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 줄 알아서 내 마음 속의 무진장 보물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빌어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해인총림은 일약 선승들의 참선도량으로 솟아올랐다. 전국에서 수좌들이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가야산이 있었고, 가야산 바위를 닮은 성철이 있었다. 사람들은 성철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성철이 있는 곳에는 ‘적당히’가 없었다. 수좌들은 서릿발처럼 매서운 경책을 무서워하면서도 또 곁에 가고 싶어 했다. 모두 큰 가
“잠이 꽉 들어서도 한결같은 오매일여의 경계가 있다 하면 벌써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만 가지고 보아도 선문에서 조사나 종사라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8지보살 이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아무리 깨친 것 같고 지견이 분명하더라도 오매에 일여한지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또한 무심의 경계를 체득했다 하더라도 그 곳에 머물면 마구니 경계가 됨을 알아 확연히 깨쳐 내외명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성불은 마음의 눈을 떠서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며 이를 견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철은 불교를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난
“옛 스님들도 늘 하신 말씀이다. ‘죄 중에 사람을 죽이는 죄가 가장 크지만, 공부니 수도니 한답시고 허송세월하는 놈이 있으면 그런 놈은 하루에 만 명을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모름지기 부지런히 노력하고 또 노력할 일이다.”해인총림 방장 성철은 선방에서 참선 수행하는 수좌들을 아끼고 존중했다. 그러자니 절 살림을 꾸려가는 스님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대신 선방 수좌들에게는 엄격한 수행을 요구했다. 안거 후에는 필히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을 하도록 했다.성철은 죽비를 들고 선방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졸고 있는 선
“성철과 덕산의 인재불사 발원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참된 시주와 불공은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던 성철이 덕산을 가까이 했음은 그에게서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철의 반대에도 권력에 맞선 것은 어쩌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음인지도 모른다. ”성철은 승려 정규대학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 속에 또 아쉬운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재가불자 덕산 이한상(1917~1984)이다. 사람들은 덕산(德山)이란 그의 호를 따서 ‘덕산거사’라 불렀다.절집에 처사는 많지
“성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패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정화란 모름지기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성철은 정화운동 초기에 15명으로 구성된 정화대책위원에 선임되었지만 이를 박차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종단은 ‘세 불리기’에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성철은 해인사 백련암에 들었다. 1966년 가을이었다. 해인사 주지 자운 스님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였다. 자운이 제자들에게 말했다.“김룡사에서 어렵게 지내신다 들었네. 백련암을 비워놓았으니 이제 그만 해인사로 오시라고 말씀드리게. 해인사는 성철 스님이 출가
“‘스님 절을 마쳤습니다.’성철은 미리 끓여놓은 죽을 들게 하고 뒷방에서 자라고 했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났을 때 여인이 집에 가봐야겠다며 인사를 올렸다. ‘더 쉬지 않고 벌써 가려 하시오.’ ‘아들이 집에 오는 꿈을 꿨습니다. 가봐야겠습니다.’”사람들은 절에서 기도드린다 함은 시주금과 공물을 바치고 소원을 비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소원을 빌 때도 본인보다는 스님이 대신해주기를 바라고 그래야 기도의 효험이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성철은 타력(他力)에 의해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다고 단언했다. 오직 자력에 의한 기도와 불
“중이 신도를 대하는 데 사람은 안 보고 돈과 지위만 본단 말입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난 이 대문을 들어올 때는 돈 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일주문 밖에 걸어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하지. 사람만 들어오라 이겁니다. 그리고 들어오면 ‘내가 뭐 잘났다고 당신을 먼저 만날 수 있나?’ 하지요. 부처님을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을 정말로 뵈려면 절을 삼천 번은 해야지요.”절은 실상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어떤 상(像)이나 그림이나 조각에 절을 해도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비록 흙덩어리나 썩은 나무에 절
“김룡사의 성철은 인재불사를 서둘렀다. 사람을 키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퍼뜨려야 했다. 성전암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나눠줘야 했다. 절문을 열어 사부대중을 맞았다. 성철은 불교의 핵심사상에 대해 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대중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그렇게 하심(下心)을 갖춘 이들에게 비로소 법문을 했다. 자신이 집대성한 중도사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화중생(下化衆生)이었다.”북한산 도선사에서 청담과 겨울을 났다. 청담과 성철은 당시에 많은 사진을 찍었다. 아마 행자나 신도가 줄곧 따라다니며 도반의 ‘행복한 시간’을 담았을 것
“종단 개혁을 구상하고, 도선사를 수행 정진도량으로 만들자는 데 마음을 같이했다. 성철과 청담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불사, 즉 승가의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승가대학을 세워보자는 염원을 담아 실달학원(悉達學園)이란 현판을 도선사에 걸었다. 실달이란 부처님 이름인 싯다르타에서 따왔다. 성철은 틈만 나면 승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성전암이 산자락 벼랑에 제비집처럼 간신히 붙어있었지만 그 안의 성철은 산보다 더 큰 존재였다. 법명이 누리를 덮었다. 그러자 성철을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다. 파계사 한송 스님 상좌가 성전암을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이라도 해 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같은 스님네한테 속
“해제일에 성전암을 찾아온 수경과 옥자에게 성철은 각각 불필(不必)과 백졸(百拙)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야 도를 이룰 수 있고, 백 가지 즉 만사에 못난 사람이 돼야 성불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수경과 옥자는 매화산 자락에 있는 청량사로 들어갔다. 유발한 채 성철이 내린 화두를 들고 정진했다. 수행의 교과서는 성철의 법문노트였다. 성철이 써 준 12두타행(12고행)을 그대로 실천하려 했다.‘성하고 새것은 누가 주더라도 받지 않는다./ 여벌옷은 쌓아두지 않는다./ 누구든지 청해서 주는 것은 받지 않고 오직 얻
“성철은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치라고 했다.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른바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출가였다. 비구와 대처승의 절 뺏기 싸움이 한창일 때 성철은 불교의 내적 정화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성철은 천제굴에서 가족과 화해를 했다. 딸에게는 출가를 권유했고, 딸은 영원한 행복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또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갔고, 결국 아들을 대장부로 인정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다시 속연을 끊음이었다. 통영은 산청 속가와도 가까웠다.
“성철이 천제굴에서 있을 당시 한국불교는 정화운동에 휩싸였다. 성철은 정화운동의 본질은 불교개혁인 만큼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전념하자고 주장했다. 수행 정화를 해야지 힘을 동원한 세몰이식 사찰점거는 더 큰 부작용을 몰고 올 것이라며 이를 경계했다. 성철의 판단은 옳았다. 이때 동원된 ‘급조된 승려’ 문제는 이후 두고두고 한국불교의 발목을 잡았다.”1954년 5월21일 대통령 이승만은 매우 특별한 유시(諭示)를 발표했다.“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유시란 관청에서 백성에게 내리는 가르침이다. 당시 대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면 꼭 퍼부어야 할 말들을 준비해갔다. 아들을 보자마자 외쳤다.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그런데 그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만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더는 따져들지 못했다. 아들은 대장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천제굴에 딸 수경이 찾아왔다. 묘관음사에서 만난 지 5년만이었다. 이번에는 성철이 불러들였다. 전쟁이 나자 수경은 서울서 진주로 내려와 진주사범 병설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53년 봄,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수경은 진주 숙모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이듬해 늦봄 어느 날 스님이 수경을 찾아왔
“성철은 천제굴을 찾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이때부터 성철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 한국 불교사에 ‘삼천배’란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승려란 결국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 부처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철은 삼천배를 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시오. 나는 해줄 게 없습니다.”성철은 1952년 창원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이어받은 성주사 대중이 성철을 모셔왔다. 성주사는 불모산(佛母山)에 있다. 불모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을 지칭한
“성철은 다시 혜춘에게 주장자를 내리쳤다. 혜춘 역시 매를 피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성철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 이렇듯 가혹한 경책은 선종사에서도 흔치 않았다. 성철은 몽둥이로 말하고 있었다.”도인으로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천제굴을 찾아왔다. 어느 날 여섯 보살이 토굴을 찾아왔다. 안정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천제굴로 올라왔다. 혜춘도 그중 하나였다. 혜춘은 4남매를 둔 세칭 ‘높은 집 마나님’이었다. 성철이 돌아가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맨 마지막에 혜춘을 보며 말했다.“왜 불교를 믿으려 하
“성철은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도 생식을 고집했다. 그러자 앞니가 벌어지고 손톱이 엷어져 휘어졌다. 향곡이 그것을 보고 몇 번이나 생식을 멈추라 말했다. 그러나 성철은 한 마디로 물리쳤다. 그러던 성철이지만 제자의 간곡한 청만은 뿌리칠 수 없었다. 출가 이후 16년 동안 고집했던 생식을 포기했다.”6·25전쟁이 터졌다.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야만의 시간은 누가 풀었는가. 피 냄새가 작은 동쪽나라를 뒤덮었다. ‘으뜸 가르침’이라는 종교도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광기가 스며있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내용도
"이윽고 성철이 향곡과 함께 나타났다. 깁고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수경은 마음속으로 ‘저 분이구나’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그 순간 성철이 소리 질렀다. 가라, 가!"봉암사를 나온 성철은 향곡과 함께 묘관음사에서 겨울을 맞았다. 묘관음사는 월내(부산 기장군)라는 작은 어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바다가 가까웠다. 운봉 스님(1889~1946)이 토굴을 짓고 정진하던 곳에 1941년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운봉은 경허의 세 달 중 하나인 혜월(하현달)의 법을 받았다.
“성철이 가만히 보니 시절이 수상했다. 스님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성철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 모두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봉암사의 실질적인 대표로 인식되어 ‘손봐 줄 대상’이었다. 당시 편을 가르는 사회 분위기로는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들이 산문을 넘어왔다. 문경 봉암사는 빨치산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었고, 실제로 산사람들이 봉암사 인근에 자주 출몰했다. 이에 군경의 출동도 잦아졌다. 빨치산은 기어이 봉암사에도 들이닥쳐 식량을 약탈해갔다. 어느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봉암사는 희양산 흰 바위만큼이나 높이 솟았다. 봉암사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퍼져나갔다. 선승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부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절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선방에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봉암사 스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