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익진 등 "의상 부각 위한 의도적 폄하" 주장 석길암, "원효가 아닌 中법장 비판한 것" 반박 원효와 의상이 한국불교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원효는 국내에서 독학하며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등 100여종 240여권의 저술을 남기면서 귀족 중심의 불교를 민중불교로 전환시켰고 중국의 지엄에게서 수학하고 국내로 돌아온 의상은 한국 화엄종을 개창하면서 실천적 화엄사상을 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대에 활동한 이들은 2회에 걸쳐 함께 입당(入唐)을 시도할 정도로 친밀했으며 의상이 귀국한 이후에도 사상적 교류는 활발히 진행됐다. 특히 중국에서 새롭게 정립된 화엄 교학을 수용한 의상은 원효와의 사상적 교류를 통해 한국화엄사상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日학자, “禪 바탕서 정토 수용한 보조 저술” 주장 고익진 등, “보조는 정토사상 배격 했다” 반박 새로운 선사상의 체계를 수립하고 정혜결사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1158∼1210). 그는 고려 후반기 불교 내부에서 발생한 선교(禪敎)의 대립과 시대적인 혼란 등 격동기 속에서도 정법불교·수행불교라는 불교 본연을 재건(再建)하기 위해 실천불교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불교계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선교 대립의 극심한 상쟁 속에서 사상적 통일성을 위해 독특한 수행이론과 지도체계를 성립하였으며, 후학들을 지도하기 위해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동안 보조의 저술로 알려진 것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원돈성불론
황수영 등 “출토지역-조각기법 신라의 것” 주장 강우방 등 “신라 조각기술, 백제 보다 미천” 반박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된 광륭사(廣隆寺) 소장 목조반가사유상은 뛰어난 조각미를 보여 불교미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특히 그 자세나 분위기가 형언할 수 없이 신비롭고 자비로운 모습이어서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언제 어느 나라에서 조각된 것일까. 그 동안 일본학자들은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광륭사로 수학여행을 왔던 한 일본학생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불상을 안게 됐고, 학생의 실수로 불상의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면서 일본 국보 1호 불상이 일본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서울 은평구 인의선원(주지 무공 스님)이 3월 21일 은평구청 앞 도로에서 ‘사찰철거 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인의선원 신도들은 “은평구청이 지난해 12월 ‘사찰 부지가 북한산 도시자연공원의 일부이므로 올 12월까지 자진 철거하라’고 일방적으로 고지했다”며 밝히고 “대안도 없이 지난 20여년간 펼쳐온 지역 포교와 복지활동은 무시한 체 사찰 철거만을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종교탄압”이라고 성토했다. 인의선원에 따르면 지난 2002년부터 현 사찰 부지가 살림청 소유의 국유림에 속해있어 주거환경 개선지구 편입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은평구청은 이를 거부해 왔다. 인의선원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70여가구는 동일한 공원구역 내에 위치해 있지만 2000년경 주거환경 개선지구로 편입됐다.
전남 목포 달성사의 목조 지장 보살 반가상 등 5점이 지난 3월 19일 새벽 도난 당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날 도난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보문화재는 목조지장보살 반가상을 비롯해 비지정문화재인 시왕상 1구, 사자상 1구, 판관동자상 3구 등이다. 특히 목조지장보살 반가상은 지방문화재 229호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1565년(명종 20) 남평(나주) 웅점사(운흥사)에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장보살은 우측 다리를 밑으로 내리고 좌측 다리만 가부좌를 했으며 민머리, 눈과 눈썹, 코와 입 등의 조각 수법이 사실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지장보살반가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한 불상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조선 초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돼 왔다. 목조지장
중국학자, “낙양에서 인쇄, 신라가 수입” 주장韓 학자, “피휘자 - 닥종이 사용… 신라의 것” 반박1966년 10월 세계인들은 경주를 주목했다.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광경』)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 경덕왕대인 750년께 석가탑 조성과 함께 봉안된 것으로 그 동안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 왔던 일본 호류사 『백만탑다라니』(770)보다 20여 년 앞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쇄 문화를 가진 나라로 평가되기 시작했다.그러나 화약을 비롯해 인쇄물, 나침반, 종이 등 세계 4대 발명품을 만든 것을 긍지로 여기던 중국학계로서는 이 같은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곤란했다. 이에 중국학계는 1980년대 이후부터
신용하 등 “독립선언서 쓴 육당 작품” 주장 김상현 등, 증언 근거제시…“만해의 작품”반박 일제의 강압에 비폭력으로 맞선 3·1운동의 정신은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으로 압축된다.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은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비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행동강령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독립선언서’보다 ‘공약삼장’을 트집 잡아 민족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약삼장’은 누구에 의해 작성됐을까. 그 동안 학계에서는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혜봉 등 “비행기 - 佛具 헌납… 명백한 친일” 주장 박희승 등 “뒤로는 독립군 지원… 위장 친일” 반박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 중 하나가 과거사 진상규명에 대한 논란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특별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를 통과했고 또 지난 3월 3일 국가보훈처가 ‘친일전력이 있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취소’함에 따라 일제시대 친일 행위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이 같은 사회적 이슈에 발맞춰 최근 설봉산 지족암 주지 혜봉 스님이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앞장섰던 불교계 인사들의 친일자료를 묶어 『친일승려 108인』을 발간하면서 불교계에서도 또다시 친일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불교계 친일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일제시
고익진, “융불의 저술이다”주장에 김상현, “법륭 저술을 범체가 기록” 반박 중국 화엄종의 2대인 지엄(智儼)이 『화엄경』의 요체로 제시한 십구(十句)를 풀어 쓴 『십구장(十句章)』을 접한 고려 초 고승 균여(923∼973)는 고민에 빠졌다. ‘중생을 위해 모든 경전을 쉽게 풀어 쓰겠다’는 발원을 세운 그로서는 『화엄경』의 핵심내용이 담겨져 있는 『십구장』을 누가 썼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 『십구장』의 여러 이본(異本)들이 있었고 저자에 대해 많은 이설(異說)들이 회자되고 있었다. 따라서 균여가 『십구장』의 저자를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균여는 『십구장』을 쉽게 해설한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를 저술하면서 여러 이설들을 검토했고 당시 존
고유섭 등 “미륵사지∼, 목탑에 더 가깝다” 주장 윤무병 등 “정림사지∼, 사비시대 초기 건립”반박 현존하는 백제의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석탑. 이 두 불탑(佛塔)은 한국 석탑의 기원(起源)을 알려주는 단서로 미술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돼 왔다. 불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찰의 중심에 건립하는 것으로 불교가 전래된 초창기에는 목탑(木塔)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목탑은 재료의 특성상 유지관리가 힘들었고 이에 선조들은 탑을 건립함에 있어 새로운 양식을 시도했다. 즉 탑의 재료를 목재에서 석재로 바꾼 것이다. 백제 사비 시대(538∼660)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하는 중간 양식으로 한국 탑 양식의 변화를 고
역사학계, “중앙집권제 강화 위한 이념”주장 불교계, “연기법 강조한 대승불교 핵심”반박 신라 의상(義相, 625∼702)에 의해 막이 오른 한국 화엄사상. 이후 화엄은 한국불교사상의 근간이 되어왔다. 특히 개체와 개체 또는 개체와 전체사이의 조화와 평등을 강조하는 원융(圓融)과 중생제도를 강조하는 보현행원을 핵심 사상으로 하는 화엄 사상은 신라 중기 이후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이념적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몇몇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의상의 화엄사상은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립시키는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후 화엄사상은 논쟁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단국대 김문경 교수는 “화엄 사상은 일심(一心)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統攝)하는 것으
진찬(眞撰) 두고 韓·日 30년 논란 '가택설' 주장에 "사상적으로 원효의 것" 반박 신라 정토사상을 이해하는 지침서로 알려져 있는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의 진짜 저자는 누구일까. 1960년대 이전까지 학계에서는 『유심안락도』가 『무량수경종요』, 『대승기신론』과 함께 원효의 대표적 저술로 믿어왔다. 이는 『유심안락도』의 전반부에 『무량수경종요』의 문장이 상당수 인용돼 있을 뿐 아니라 일본 승려 장서(長西, 1184∼1128)의 『정토의빙경론장소목록(淨土依憑經論章疏目錄)』에서도 『유심안락도』가 원효의 저서로 기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4년 5월 경주에서 원효의 입적(入寂) 연대가 686년으로 기록돼 있는 ‘서당화상탑비’(誓幢和上塔碑)가 발견된 이후 이에 대한 연구가 뒤따르면서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2일 오전 8시 25분 전격적으로 정토회관을 방문, 지율 스님을 만났다. 법장 총무원장 스님은 도법 실상사 주지 스님과 함께 총무부장 무관 스님, 기획실장 여연 스님, 사서실장 심경 스님 등 종단 집행부 각 부-국장 스님 등을 대동하고 정토회관을 찾았다. 지율 스님을 만나기에 앞서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과 약 20분 가량 환담한 법장 스님은 "타협이나 조건으로 (지율 스님의 단식을) 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만 정부에 대해서는 개발 정책이 인간을 잘 살고자 함이 목적인데 인간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 판에 경제성이나 효율성 만을 거론 하는 것이 타당한지 묻고 싶다"고 따끔히 충고했다. 법장 스님은 환담 후 지율 스님이 거처하고 있는 정토회관 3층 염
최연식, “금나라 정언의 저술” 주장 김방룡, “사상적으로 보조 作” 반박 2000년 이전까지 불교학계에서는 한국 선서(禪書)의 백미(白眉)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진심직설』의 저자가 보조국사 지눌이라는 점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2000년 6월 당시 서울대 강사 최연식 박사는 ‘『진심직설』의 저자에 대한 재고찰’이라는 논문(「한국도서관·정보학회」31권 2호)을 통해 “『진심직설』의 저자는 보조가 아닌 금나라 승려 정언(政言)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논문에서 “『진심직설』을 지눌의 저술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명판 대장경에 수록된 『진심직설』이 지눌의 저술인 『고려국보조선사수심결』의 바로 뒤에 연이어 수록되어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저술인 『계초심학인문』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치열한 불교논쟁사, 사상적 심화 이끌어 논쟁이 학문발전의 자양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객관적인 주장과 논리적인 반박은 사상의 폭을 넓히고 학문의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학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비록 종교를 다루는 학문이지만 다양한 해석과 검증은 사상의 깊이와 신앙적 틀을 더욱 견고히 하도록 한다. 이런 까닭에 2600여년 전 부처님조차 무언가를 강요하기보다 제자들과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 자신의 깨달음을 확실히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인도불교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스리랑카 등 남아시아와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면서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불교논리학파와 힌두 논리학파와의 500년에 걸친 무수한 논쟁, 티베트 불교를 성립토록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