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08성지순례는 끝났다. 9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한 신심으로 뚜벅뚜벅 걸어 회향했다.금동관음보살상 반환 애쓰며재적사찰 부석사 회보 발행편집 맡으며 초심자 안내도아직 포교사로서 재적사찰 핵심신도로서 역할이 남았다. 사찰에는 늘 봉사자가 필요하다. 특히 서산 부석사는 일본에서 되돌아온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간단히 언급하자면 사연은 이렇다. 2012년 절도단이 일본 대마도에서 훔쳐 국내로 반입한 불상이다. ‘고려국서주지부석사(高麗國瑞州地浮石寺)’ ‘천력삼년(天曆三年)’이라고 쓰인 조성기에서 1330년 서산 부석사
그래, 아마도 전생부터였나 보다. 부처님과 인연은 숙연이었다.교회에는 별 흥미 없던 유년삶의 무게 나눌 곳 찾다 귀의초심자들 돕고자 포교사 품수불교가 익숙했다. 어릴 적 TV에서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보면 마냥 좋았다. 왜 그럴까 깊이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친구들이 교회를 가자고 할 때도 그랬다. 가 봐도 남의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재미라고 할까 흥미라고 할까, 모두 없었다.어떻게 살아왔나.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부처님을 향해 있던 마음, 하지만 제자리걸음이었던 그 마음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부
쉽지 않았다. 포교사 자격고시에 또 떨어졌다.3번 도전 끝 포교사 재 품수장의염불·군법당·소년원·병원인연 닿는 곳곳서 전법 활동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차를 2번씩 갈아타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아쉬웠다.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4남매와 남편, 시어머니 모두 건사해야 했다. 주경야독이란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재입학한 불교대학을 향하는 차 안에서 책을 펴야하는 날이 계속됐다. 부처님 일이었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몸과 세상 제일 무거운 눈꺼풀을 붙들고 공부했다. 포교사가 돼야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1980년 5·18 소재 영화관람전법하는 사명감 다시 느껴힘들었지만 불교대학 재입학1980년 5월, 서울 한 택시운전사가 서툴고 짧은 영어로 독일인과 말을 나눴다.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 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원을 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황량한 광주 거리, 그 거리에 오가는 군인들과 탱크 그리고 광주 사람들. “모르겄어라, 우덜도 우덜한테 왜 그라는지….” 기자였던 독일인은 대학생과 광주지역 택시운전사의 도움 속에 촬영을 시작했다. 상황은 점점
불교대학에서 경전, 선, 불교미술, 비교종교학, 현장수업인 문화유적답사 등 불교분야를 폭넓게 알게 했다. 특히 현장수업으로 야외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남산을 다녀온 이후 불교유적의 매력을 느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지도교수와 ‘당간지주문화유적답사반’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14년째 문화유적답사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대부분은 불교유적인데 국보와 보물인 탑, 불상, 부도 등이 벌판에 혹은 산속 언저리에 덩그러니 놓였고 관심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매월 문화유적답사를 다녀오면 홈페이지에 사진과 관련 내용을 기행문 형식으로
“너는 내 운명이다.”언니 따라 처음 갔던 절에서학생회 활동하며 공부에 갈증포교사 제도 알고 난 뒤 감격언니를 따라 처음 갔던 절은 비탈진 오솔길 따라 한참 오른 뒤에 일주문이 보였던 산사였다. 일주문 넘어서기가 망설여졌던 그 절의 불교학생회에 가입했고, 매주 토요일 방과 후 어김없이 법회에 참가했고, 고등부 3년을 개근했다. 2학년 때는 부회장을 맡아 법우들을 챙기며 법당을 정리정돈하고 법회를 진행했다.우리 절 학생회에는 지도스님도 지도법사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배들은 학생회 하나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절을 수소문했지만
필연으로 받아들인 북한이탈주민 포교는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강원도 화천에서 일요법회를 마친 뒤였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모두 점심공양하러 가고, 평소 같으면 포교사들도 서둘러 종교활동을 마무리해야 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서둘러 귀가 길에 올라야만 고속도로 정체현상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북한이탈주민 한 분이 남아서 할 이야기가 있다며 발길을 붙잡았다. 모두 법당을 나가고 포교사만 남은 상태에서 본인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데 그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같은 처지의 북한이탈주민과 오히려 개인적으로 답답한
새내기 불자는 목마름을 해결하고 싶었다. 포교사 품수 뒤 하나원에 배정열악한 환경 속에 10여년 활동혼자 법회 진행한 경험 큰 계기12년 전 어느 봄이었다. 당시 재적사찰이던 광명 금강정사에는 불교대학이 없었다. 직장 인근 강남 봉은사에서 불교대학과 인연이 닿았다. 불교기본과정을 마친 직후라 교리에 궁금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봉은사 불교대학 입학은 필연이었다. 1년 과정을 마칠 즈음, 포교사고시 제도를 알았고 시중 서점에 들러 서적을 구입해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불교 전반에 걸쳐 골고루 문제가 출제되기에
책임감과 의무감이 생겼다. 교도소 봉사회 결성 나눔 앞장부족한 자신에게 회의감 들 땐성철 스님 법문 떠올리며 발심‘여주교도소 사랑(나눔)봉사회’가 결성된 후에는 직원들이 매달 회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소규모 모임일 때는 노력봉사만 했지만 달라졌다. 봉사회가 발족된 뒤 노력봉사는 물론 독거노인과 형편이 어려운 다문화가정 등 소외이웃에 정기적 후원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급식비와 장학금도 지원하게 됐다. ‘여주교도소 사랑(나눔)봉사회’의 회장으로서, 그리고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여주지역 여러 복지단체에서 봉사를 실천하고
수용자들의 눈물은 더 뜨거웠다. 교도소 교도관이자 전문포교사늘 수용자 마음 편안하길 기원‘금강경’ 읽고 면담…사경 권선임사체험을 하면서 참회했다. 입관 전 유언장을 썼고, 수의를 입은 뒤 관에 들어갔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지극정성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했다. 관에서 수용자들이 나오면 탄생발원문을 읽어주고 두 발을 씻겼다.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 역시 임사체험을 하면서 발원을 더 굳건하게 했다. 관 속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이 세상 내가 온 목적은 중생제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난, 현직 여주교
서귀포총괄 군포교팀은 새로 품수 받은 신규팀원을 포함하면 17명이다. 하지만 사정은 다른 포교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참석률이 5~7명 내외로 저조하다. 수병들에게 점심을 직접 만들어 제공하고 법회 진행까지 도맡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인원이다. 어쩌겠는가. 부처님 일인데 불평불만할 시간이 없다 할 뿐이다. 점심식단은 주로 국수와 과일 그리고 튀긴 통닭이나 족발이다. 젊은 수병들 입맛을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이 고기를 곁들인다. 가끔 피자, 햄버거, 짜장면도 준비한다. 요즘엔 군장병들과 간격을 줄이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김밥재료들을
삶은 정말 예측불가능하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고나 할까. 불연도 정말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최선을 자부한 삶, 병마로 나락비구니스님 따듯한 위로에 감화체험 나누고 싶어 포교사 발원그동안 사찰이라는 도량은 참배나 기도, 정진을 행한다는 의미보다 말 그대로 방문에 그친 어떤 공간에 불과했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구경삼아 아들과 집과 가까운 사찰을 찾아 어설픈 삼배와 함께 예불에 참여하고 점심공양을 하고 오는 게 전부였다. 분명 우리말로 예불의식을 하는데도 참 알아듣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사한 직장에서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