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곡과 성철이 비를 흠뻑 맞아가며 맨발에 어깨동무를 하고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향곡은 성철에게 문수라 부르고, 성철은 향곡에게 보현이라 불렀다. 서로 문수야, 보현아를 부르며 빗속을 오가자 대중은 처마 밑에 우르르 모여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봉암사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봉암사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걸망을 싸는 스님도 많았다. 성철에게 ‘적당히’란 없었다.‘20여 명의 수좌가 한 방에 앉아 벽을 마주하고 선정에 들면 태고의 정적이 감돌았다. 발우공양
“신도들은 스님을 보면 삼배를 해야 했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승려는 신도가 찾아오면 달려가 배례했으니, 천한 무리임을 자처했던 질곡의 세월에서 벗어남이었다. 그날 신도들은 모두 스님들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렸다.”봉암사 식구들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스님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했다. 중국 옛 총림의 청규정신으로 돌아갔다. 당나라 때 백장은 아흔이 넘어서도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았다. 제자들이 건강을 염려하여 호미를 몰래 감춰버렸다. 그러자 백장은 방에서 나
“비단 승복과 나무 바리때를 부수고 잘라서 마당에 쌓아놓고 성철이 직접 성냥을 그어 불태워버렸다. 그 속에는 성철이 지니고 있던 은행나무 바리때도 있었다. 스승인 동산 스님이 내려준 것이었다. 발우를 주는 것은 법통을 이으라는 무언의 바람 아니었던가. 이 소문을 멀리서 들은 동산이 노기를 섞어 말했다.”봉암사 첫 공사는 법당 정리였다. ‘부처’ 아닌 것들은 모두 없애버렸다.“우리 한국불교는 가만히 보면 간판은 불교 간판을 붙여 놓고 있지만, 순수한 불교가 아닙니다. 칠성단도 있고, 산신각도 있고, 온갖 잡신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있습
“봉암사 결사 소식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멀리 번져나갔다. 해가 바뀌자 해인사 가야총림 공사에 참여했던 청담과 도반 향곡이 올라왔다. 이어서 월산, 홍경, 응산 등이 합류했다. 그리고 참된 수행에 목이 말랐던 젊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1947년 가을이었다. 성철, 우봉(1898~ 1953), 보문(1906~1956), 자운이 문경 희양산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봉 50세, 보문 42세, 자운은 성철보다 한 살 많은 37세였다. 네 선승은 그간의 ‘더부살이’를 끝냈다. 우리끼리 반듯하게 살아보자고 뜻을 모았다.
“성철이 7년 동안 제방에서 머물고 있었음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보임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절인연이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성철이 봉암사로 간 까닭은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하여 지혜와 자비를 전파하려 했음일 것이다.”성철은 깨친 후에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송광사, 수덕사, 간월암, 법주사, 도리사, 대승사, 통도사 등 제방에서 안거를 했다. 1940년 오도송을 외친 이후 7년 동안 안거를 거르지 않았다. 이를 오후보임(悟後保任)이라 말하는 이들도
“도우와 함께 해인사를 빠져나온 성철은 양산 통도사 내원암에 들었다. 청정승가 복원을 서원했던 성철은 그곳에서 도반들을 찾았다. 성철은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설파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싶었다.”세간에 성철은 딸 하나만을 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두 딸이 있었다. 성철의 큰 딸 도경은 예쁘고 똑똑했다. 집안 어른들은 도경을 끔찍이 아꼈고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녔다. 식구들은 아버지 성철이 없었기에 더 애틋한 정을 쏟았을 것이다. 동생 수경(불필 스님)은 언니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언니는 할아버지의 훤한 인물을 닮아 이마
"성철은 그렇게 떠나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외로운 길이었다. 일타의 눈에 비친 뒷모습은 당당했다. 송광사 화엄전 뒷길로 성철은 사라져갔다. 일타는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성철은 깨달음을 얻은 후 큰스님을 찾아다녔다. 나름 인가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성철은 산을 허무는 천둥 같은 법거량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계산의 효봉도, 덕숭산의 만공도 성철과 법거량을 하지 않았다. 단지 성철이 큰 법기(法器)라는 것만은 알아주었다.성철은 도반에 대한 칭찬은 많이 했지만 상대적으로 불교계 스승이라
"해방이 됐다고 부처님 법이, 또 수좌들 수행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청정 승가의 복원을 발원했던 선승들은 서로를 찾았다. 멀리 있어도 법향은 전해졌다."성철은 책을 스승 대하듯, 또는 아기 돌보듯 했다. 절 살림에는 도통 무심했지만 책만은 철저히 관리했다. 어디에서 살든 봄 가을에는 바람을 쐬어주었다. 그때는 꼼짝 않고 곁에서 책을 지켰다. 대지를 녹이는 봄기운이, 삽상한 가을바람이 책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참 무섭대요. 책을 얼마나 귀하게 다루시는지는 책 한 권 드는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손이 달달달 떨
"김병룡에게서 얻은 책은 트럭 한 대 분량이었다. 성철은 이 불서들을 아꼈다. 거처를 옮길 때마다 책부터 챙겼다. 해인사 백련암에 있을 때는 아예 장경각을 지어 보관했다. 그리고 혼자만 열쇠를 지녀 누구도 드나들 수 없게 했다. 성철은 수좌들에게 책을 멀리 하라면서도 자신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고 또 책을 아꼈다. 성철은 그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글을 남겼다."‘성철 스님은 대한민국의 대표선사며 우리 시대의 부처로 추앙받는 국민선사다. 피나는 좌선과 아울러 우리 역사상 가장 다양한 책을 많이 읽은 선지식이라 해도 과언이
"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1945년 늦봄, 14세 소녀가 대승사 산문을 넘어왔다. 청담의 둘째 딸 인순이었다. 인순은 ‘인간 사냥’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일제는 조선 부녀자들을 색출해서 일본군위안부로 끌고 갔다. 조선이라는 이름
"성철과 청담은 대승사에서 총림 구상을 했고, 모든 개혁의 지향점은 ‘부처님 당시처럼’으로 정했다. 훗날 봉암사에서의 수행 전설은 대승사에서 비롯됐음이었다. 성철과 청담은 총림을 해인사에 세우겠다고 못 박고 있다. 해인사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법향(法鄕)으로 여겼던 것이다."청담이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발신지가 상주가 아닌 문경이었다. 상주포교당에 묶여있던 거주 제한이 풀려 대승사로 옮겼으니 함께 정진하자는 내용이었다. 1944년 가을, 성철은 도리사를 떠나 문경 대승사로 옮겨갔다. 대승사 선원에는 청담 외에도 자운, 홍경
"성철에게는 머물 절도, 따르는 신도도 없었다. 또 시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형편을 잘 알고 있는 도우는 향을 사르고 불당을 청소해서 얻은 돈 10원을 스승께 보낸 것이다. 당시 쌀 한 말에 3, 4원이었으니 쌀 서너 말 값이었다. 이렇듯 선승들은 굶주리며 정진했다." 성철은 청담을 상주포교당에 남겨두고 다시 선방을 찾아 나섰다. 물이 되어 또 구름이 되어 깃드는 곳이 곧 수행처였다. 청담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쇠약해진 몸은 걷기에도 힘이 들었다. 성철은 도우와 더불어 문경 사불산 대승사를 찾아갔다. 그곳 쌍련선원에서 겨울
“성철은 복천암에서 범어를 새롭게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성철은 한글이 가장 정확하게 범어를 옮길 수 있는 소리글임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천제는 성철이 범어를 원음으로 옮겨서 진언을 제대로 외우도록 가르친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며 스승을 기렸다.”“신미대사가 당시에 범어에 능통했고,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고 말씀하셨다. 범어를 모태로 해서 생긴 소리글이 바로 한글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큰스님은 범어를 익혀 능엄신주를 비롯한 선문에서의 진언과 다라니를 직접 음역하여 원음에 가깝게 독송하도록 하셨다. 범어를 모태로 하여 만든 한글로 음
"청담이 없는 복천암은 살림이 엉망이었다. 당장에 공양주도 없었다. 이때 조실스님이 나서서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러자 너나없이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며 보름씩 공양을 책임지기로 했다. 성철은 공양주를 맡은 적이 없음에도, 또 자신은 생식만을 하고 있음에도 공양주 역할을 잘해냈다고 한다."성철과 청담은 1943년 봄에 만나 함께 정진하자고 약속했다. 성철은 약속대로 간월암을 나와 도반 청담이 머물고 있는 법주사 복천암에 들었다. 법주사 큰 절에서 오른쪽 샛길로 근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복천암은 720년(신
"만공의 뱃길을 따라서 성철은 1942년 봄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크게 가두는 일이었다.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경허가 천장암에 숨어든 것처럼 외딴 섬에 자신을 부렸다."성철은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내포지역 산사를 둘러봤다. 가야산, 상왕산, 연암산을 두루 찾아갔다. 특히 자신이 출가한 가야산이 충청도에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야산(678m)은 서산시 해미· 운산면, 예산군 덕산· 봉산면, 홍성군 갈산면, 당진군 면천면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이곳 가야산이야말로 일찍이 100개가 넘는
"1941년 동짓달 초하루는 이상언의 회갑 날이었다. 해 질 무렵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그때까지 꼿꼿이 술잔을 들었던 아버지 이상언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러자 식구들이 울고, 하객들도 눈물을 찍어냈다. 끝내 잔치마당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1941년 통합종단인 조선불교조계종이 탄생했다. 사찰령에 의거한 31본사체제에 불만이 컸던 조선 불교계는 중앙의 총본사 설립을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계종의 탄생은 불교계의 기도에 응답이 아니었다. 총본사의 출현은 불교계의 여망과는 달리 총독부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만공은 처음 온양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두 번째는 양산 영축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다시 자신이 중창한 덕숭산 정혜사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성철은 몇 번에 걸친 깨달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철은 송광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예산 덕숭산의 정혜사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능인선원이 있었고, 당대 선지식인 만공 스님(1871~1946)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은 효봉에 이어 만공을 찾아 나선 것이다.덕숭산은 고찰 수덕사가 있어 수덕산이라고도 불린다. 가야산, 오대산, 용봉산과 마주보고 있다. 덕숭산, 가야산, 용봉산 일대에는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하는 것으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이 혼입되어 선문이 교가화됨으로써, 순수선은 없는 실정이다.’ 이렇듯 성철은 지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성철은 누구에게도 오도의 순간을 얘기하지 않았다. 경허는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은 구멍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용성은 ‘경덕전등록’의 ‘달은 만궁(彎弓)과 같은데 비는 적고 바람은 많다’는 구절을 읽고 대오했다. 만공은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성철은 마침내 견성을 이뤘다. 이름대로 자성을 깨쳐 확철대오했다. 억겁의 어둠을 사르는 촛불을 밝혔다.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처가 없다는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를 성취했다. 1940년 29세의 겨울, 출가하여 무자 화두를 들고 수행한 지 4년 만이었다." 성철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에 들었다. 동화사는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했고 832년(흥덕왕 7) 심지대사가 중창했다. 중창불사 당시 현장에 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어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성철은 계속 무자 화두를 들었다. 성철은 말이 줄어들었다. 눈빛은 형형했고, 특히 좌복 위에서 새벽을 맞았다. 다른 선승들은 홀로 깨어있는 성철이 무섭게 느껴졌다." 1940년 2월,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이다. 겉으로는 권장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성은 목숨처럼 귀한 것이었다. 조상이 물려주었으니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따라서 성을 바꾸라는 것은 피를 속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백성들은 성과 이름을 고쳐야 했다.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