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은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 구경에 나섰다. 늙은 공양주보살은 밥을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리고 마하연을 나서는 모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개울이 나오면 손을 잡아 건너고, 험한 오르막길을 만나면 등에 업고 오르고,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이면 앉아 함께 쉬기도 했다." 성철은 혈육을 멀리했다. 찾아오는 어머니마저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돌까지 던졌다. 속세에 있었다면 천하의 불효자식이었다. 하지만 불가에 들어 법명을 받은 불자는 다르다. 성철은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깨치겠다는 발원문(發願文) 마지막에 ‘소림문손(少林門
"성철과 향곡은 운부암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이후 향곡이 먼저 입적할 때까지 가장 편하게 대했던 도반이었다. 하지만 구도의 여정에서는 누구보다 준엄하게 서로를 경책했다. 체구가 크고 근기마저 비슷해서 두 선승이 으르렁거리면 범종이 울고 산천이 놀랄 정도였다." 1939년 팔공산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북 마하연 남 운부암’이라 불릴 만큼 남쪽의 대표적인 수행도량이었다. 운부암은 은해사에서 산길 3킬로미터를 더 올라가야만 나타난다. 651년(신라 진덕여왕 5년) 의상 스님이 창건했고, 절을 지을 때 상서로운 구름이 줄곧
"추운 겨울날임에도 강씨 부인은 아들을 찾아가려 보따리를 꾸리고 있었다. 이를 보자 참았던 분기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상언은 부인 강씨를 향해 숯불이 담긴 화로를 던졌다. 물론 부인을 향해 정면으로 던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로에서 쏟아진 불씨가 부인의 오른쪽 눈에 박혔다." 묵곡리 집은 장남만 보이지 않을 뿐 그대로였다. 일찍부터 장남노릇을 해 온 차남 호주(昊柱)는 인근에 잘 알려진 유지였다. 형과는 달리 성격이 활달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다. 활솜씨가 뛰어나 국궁대회에 나가면 우승을 놓치지 않았고, 한 잔 걸치면 술친
"어머니는 또 가슴이 무너졌다. 소리 없이 선방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당겨보았다. 역시 문이 잠겨있었다. 아들이 잠근 문을 열어 달라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돌아섰다." 어머니 강상봉이 범어사 원효암을 찾아갔다. 큰절 범어사에 들러 아들을 찾으니 원효암에서 여름 안거 중이라 일러주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아들이 늘 마음에 걸렸다. 계절이 바뀌면 약과 의복을 마련하여 성철을 찾아갔다. 그러나 성철은 어머니를 아예 만나주지 않았다. 해인사에서도 그랬고, 범어사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원효암은 금정산 중턱에 있다. 의상대사
"성철은 용성 스님의 손상좌였다. 용성은 성철이 정진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봤다. 흡사 할아버지가 손자의 글공부를 지켜보듯 했다. 용성이 보기에 성철은 큰 그릇이었다. 제대로 배워 제대로 간다면 크게 깨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성철이 선방에 앉아있으면 그대로 그득했고, 그 뒤태만 봐도 안심이 되었다." 성철은 1936년 스승 동산 스님을 따라 부산 금정산 범어사로 옮겨갔다. 의상대사가 문무왕(678년) 때 창건했다고 알려진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이었다. 금정산과 범어사라 부르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동래현
"영주는 곧장 백련암을 찾아갔다. 동산 스님을 뵙고 절을 올렸다. 스님은 속가를 다녀온 영주를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래, 결심하였는가? 예, 스님.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아하 올해는 백련암에 봄이 일찍 오겠구먼. 그렇게 동산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영주는 봄날 묵곡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돌아옴이 아니었다. 더 멀리 떠나기 위해 잠시 들른 것이었다. 속가에는 숱한 인연이 고여 있었다. 그 인연 속으로 들어가 인연을 끊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식구들은 이미 영주가 지리산에서 가야산으로 옮긴 후
"영주는 날을 잡아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훗날 자신이 그곳에 머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처음 본 백련암은 정겨웠다. 동산은 영주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영주의 답을 들으며 동산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긋이 쳐다봤다. 이윽고 나직이,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중이 되시게. 감전된 듯 아무 말을 못하고 있는 영주에게 동산은 몇 마디를 보탰다." 해인사 퇴설당에서도 화두를 들었다. 선방 대중들의 묵언이 호통보다 무겁고, 고함보다 예리했다. 죽비소리에 자신만의 마음을 펼쳤다. 그러면 ‘눈 쌓이는 집’ 퇴설당에 보이지 않는 눈이 내렸
"주지 고경의 배려로 유발속인 영주는 선방에 들었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당시 선방은 퇴설당(堆雪堂)이었으니 바로 ‘눈 쌓이는 집’이었다. 이 당우명은 선종 제2조 혜가 스님의 구도와 관련된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퇴설당 벽에는 혜가의 설중단비도(雪中斷臂圖)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선승이 ‘눈 쌓인 집’에 들어 번뇌를 베어냈을 것이다." “속인이 대원사에서 무섭게 정진하고 있다.”소문은 바람처럼 빠르게 산문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대원사의 대처승들은 불편했다. 영주의 치열한 공부는 자신들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젊은이가
"‘서장’은 어림 850년 전에 깨쳤던 대혜가 청년 영주에게 선(禪)의 요체를 전하는 편지였다. 북송, 남송 교체기 피폐했던 시대의 대혜가 역시 일제강점기 궁핍한 시대의 조선 청년 영주에게 주는 가르침이었다. 영주는 대원사 탑전에서 불서를 보고 참선하는 방법을 익힌 대로 용맹정진했다. 24시간 내내 허리를 방바닥에 대고 눕는 일이 없었다." 가을이 깊어갔다. 계곡의 물소리가 가늘어지고 경내에는 낙엽이 수북했다. 영주는 탑전에 들지 못하고 대신 요사 작은 방에서 책을 보거나 사색에 잠겼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갈 길은 먼
"스물세 살 청년은 대원사의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대원사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에도 대처승들의 절이었다. 작정하고 공부하러 들어간 그해 가을의 대원사 광경을 성철은 훗날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마당에는 속가의 옷들이 빨랫줄에 늘어져 있었고, 바람이 풍경을 울릴 때면 기저귀나 여자 속옷이 나부꼈다. 승려들이 왜경에게 술을 따르고 함께 고기를 뜯었다. 중들의 얼굴이 대원사계곡에 떨어진 단풍보다 붉었다."영주는 불교를 더 알고 싶었다. ‘문자가 없는 경’의 세계를 체험하고 싶었다. 아예 절집에 머물며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었
"책을 펴자 머릿속이 환해졌다. 1300년 전에 살았던 선승의 노래가 한 청년의 가슴을 적시고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지금까지 봐왔던 공맹과 노장 및 제자백가의 사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갑자기 한밤중에 밝은 해가 솟아 앞길을 환히 비추는 것 같았다. 부처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중생이 곧 부처였음을 처음 밝힌 분이 석가모니부처였다. 영주의 방황이 마침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비상(砒霜)을 품에 넣고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자유를 찾아 헤매는 영주를 식구들은 비상하게 지켜봤다. 영주의 고뇌는 부
"영주가 읽은 책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영원한 삶’ 같은 낙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길, 즉 구원에 목말라 있었음을 암시하는 방황의 흔적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용운 스님이 해설을 붙인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를 읽었다. 그리고 한 군데에 눈이 딱 멈췄다. 글자가 한 자도 없는 경이 과연 무엇일까. 이때 영주는 이미 불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성철은 청소년기에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최후가 있었다. 생
"성철은 1912년 4월6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1920년 4월 단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동급생은 거의가 스무 살 전후 청년들이었다. 학적부에는 입학 이전에 서당서 글을 깨친 것으로 기록돼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이미 ‘서유기’ ‘삼국지연의’ 같은 중국 기서를 읽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유교의 나라는 망해가고 있었다. 꺼져가는 왕조의 끄트머리에서 종교는 ‘으뜸 가르침’이 아니었다. 삿된 것들이 정법을 능멸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홀로 깨쳐 암흑기에 선(禪)의 등불을 밝
"성철의 빈자리는 깊었다.빈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벌써 성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간 한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가시는 님은 이승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권부의 이력도 이재의 축적도 없이수저와 그릇, 누더기 옷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가난해서 행복했던, 그래서 거침이 없었던 선승이 떠나갔다. 선승은 산문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았지만 세상이 가야산 속으로 들어왔다. 지상에서의 최후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
노승이 언덕을 건너가고 있었다.해인사의 아침은 맑고 고요했다. 새소리만 퇴설당 작은 마당에 떨어졌다. 성철은 제자 원택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몸은 무척 가벼웠다. 제자는 스승의 작은 숨소리에 제 숨소리를 포갰다.1993년 11월4일, 입적하자전국서 조문객들 발길 이어가을비 속 하루 2만 명 찾아다비식 날 2000여개 만장과500여명 스님 행렬 뒤 따라오열하는 중생들 남겨둔 채한 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져아침공양을 마친 스님 몇이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비질은 조심스럽고 섬세했다. 낙엽을 모아 태우며 연기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