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가지 않은 길이다.삭발염의에 맑은 스님을 만날 때마다 그 길에 미련은 무장 커진다. 고백하거니와 출가를 진지하게 고심할 때가 있었다. 송광사로 구산 방장스님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밤중에 불쑥 찾아갔던 기억도 새롭다. 대학 새내기인 내게 구산 스님은 자정이 다가옴에도 마다하지 않고 시간을 내주셨다. 당돌한 물음에 벼락같은 외마디를 지르거나 방망이로 치는 따위 없이 다사롭게 응대하셨다. 방장실을 나설 때 받아온 ‘법문’은 세 글자, ‘동사섭’이었다. 그 뜻을 늘 헤아려보라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동사섭. 사섭의 하나로, 고통
오래 전에 작고한 거물 시인 김수영의 산문 중에는 “참다운 노래가 나오는 것은 다른 입김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입김/ 신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릴케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송가’)이라는 릴케의 시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반시론(反詩論)’) 김수영은 릴케를 통해 시가 세상의 얄팍한 유용함이 가닿지 못하는 무망(無望)하고 참된 신의 입김이라는 생각에 접근한다. 그런데 이 산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가 릴케의 ‘신의 입김’에서 ‘담배연기’를 연상하는 대목이다. 늘 줄담배를 피며 시 쓰는 자신을 보면서 그는 시가 나오는 입김과
극지연구소 김예동 소장이 ‘남극을 열다 (지식노마드, 2015)’를 보내왔다. 이 책은 그가 저술한 일본 남극탐험의 개척자인 시라세 노부의 전기이다. 백색의 제 7대륙이라고 부르는 남극은 지구표면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륙의 98%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황량한 땅이다. 남극은 연구를 위한 몇몇 나라의 과학기지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대부분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땅으로 남아있다.남극은 18세기에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최초로 발견했으나 남극탐험의 영웅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은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과 영국
“당신은 그렇게밖에 살 수 없어?!”하는 물음에는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까?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해야 할까? 아니면 “당신이나 잘 사세요”해야 할까? 이런 식의 문답은 토론이 아니다. 비난이니 꾸짖음은 토론으로 전개될 수 없고, 어떤 생산적인 결과도 낳을 수 없다.요즈음 한창 뜨거운 열기를 탔던 청문회의 방식도 전혀 토론과는 다르다. 어떤 인물이나 사안의 이면까지 꼬치꼬치 캐내고, 문제가 없는가를 검증하는 과정과 토론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목적이 다르고 방법 또한 다르다.부적절한 논점을 가지고 강변을 하거나,
“부처님의 법은 법당에 박제되었고, 수행은 좌복에 갇혔으며, 실천은 삼촌지설이 되었다. 수행과 생활의 공간인 사찰을 우리 스스로 관람의 대상으로 전락시켰고, 깨달음을 향해 쉼 없는 구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를 번뇌에 얽매여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범부로 만들었다.”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으로 규정한 말이다. ‘종단 혁신과 백년대계를 위한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를 시작하는 자리였다. 이어 공동추진위원장 지홍 스님은 “조계종단의 과거와 오늘을 진단하고 미래를 하나씩 설계해 나가야한다”면서 대중공사가 “1994년
‘공(空, sunya)’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되는 불교적 허무주의는 ‘인생이 허무해!’와 같은 식으로 세상에서 회자되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불교의 ‘허무’는 고정된 것, 고착된 것, 그 자체의 성질, 불변의 실체를 부정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만상을 끝없는 변화와 생성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여기에서 실체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나’ ‘자아’란 개념이다. 만상에 실체가 없다면 ‘나’ ‘자아’도 실체가 없을 것이다. 자아의 ‘실체 없음’을 풀어서 얘기하면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다여서럽다 우리들이여공덕 닦으러 오다“신라시대에 양지(良志)스님이 영묘사(靈廟寺)에 진흙으로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및 전탑(殿塔)의 기와를 만들 때에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불렀다는 향가 ‘풍요(風謠)’이다.새해가 밝았다. 작년은 종교의 의의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뜻 깊은 해였다. 세월호 참사는 삿된 종교집단이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칠 수 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었다. ‘불자로서 올해 과연 어떻게 살아야하나?
눈이 번쩍 뜨일 소식을 접했다. ‘북한 주민들, 남북관계 개선 촉구 대규모 군중대회’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소식이다. 눈을 비비고 보아도 틀림없다. 한 겨울의 추위처럼 얼어만 가던 남북관계에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10만 이상의 주민대회라니 그 열기도 뜨겁지 않겠는가? 벌써 필자를 순진한 소리하는 사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또 북한의 진의, 그런 교시를 내린 김정은의 속셈은 무엇인가에 대한 부정적인 분석들이 꼬리를 물을 것이라는 것도 환히 보인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 과민하게만 반응하는가? 좋은 말은 좋은 말로
흔히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힘 모아 일순에 돌파하는 일 못지않게 문제를 지며리 풀어가기 쉽지 않아서다. 그 과정에서 개혁 주체는 늘 깨어있어야 한다.새해를 앞두고 세모에 법보신문 벗들과 곡차를 나눴다. 교계 언론이 어디까지 보도해야 옳은지 토론이 오갔다. 예시된 사례가 이른바 ‘음란사진 기사’다. 한 인터넷 신문이 보도한 기사의 들머리는 사뭇 준엄하다. “승려끼리 성행위를 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유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연이은 승풍 실추 행위에 조계종단이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직면할
평소 알고 지내는 건축가선생님의 대학원 종강 수업에 초대되었다. 건축에 관해 문외한인 내가 초대에 응한 것은 그 수업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이 수업의 한 학기 테마는 ‘문화생태지도 그리기’였다. 한 학기 동안 그 학교가 속한 동네 구석구석을 수강생들이 답사하며 일반 행정지도가 파악하지 못하는 생활의 구체상을 발견하여 지도로 만들어 발표하는 수업이었다.어떤 학생은 그 동네의 특징으로 화분에 주목했다. 발표를 보니 양상이 다양했다. 화분의 종류도 옆으로 길쭉한 화분, 깊숙하게 움푹 패인 화분, 스티로폼으로 만든 화분 등 다양했으며, 화
또 한 해가 간다. 이맘때쯤이면 으레 ‘올해의 4자성어’나 ‘내년의 4자성어’가 선정되곤 한다. 고작 네 글자지만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정리하고 희망과 기대를 담아내니 4자성어가 품은 의미는 매우 넓고 깊다 하겠다. 4자성어를 꼭 한문고전에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2014년의 4자성어는 ‘아, 세월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476명을 태우고 인천을 떠나 제주로 가던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스스로 세월호 밖으로 탈출한 생존자들 말고는 단 한 사람의 목숨도 구해
망년회의 시절이다. 가는 해를 잊어버리자는 연락들이 도처에서 날아와 캘린더에 화살처럼 박힌다. 시간의 가장 신비한 점은 방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지 결코 그 반대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이다. 과학자들은 시간이 약 140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 때 공간이 함께 생겨나 우리의 우주가 탄생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통일체인 시공간(spacetime)의 다른 속성임을 밝혔다. 시간의 화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