다. 이에 목주 화상이 그 스님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호통을 쳤다. “이런 사기꾼 같은 놈!” *목주 스님(?~850) : 황벽 희운의 제자로 도명이라고도 한다. 중국 복주의 용흥사에서 종적을 숨기고 항상 짚신을 삼아서 몰래 노상에서 팔았으나 세월이 오래되어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학인들이 찾아와 물으면 묻는대로 대답하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방에서 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