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내용 중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다”는 선불교의 일화는 불교와 선에 대한 확실한 이해의 바탕이 됐다. 달을 가리키는 것은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실천할 때 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독송하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도 삶속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뿐이다.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해왔던 오온이 모두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현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실체가 없어 텅 비어 있는 것, 즉 무아(無我)임을 깨달아야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명징한 불교의 가르침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우리는 모든 자연현상도 연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우현상에 비유하자면 구름(因)이 찬
사월 초파일에 어머니를 따라 사찰음식을 먹는 재미로 절에 가서 절 구경하고 부처님께 현실적인 소원을 빌고 오던 어린 시절, 쭈그리고 앉아서 먹었던 산채비빔밥이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지금도 군침이 돌 정도다. 그 후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종교생활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1996년 경 직장에서 불교모임이 결성되고 이에 동참해 불교공부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부산으로 인사이동을 하면서 불교와는 다소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마음 한 켠에 걱정이 생겼지만 스스로 신행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발원한 이후 더 큰 공부의 인연이 다가왔다. 때는 올 3월초. 어느 일요일 오후 우연히 광복동에 있는 미타선원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관음전에 들러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불 공부의 단계에서는 각각의 초를 1000장 정도씩 그리기를 권하지만, 각자의 근기에 맞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불화 작업은 무수히 많은 선들이 모여 공간을 만들어 내고, 그 공간 안에 경전에서 묘사 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보살님들이 계신다. 그 모습을 신앙의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장엄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화인 것이고, 그 첫 단계가 사불작업이다. 그 작업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출된다. 불화 그리기 작업은 수없이 많은 초 작업의 반복으로 시작하여 만족스런 초가 나올 때까지 그린다. 그렇게 나온 초를 기초로 배접이란 것을 하게 된다. 한지를 여러 장 겹쳐 발라서 그 위에 광목 등 다양한 천을 올려 풀칠하고 나서 채색이 들어가는 것이다. 장엄한 불화는
나는 기독교적 사고 공간 안에서 성장하며 살아온 시간이 삼십년이 넘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내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권유로 불교적인 토대에서 운영하는 명상수업을 받게 되면서 부터다. 일상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1주일 정도를 예정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뭔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3개월이라는 시간을 그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 놓고 나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것들이 ‘불교라는 틀로 정리 되어야 하겠구나’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천주교와의 인연을 끊게 되기까지 일도 마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서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예정
사경을 수행으로 받아들인 후 내가 나를 이겨나가는 가운데 세월의 구비마다 처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니 이것은 사경을 통하여 얻는 나만의 능력이며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보배임에 틀림없다. 내가 지고 가기에는 버거운 일들이 사경 속에 녹아들어 나도 모르게 편안하니 한 점 한 획이 부처요, 내 마음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득하니 정말 아름답고 즐거운 수행이다.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 고요한 시간을 이용하여 6시까지 사경한다. 3시간동안 모든 마음 다 내려놓고 사경한 이 원력이 동력이 되어 하루하루가 아무 일 없는 듯 하니 이 시간의 사경은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작품을 할 때는 10시간 씩 몰입할 때도 있다. 경문을 눈으로 읽고 소리 내어 염송하고 마음으로 이해한 뒤 무아의 심경으로 정성을
사경을 시작한 것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되었으나, 본격적인 수행의 차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세례 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다가 결혼한 이후 시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절에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접한 절집분위기가 내 안방같이 편안했다. 전혀 이해 할 수 없고 알아듣기도 힘든 그 독경소리를 아무런 배타심 없이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전생의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기법회도 없던 그 시절. 똑딱거리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독경소리에 힘들어 하는데 은사이신 상덕 스님께서 잣죽 한 그릇을 쑤어 내 손을 붙들고는 해인사 원당암 혜암 노스님 앞으로 ‘화두’라는 것을 받으러 갔다. 지금은 입적하시고 안계시지만
미얀마의 쉐우민 센터에는 내가 그토록 찾았던 법이 있었고 스승이 계셨고 도반이 있었다. 때문에 고향 같은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 곳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는 기회를 얻었고, 통찰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그렇게 부처님이 법과 수행을 따르는 것이 마지막으로 내가 선택해야하는 길임을 깨닫고 돌아왔다. 부처님의 수행법은 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행 중에 몸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느낌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는 것임을 배운다. 즉, 일상의 알아차림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식사할 때 음식물을 씹는 과정을 통해 입 속에서 일어나는 맛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청소를 하면서 짜증나는 마음을 보고 그냥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임을 아는 것도 수행이다. 앉아있을
나는 오랜 기간 미술 지도를 해왔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미술 교육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학생과 학부모님들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 많이 지쳐있던 나약한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난 자연스레 ‘미술 치료’라는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술 치료’는 그림에 나타난 외적인 형태를 보고 그 마음을 읽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마련해주는 일종의 정신적인 치료 방법이다. 그 때 치료 과정에서 나타난 나의 마음은 집착, 욕심, 두려움, 혼란이 뒤엉킨 상태였다. 그렇게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길 잃은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자아실현을 이루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물질만능주의
대만에서 수행할 때 주로 종 스님이 나의 아픈 곳을 치료해 주었고, 그때부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행을 하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슴과 왼쪽 다리가 아파서 못하던 오체투지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3시간씩 오체투지를 하기도 할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 대만에서의 수행은 이처럼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고, 가피였다. 그곳에서의 2주간 생활이 바로 극락세계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마치 꿈만 같은 2주간의 수행여행이 끝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조금의 피로감도 없이 오히려 힘이 더 생겨났다. 이때쯤이면 녹초가 되어 돌아오겠거니 생각했던 가족들은 생생한 내 모습에 놀라기까지 했다. 이젠 그렇게 고생하던 허리도 그다지 아프지 않고 매일 가족들이 주물러주어야만 했던
2008년 4월 어느 날 노경숙 보살님의 권유로 보리법문을 접하게 되었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인해 척추와 왼쪽 다리를 다치면서 후유증으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가족들 도움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할 때였다. 그래서 5월 들어 남편과 함께 기초 수련을 받게 됐다. 당시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픈 몸에 집착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5월 5일 첫 수업에서 대광명수지법을 배우는데 도저히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관상 중에 자꾸 연꽃에서 떨어지고 주저앉고 쓰러지려고 했다. 너무 힘이 들다 보니 내가 이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신감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다 금요일에 처음으로 각성 스님과 함께 수업을 했는데, 스님을 처음 뵙는 순
어린 손자가 지독한 아토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 가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인내의 시간이었다. 외할머니인 나를 비롯해 아이 엄마와 아빠 등 가족들 모두가 아이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아이 곁을 떠나지 못하고 교대로 24시간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다른 일을 전혀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루 종일 제 몸을 긁어대기만 하는 아이의 손에 거즈로 장갑을 만들어 끼워주고, 장난감을 직접 만지지 못하기 때문에 손에 대 주기도 했다. 그리고 때론 책을 잃어주고 잘 때도 양손을 꼭 잡고 자야만 했다. 그렇게 손자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염불만일회 성지대회에 참석했다. 성지대회에서 ‘나무아미타불’ 염불 정진을 하면서 마음 속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
처음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딸만 셋인 내가 안쓰럽게 보였는지, 절에 가서 열심히 불공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절에 갈 것을 권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웃집 아주머니를 따라 집에서 가까운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가 음력 10월 15일이었고, 그날로부터 정성을 다해 백일 정진에 들어갔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고,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지는 더더군다나 몰랐다. 그런 내가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절에 가서 아들 하나 낳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매달렸던 것이다. 다른 발원은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도록 보살펴 달라는 원도 없었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원도 없었다. 그저 오로지 아들 하나 낳게 해 달라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