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불교교육원에서 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공부와 수행에 대해 조금씩 알기 시작하면서 108배에 관심을 가졌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매여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점심시간에 시간을 내서 108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일배 일배 하면서 내 손바닥 위에 부처님의 발이 편안하게 올려 질 수 있는 기분으로 지심귀명례를 한 것이 1년이 되었다. ‘나에게도 이젠 의지할 곳이 있구나’ 하는 자부심과 용기, 정말 거룩한 부처님의 후광이 얼마나 나에게 든든하던지 지금은 우울증도 거의 없어졌고, 항상 내 근무지에는 불교방송과 천수경 테이프와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어떤 직원들은 작은 법당이라고 하고 청청한 도량 같다고도 한다. 몸무게도 10kg 가량 줄었다. 신기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간간히 극락에 계실 엄마에게 편지 올리면서 눈물 흘리지만 어느 때나 할 것 없이 엄마를 생각하기만 해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난다. 내가 참다운 불자의 길을 가게된 것은 사실 2년 전 엄마의 49재를 지내면서다. 당시 첫 번째 재를 지내는 것 자체가 걱정이었다. 그동안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아도 사는 데는 별다른 장애가 없었고, 스님의 법문 한 번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막상 재를 지내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 큰 고민을 안게 됐다. 그러던 중 엄마의 유물을 정리하며 법공양이라는 책을 보게 됐고, 영가 천도에 대한 설명을 읽게 됐다. 아마도 광명진언과 절하는 순서와 방법 등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두 차례 연습을 하고 그 다음날 첫 번째 재를 맞이했다.
나를 버리고 나니 모든 것이 다 좋아졌다. 몸뚱이가 괴롭도록 절을 하며 울면서 부처님께 매달릴 필요도 없어지니 힘들지 않아 좋고, 애들 팽개치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 줄어드니 남편 성화를 듣지 않아 좋고, 절에 들어가야만 수행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있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식으로 부지런히 살 때는 하나도 좋아진 것이 없었는데 나를 포기하니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좋아졌다. 그러니 복잡하게 머리 써야 할 일도 없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일이어서 바쁜 마음도 쉬게 되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가만히 견디어 내고 기다리면 되니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는 대로 감사하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업보중생이라는 굴레는 나를 바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였지만, 그 중생인 나를
절에 들어와서 생활한지도 벌써 4년. 막중한 책임과 업무 때문에 피곤에 절어서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에게 맡겨진 일에 의해서 생의 보람과 기쁨을 찾고 있다. 지금 내가 기거하는 이곳은 담양에 있는 자그마한 절로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신앙을 하는 문사수법회의 정진원 정토사다. 이른 결혼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시부모님의 시집살이와 남편과의 갈등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힘이 없어 처음 부처님을 찾았었다. 나만 살자고 들면 헤어지면 그만이겠지만 어린 나이에도 그런 무책임한 행동은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아서 친정어머니로부터 익숙해진 부처님께 의지코자 절을 찾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업장을 알았고, 우린 단순히 그 업장을 참회하며 복을 지으며 살아가면 된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고통으로 다가오는 이 생활
이듬해 2월말로 연구소 의무복무기간이 끝나자 나는 보림선원에 입주했다. 거사 불교를 알지 못하는 부모 형제들은 내가 승려가 되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울기까지 했다. 당시 보림선원에는 대여섯 명의 젊은 학인들이 입주해 살고 있었는데 백봉 선생님은 입주 학인들에게 끝없이 자비심을 베푸셨다. 저녁 공양을 마치면 학인 들을 불러 놓고 30분 정도 과외 학습을 시켜 주셨다. 선문염송의 예화를 들은 후 질문하시거나 선시집에 나온 시귀의 뜻을 질문하셨다. 낮에 편히 쉬고 있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도 질문을 던지셨다. 선생님의 질문은 언제나 평이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을 때 선생님이 다가 오시면서 ‘최군, 뭐하고 있나?’하고 물으셨다. 나는 ‘예, 잡초를 뽑고 있습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보내온 달라이라마 봉축 메시지 공문. 인간으로 나시어 깨달음을 얻으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법을 설하신 지 25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세존께서는 법을 듣고자 하는 일체 중생들에게 평화로이 가르침을 주셨으나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협박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르면서, 또 존귀한 가르침에 귀의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폭력으로 자신의 주의나 이념을 강요했던 여러 시대의 독재자들은 그 영향력이 불과 100년을 넘긴 경우가 거의 없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차원이든 사회 전체의 경우이든 진정한 변혁은 오로지 자발적인
불교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신일고등학교 3학년 때 세계 4대 종교를 소개하는 과정 중 불교를 소개할 때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소개되었는데 교목선생님은 반야심경을 구해 읽어보도록 추천했다. 나는 신에 예속되지 않은 불교의 인간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린 인간관에 매료되었다. 1973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후 불교학생회에 가입했으나 동아리 활동에 빠져들지 못했다. 그리고 2학년 이후는 불교학생회 모임에 전혀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후 이기영 박사가 주도하는 구도회에 가입했고 모임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우리는 주말마다 절을 빌려 모임을 했다. 승가사, 진관사에서 많이 했고 때로는 동국대에 있는 정각원에서 하기도 했다. 주말 모임에는 50명에서 100명 정도 모였으며 언제나
그리고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에서 정진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의지를 다잡는다. 그 가운데서도 아들의 변화는 나에겐 큰 힘이 된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일들로 나를 힘들게 했던 아들은 내가 참회 정진을 시작한 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지금은 학급에서 반장도 하고, 일요가족법회에 참가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누구보다 적극 나서는 모범생이 됐다. “모든 참회의 근본인 절을 통해 몸을 낮추고 마음을 낮추라”는 스님의 가르침은 이제는 나에게 좌우명과도 같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절을 하면서 참회기도를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지만 가족의 변화되는 모습에서 용기를 얻는다. 기도를 시작한 후 나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 무겁기만 했던 몸이 예전에 비해 한결 가벼워졌고,
새벽 4시, 자명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천근만근 같은 몸을 추슬러 부처님과 마주한다. 부산 성암사 주지 응현 스님으로부터 숙제를 받고 난 후, 변화된 하루의 시작 모습이다.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주무시지 않지만 언제나 두 눈 부릅뜬 스님의 모습이 없었다면 오욕의 하나인 수마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응현 스님과의 인연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힘들어 방황하고 있을 때 성암사를 소개받으면서다. 나는 성암사 경남불교대학을 다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참다운 불자의 길을 걷게 됐다.너무나 끔찍해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지만, 남편의 사업실패로 3년간 소득 없이 지낸 적이 없다. 정말 남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늘 남편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나, 남편의 일
나와 부처님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절을 다니면서부터다. 그러나 부처님을 삶의 의지처로 삼은 것은 아마도 25년 전부터인 것 같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나의 의지처임을 믿으며 살아왔으나 부처님 공부와는 사실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삼독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내가 신묘장구대다라니 정진을 시작하면서 많은 참회를 하게 되었고, 긍정적인 삶을 실천하는 참다운 불자로서 그 모습을 갖춰 나가게 됐다. 나는 지금 루프스라는 면역질환성 관절염으로 오랜 기간 동안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그 부작용으로 만성신부전증이 발생해 일주일에 3~4번의 혈액투석 치료를 받고 있다. 지금도 나는 혈액투석을 하러가기 전 반드시 부처님 전에 앉아 다라니 108독을 독송한다. 일상이 되어 가는 이 정진
위빳사나 수행은 끊임없이 대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대상을 잊어버리고 고요함에 젖어버리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을 놓치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삼매에 들려고 하는 마음조차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셨다. 삶에 있어 큰 사건도 없고, 일상이 그저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 보이고 허무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어떤 불만족이 싹트고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들, 삶 속에서의 피하고 싶은 어려 소소한 일들, 이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괴로움으로 다가 왔다. 고통과 괴로움에서 힘들어하는 것도 알아차림의 부재였지만 지혜의 부재였기도 했다. “고통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오는 고통, 육체로부터 오는 고통, 그러한 고통을 회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