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개혁은 분명히 조계종과 한국불교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같은 발전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던 것과 얼마나 맞아 떨어지는지 확인해보면 미진한 것이 많다. 이제 종단개혁의 단심(丹心)을 되찾아야 한다. 변화된 환경과 상황을 고려해 다시 새로운 개혁과제를 정하고 종단의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20년이 흐른 지금 종단개혁을 완수해 가는 길이 될 것이다.” (법안 스님, 2014년 7월10일 종단개혁 20주년 2차 세미나 ‘종단 정치권력 구조의 흐름과 과제’)선지식 부족·수행체계 미비‘간화선 위기’ 현
▲ 원두 스님은 “이제 승자와 패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불행했던 종단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1994년 멸빈자들을 사면해야 한다”며 “이는 서암 스님의 마지막 당부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994년 종단개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제도개혁을 통해 종단을 혁신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종단개혁으로 승단의 세속화를 불러왔다는 비판도 있다. 전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은 1994년 개혁회의가 추진한 종단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개혁의 방법과 이념이 비불교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스님은 개혁회의를
지선 스님은 1980년대 사회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의 투사로 나섰고 1987년 6·10민주항쟁도 이끌었다. 사회민주화가 자리를 잡자 스님은 곧이어 종단개혁에 착수했다. 오랜 기간 되풀이돼 온 종단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 지도위원으로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결성을 주도했고, 개혁회의에서는 도법 스님과 함께 상임부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에 대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종단개혁을 통해 제도개혁 등 일정정도의 성과를
도법 스님은 1994년 조계종 개혁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상임공동대표와 개혁회의 상임부위원장을 맡아 제도개혁을 주도했다. 스님은 “1994년 종단개혁은 전근대적 모습을 벗지 못하던 조계종이 근대화를 맞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소수의 특권층이 권력을 나눠 갖던 폐쇄적 구조에서 벗어나 사부대중이 종단 운영의 주체로 나선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단개혁의 정신과 취지가 지속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종단은 변화가 요구되고 지속적으로 개
1994년 조계종 개혁은 포교와 복지 분야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사회 활동에 초점을 맞춘 포교와 복지 전략은 불교의 대외적 위상을 일신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포교원을 별원으로 승격해 포교의 전문성을 갖춘 행정기구를 출범시킨 것은 종단개혁의 또 다른 성과로 꼽힌다.포교원 별원으로 승격해인사권‧예산집행권 부여신도조직‧계층포교 강화시대 맞는 포교변화시급종단 산하 복지재단 설립시설 20년 새 11배 늘어‘긴급구호~’발족 재난대비대사회적 불교이미지 일신‘포교총람-종단 포교의 흐름과 현황’(조계종 포교원,
“1994년 종단개혁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종단운영의 제도화였다.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그리고 예측가능한 제도 속에서 승단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설정 스님, 2014년 4월10일 종단개혁 20주년 세미나 ‘종단개혁의 의미와 성과’)총무원장 겸직금지 신설종단권력의 분권화 실현중앙종회에 감사권 부여집행부 견제기능 등 강화교육원 설립으로 교육혁신기초·기본·전문과정 세분화2009년 한문위주 교육 탈피교재한글화·교과과정 개정승가교육 전면 재개정 진행1994년 조계종 개혁은 종단의 행정과 교육, 포교, 복지에
1994년 10월 조계종에 선거 바람이 불었다. 10월10일 개혁회의가 총무원장 선거법과 중앙종회의원 선거법을 제·개정하면서 종단 안팎에서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때까지 조계종에서 종단 대표자를 직접 선출방식으로 뽑은 전례는 없었다. 총무원장은 중앙종회에서 종회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됐다. 중앙종회의원도 간접선출 방식으로 뽑혔다. 각 교구를 대표하는 지역대표는 본말사 주지회의에서 선출됐고, 간선직은 간선의원선출위원회에서 사실상 지명했다. 종단 대표자를 뽑는 논의구조에서 일반 종도들의 의사는 철저히 배제됐다.개혁회의 선거법 개정
1994년 8월23일 조계종 개혁회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원로회의가 종헌개정안 인준을 보류했기 때문이다. 종헌개정안은 4월22일 출범한 개혁회의의 첫 성과물이었다. 종단개혁에 대한 사부대중의 염원을 담아낸 결실이기도 했다.과도집행부 체제 7개월공청회 통해 여론 수렴종헌·30개 종법 제개정 종단운영 체질개선 앞장교육원·포교원 위상 높여총무원장 겸직금지 마련각종 선거제도 변질되면서 오늘날 골칫거리로 남아종단개혁불사백서(개혁회의, 1994년 11월 발간)에 따르면 개혁회의는 개혁안 성안을 위해 8차에 걸쳐 종책세미나를 개최했
2014년 4월10일은 조계종에 있어 뜻 깊은 날이었다. 1994년 4월10일 종단개혁과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사부대중이 서울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한지 꼭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종단개혁의 토대를 다진 개혁회의 출범 20주년을 맞는 기념일이기도 했다. 조계종은 성대한 기념 법회를 열었다. 법회에는 총무원장과 교육원장, 포교원장, 1994년 종단개혁에 앞장섰던 스님과 신도 등 500명이 참석했다. 호계원법 징계절차 어기고피징계인 참석 없이 확정종단 상대 소송한 이유로종단 최고형 ‘멸빈’ 징계1994년 개혁회의의
1994년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린 조계종 개혁회의가 종단개혁에 착수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았다. 비록 총무원과 중앙종회를 장악했지만 지방의 주요사찰은 여전히 의현 총무원장의 지지 세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언제라도 주요사찰에서 나오는 막강한 재원을 이용해 개혁회의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개혁회의가 출범과 동시에 과거 청산을 우선 과제로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였다.개혁회의, 해종 특위 구성사찰감사·해종 행위자 조사143명 해종 행위자로 지목선별 통해 74명 징계 회부호계위원회 판결 두고 논란같은 사
1994년 4월15일 탄성 스님을 비롯한 개혁회의 지도부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이날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강행했던 중앙종회가 해산과 함께 개혁회의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개혁회의법을 만장일치로 가결했기 때문이다. 개혁회의는 이미 4월10일 전국승려대회의 결의로 출범했지만 여전히 법적 근거가 미약했다. 초법적 승려대회의 결의는 또 다른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종헌개정·개혁회의법 제정법적정당성·운영토대 마련최대 6개월 한시적 기구초대의장에 월하스님 추대총무원장에 탄성스님 선출해종행위 조사 특별법 제정기존 종회의원
원로스님들께 올립니다.부덕한 사람을 종정으로 추대시켜 종단과 국민들께 큰 걱정을 끼쳐드려 무어라 사죄해야 할 길이 없습니다. 1600여년 유구한 불조(佛祖)의 유덕이 일시에 침몰되는 듯 실로 그 죄업이 막중함은 한출첨배(汗出添背)로소이다. 오늘 그 중죄를 절감하고 모든 소임을 원로대덕 앞에 정식으로 되돌려 드리오며 조용히 종단 밖으로 물러나 혈루(血淚)의 참회로 잔일(殘日)을 보내겠습니다. 본인에게는 하등 전달이 없이 타처에서 불신임 결의를 하셨는지는 풀리지 않는 의혹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라옵건데 원로대덕 스님께서는 현명하신 중지
1994년 4월15일 오전 세간의 눈과 귀가 다시 조계사로 향했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결의했던 중앙종회가 제113차 임시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4월10일 승려대회를 통해 종단의 입법과 사법, 행정의 권한을 갖는 조계종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기로 결의했지만, 그에 따른 법적 절차가 필요했다. 승려대회는 종헌종법의 틀을 넘어선 초법적 권한행사였기 때문이다. 중앙종회가 승려대회의 결의를 부정한다면 법적 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승려대회에 따라 종권 이양의현 원장·서암 종정 불신임종헌개정·개혁회의법 등 결의해산 앞두고 종회의원들
1994년 4월13일 아침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 소식은 빠르게 전파됐다. 이날 새벽 경찰철수에 이어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조계사에 모인 스님과 신도들은 “마침내 개혁의 물꼬가 트였다”고 환호했다. 의현 원장 사퇴 알려지자조계사 축제분위기로 가득스님·신도 1만명 대회동참 종도 힘모아 개혁완수 다짐개혁회의로 종권이양 결의정부 사과·최형우 해임요구 서암 종정 마지막 교시발표“법 무시한 개혁, 동의 못해”개혁세력 외면…사퇴수순 밟아 전날까지 폭력이 난무했던 조계사 경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총무원 청
1994년 4월12일 밤 10시30분경 서울 조계사는 술렁였다. 4월10일 승려대회 이후 개혁회의 측과 긴 대치국면을 이어가던 경찰내부에서 이상 기후가 감지됐다. 개혁회의 측에 ‘경찰이 곧 철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흘러들었다. 밤 11시15분경 이기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조계사를 찾았다. 이 청장은 청사에 있던 총무원과 개혁회의 측 스님들을 잇따라 만났다. 그는 청사를 나서며 개혁회의 측에 “경찰병력을 철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4월13일 새벽 0시30분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총무원 청사에 남아 있던 스님들이 조계사를 빠져
“폭력과 같은 법질서 유린이나 합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행동은 어떤 이름으로도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조속히 난국을 수습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불교의 사명을 다해주기를 기대한다.”(1994년 4월10일 문화체육부 종무실장 호소문) 승려대회 후 총무원 진입시도총무원·범종추 스님 폭력사태폭력사태 확산되자 경찰진입청사입구서 스님·재가자 해산경찰·개혁세력 몸싸움도 벌여개혁회의, 경찰 경내 진입규탄혜암스님, 종단 비상사태 선포비대위 구성…불교도대회 예고정치권도 공권력투입 규탄동참여론에 밀리자 13일 새벽 철수 1994
“이제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만큼 불교교단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났다. 혹한을 이겨낸 씨앗만이 꽃을 피우듯 한풍의 이 혼란과 격동이야말로 개혁의 희망이다. 반야의 검을 높이 치켜들고 장엄하게 불교개혁의 대열로 나서야 한다. 불교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며, 보살의 길로 나서는 일임을 선언하노니 금강역사의 힘으로 불교개혁을 위해 고난의 길을 떠나자.”(1994년 4월10일 전국승려대회 개혁선언문)대중 3500명 조계사 운집승려대회 사상 최대 규모의현 총무원장 체제 종식원력 모아 종단개혁 다짐 의현 총무원장 퇴진 결
1994년 4월10일 전국승려대회를 하루 앞두고 발표된 서암 스님의 종정 교시는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언론은 일제히 조계종의 분열을 예고했다. 종정과 원로회의의 서로 다른 행보에 초점을 맞췄다. 종권의 향배에 이목이 쏠렸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범종추는 승려대회 봉행위원회를 꾸리면서 서암 스님을 증명법사로 추대한 상태였다. 승려대회를 통해 의현 총무원장 체제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던 계획도 차질을 빚게 됐다. 그러나 범종추는 4월10일 승려대회를 강행하기로 했다. 이미 전국 사찰에 동원령
“오늘의 사태는 첫째 졸정(拙正)의 부덕이라, 삼보 전에 참회의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오늘 당장 물러나야 옳을 줄 아오나 이런 와중에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단이 어느 정도 개혁의 궤도에 올랐을 때 책임지고 떠날 것을 밝힙니다. 종도 여러분들께 흉금(胸襟) 깊이 참회 드리며, 불타(佛陀)의 유훈에 따라 종단을 여법하게 개혁하는데 동참해 주실 것을 또한 호소합니다.” (종정 서암 스님이 1994년 4월7일 발표한 읍소문)4월5일 원로회의 결의에종단여론 범종추로 기울어혼란을 예상한 서암 스님읍소문 발표하며 화합당부혜암
1994년 4월5일 열린 원로회의는 조계종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원로회의가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를 지지한다면 개혁세력들은 뚜렷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의현 총무원장을 돕는다면 종단개혁은 한낱 구호에 그칠 수 있었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승가풍토에서 원로들의 입김은 종단 여론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였다. 범종추가 3월23일 출범과 동시에 원로들에게 공을 들였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4월2일 중앙승가대에서 종단개혁 의지를 재차 결집한 범종추는 원로 설득 작업에 나섰다. 전국승가대학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