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에 봉선사로 출가…중도사상 확립 만해·손병희 인연…독립·통일운동 투신 스님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태허 스님은 어떤 인물인가. 운암은 민족사랑에 근간을 둔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에 입문해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고, 출가 후에는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한 중도관을 확립해 민족적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복지국가건설 이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펼쳐 보였다. 때문에 그의 사상과 이념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평안북도 철산에서 1898년 태어난 운암은 어린 시절부터 예사롭지 않은 성장과정을 거쳤다. 대한독립학교에서 호국의 일념으로 생을 보냈던 위인들의 생애를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우던 그는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3·1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33인중의 한 명이자 당시 한국 불교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백용성 스님의 추모제가 봉행됐다. 서울 종로의 대각사(주지 장산 스님)는 3월 23일 오전 용성 스님의 입적 66주기를 맞아 추모제를 봉행하고 스님의 큰 발자취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스님의 추모제는 운문사 운문 스님, 각화사 혜담 스님, 동국대 정각원장 진월 스님, 국가보훈처 정종기 보훈처장 등 사부대중 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오전 10시 33번의 타종으로 시작된 추모제는 사부대중의 분향과 삼배 등 용성 스님을 기리는 순서로 진행됐고, 스님의 생전 행장을 소개하며 일대기를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대각사 주지 장산 스님은 추모사에서 “용성 스님이 대각사에 큰 여의주를
한국문학을 이끈 뛰어난 문인들을 배출한 동국대 교정에는 아직도 선배들의 창작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다. 님은 갔습니다./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중략)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중에서) 혜전 시절 전교생 80% 문학청년 동국대 100년사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와 맥을 같이 한다. 일찍이 신문학의 새 길을 닦은 만해 한용운을 시작으로 근대 문학을 일군 신석정, 서정주, 조지훈, 조연현과 현대 한국문학을 이끌고 있는 조정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하면서 한국 문학의
독립운동-민주화운동을 이끈 동국대는 격동기 한국 정치사의 신증인이었다. 일제시대, 한국전쟁, 4·19 등 수많은 격동기를 거친 한국 근현대 정치사는 동국대 100년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일제시대 불교계 선구자들이 건립한 명진학교에서 배출한 만해 한용운 스님은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위한 3·1운동의 횃불이었으며, 이후 불교전수학교, 혜화전문학교, 동국대 출신들에 의해 이어진 민중 운동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었다. 동국대가 한국 정치사의 중심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외세에 의한 시련이 있을 때마다 부처님의 혜명을 받들어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한국불교의 전통, 즉 호국불교 고갱이가 교육 이념에 고스란히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만해 정신 학생운동으로 계승
1979년 7월 10일 입적 15세 전부터 독립운동 제헌국회의원 활동도 86년 대통령 표창 추서 효당(1904~1979) 스님은 13세에 출가, 1979년 입적할 때까지 원효 교학연구와 차선 삼매로 일관했으며 건국사업과 교육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효당 스님하면 15살이 되기도 전인 소년시절부터 시작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일생동안 계속된 스님의 독립운동에는 만해 스님의 동지적 신뢰가 근간을 이루었다. 1904년 경남 사천군 서표면에서 4남 3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효당 스님은 1910년 고향의 사립학교인 개진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인 교사 배척과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이후 곤양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으며
수행관 등 2007년까지 성지 조성 회향 6월14일 점안법회를 봉행한 장수 죽림정사 용성조사전 전경과 내부 모습. 용성조사전의 안과 밖은 인도, 서역, 중국, 한국의 조사들로 장엄돼 있다. 장수 죽림정사(조실 도문 스님)가 백용성 스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용성조사전의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용성 스님의 탄생 성지인 장수 죽림정사(조실 도문 스님)는 지난해 ‘용성조사전’을 마련하데 이어 건물 내외벽을 전체를 불화(佛畵)로 장식하고 6월 14일 점안법회를 봉행했다. 이날 점안법회를 봉행함에 따라 죽림정사는 용성조사전 관련 불사를 모두 회향했다. 용성조사전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불교계의 대표인 백용성(白龍城; 863~1940) 스님을 기리기 위해
신용하 등 “독립선언서 쓴 육당 작품” 주장 김상현 등, 증언 근거제시…“만해의 작품”반박 일제의 강압에 비폭력으로 맞선 3·1운동의 정신은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으로 압축된다.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은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비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행동강령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독립선언서’보다 ‘공약삼장’을 트집 잡아 민족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공약삼장’은 누구에 의해 작성됐을까. 그 동안 학계에서는 “‘공약삼장’은 만해 한용운에 의해 작성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대자유인으로 걸림없는 삶을 살다 가신 큰스님들이 많고 많지만, 그 가운데 1900년대를 마음대로 활보하며 호호탕탕 걸림 없는 무애행(蕪碍行)을 보여준 춘성(春城) 스님의 이야기는 오늘에도 한국불교계에 설화(說話)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춘성 스님은 1891년 3월 31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에서 출생하여 13세 때 고향인 설악산 백담사에서 한용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하였고 안변 석왕사, 금강산 유점사, 덕숭산 정해사, 도봉산 망월사 등지에서 수행한 뒤 1977년 7월 8일 서울 봉국사에서 열반에 드시어 세수는 87이요, 법랍은 74세였다. 속성은 평창 이 씨였고 속명은 창림(昌林)이었는데 법명도 춘성(春成)이요, 법호 또한 춘성(春城)으로 한문 글자 하나만 달랐다. 춘성은 스승이신
자유-비폭력은 만해 일관된 사상 기미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公約三章)을 만해(1879∼1944) 한용운이 아닌 최남선이 집필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공약삼장에는 만해의 번민과 수양, 득도와 사색 등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8월 5일부터 8일까지 백담사에서 열리는 만해학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기미 독립 선언서의 공약삼장의 집필자에 관하여’란 논문을 통해 “공약삼장은 매우 간단·명료하지만 독립선언서의 ‘눈동자’일뿐 아니라 만해의 사상과 인격, 구도와 신념의 축약판”이라고 말했다. 공약삼장의 자유·비폭력·국제주의 이념과 만해 사상을 비교 검토한 박 교수는 “불교의 해탈, 불살생, 박애, 보편, 도덕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켜
1. 진각종 창종주 회당대종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는? 2. 불교의 근본사상인 대자대비사상에 입각해 일반사회에서의 인권침해 및 생명경시풍조 등을 시정하고 건전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원을 세우고 1990년 설립된 불교사회운동단체는? 외부적으로는 경실련과 연대하고 있다. 3. 불교경전의 경문을 옮겨 쓰는 것으로 신앙적 의미를 갖는 의식을 일러 무엇이라 하는가? 4. 정법포교-성실한 믿음-공양-자신만의 해탈 가운데 대승의 법사들이 강조하지 않은 것은? 5. 3·1운동시 만해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에 새롭게 추가한 부분은? (진각종 포교부 제공)
송원 박충식 거사 별세 4월 5일에는 또 불교신도운동사의 큰별이었던 송원(松園) 박충식 거사가64세를 일기로 별세를 한 날이기도 하다. 불교정화운동이 한창 진행될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제3대 회장을 맡는 등 해방 직후 신도사와 영욕을같이 한 박충식 회장은 3선 민의원으로 한국 정계에서 활약한 덕이 많았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박 회장은 충남 출신으로 서울 보성고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법학을 전공했다. 유학중 재일학생조국해방동지회를주도적으로 결성, 상해 임정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승만의 이념과 투지를 받아 피나는 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상사의 중역을 역임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광(解光)인쇄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많은 기간산업을 일으켰다. 해방 후에는 귀국지사영
1. 서론과 시대배경 이 글은 지난 1백년의 한국불교사에 나타난 수많은 유형들 가운데 여덟개의 유형을 골라 하나의 스팩트럼에 담고, 그 유형을 대표하는 불교인의 사상과 실천을 고찰함으로써 근대한국불교 1백년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불교인은 두 가지 점에서 대표단수이다. 하나는 동일한 유형의 불교를 신앙하는 현재, 과거, 미래의 다른 불교인들을 대표한다는 점이고, 그 유형을 오늘날 비교적 뚜렷하고 일관성 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불교전통에서 중시되어 왔던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수도론에서의 선과 교(협의로는 간경, 광의로는 문자 일반) 사이의 우열의 문제, 법맥의 문제, 깨달음과 역사.정치에 대한 관심 사이의 갈등, 무속주의적 성격
3·1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체포된 만해 스님과 용성스님의 재판기록이 처음으로 공개됐다.행정자치부 국가기록보존소는 8월14일 정부 대전청사 기록전시관에서 `기록으로 보는 대한민국 50년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기록문화의 발전과정과 《조선왕조실록》, 대한제국 정부의 공문서, 조선총독부의 태평양전쟁 관련 인력동원 문서를 비롯, 만해 한용운스님과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판결문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기록물들이 소개됐다. 처음으로 공개된 만해와 용성 스님관련, 재판기록은 1920년 3월 22일 경성지방법원이 작성한 형사판결문이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만해스님은 당시 강원도 양양군 신흥사 스님으로 1919년 2월 24일부터 27일 사이에 최린(崔隣)으로부터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그
문 : 피고인은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 답 : 나는 내 생명이 끊어진다 해도 이 마음은 변치 않을 터이다. 또한 조선에는 나와 같은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잊지 말기 바란다. 문 : 이러한 운동에 가담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 처벌받을 줄 몰랐던가? 답 : 나는 내 나라를 되찾는 일을 했으므로 벌을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내 육신이 죽어 썩어 문드러진다면 정신이나 영혼이나마 영세토록 민족운동을 해 나갈 것이다. 문 : …마지막으로 더 할말은 없는가? 답 : 그대들이 우리에게 선정을 펴 행복을 준다 한들 우리가 달갑게 받을 것 같은가? 무릇 자존심이 있는 민족이라면 남의 압박을 받지 않고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전 민족의 염원을 담아 행해졌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의 물결이 2백여명의 어린이들에 의해 재현, 전국에 울려 퍼졌다. 월간 동쪽나라(발행인 김형균)가 주최해 지난 1일 탑골공원에서 개최된 '어린이 3.1만세운동'이 그것. 이 행사는 정오 12시 2백여명의 어린이들이 당시를 재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민족대표 33인으로 분장한 극단 동쪽나라 단원 33인이 나와 일제침략과정을 설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윽고 일본경찰을 상징하는 대형인형이 등장,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장면이 재현됐다. 이때 몰래 태극기를 나눠주는 어린이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하자 2백여명의 어린이들과 탑골공원을 메운 1천여명의 시민들의 입에서
의 공약삼장을 최남선이 전담해 지었다는 주장이 박걸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에 의해 또다시 제기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펴낸 에서 박 연구원은 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이 논문에서 박 연구원은 이제까지 공약삼장 기초자에 대한 논란이 최남선과 한용운의 인물평가와 맞물려 논의됐음을 지적하고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자료와 당시의 취조기록, 상황 등을 검토하고 있다. 즉,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취조가 최린과 최남선에만 집중된 점 △취조 및공판과정에서 독립선언서의 첨삭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점 △각종 서류의 초안 작성을 열거한 최남선의 공판 기록 △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한최린의 기록 △최남선의 회고 △만해의 독립선언서 초고 열람 여부와 선언서 작성
간월암 너머 안면도 허공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고 달빛은 그대로 바라에 내려앉아 사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주지스님은 출타중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스님 한두 명이 암자 옆 산비탈에서 괭이로 눈을 헤치며 일하고 있었지만 풋중과의 실랑이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얼핏 보아서는 일하는 스님 따로 있고 방에서 공부만 하는 스님따로 있는 셈이었다. 아니면 점심 공양 후에는 다들 일하는 시간인데 풋중만 공부를 하겠다고 방에서 버티고 있는 줄도 몰랐다. 공양주 할머니가 요사채로 내려가며 말했다. “처사님들, 조그만 기두리세유. 새밥해드릴테니께유. 암자나 둘러보고내려오세유.” 7층 석탑이 먼저 눈에 띄었다. 솜 같은 눈을 얹고 있는 게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를 연상케 했다.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