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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종정 서암 스님의 교시

종단 분열 막으려는 마지막 당부…‘불신임 논의’ 빌미

“오늘의 사태는 첫째 졸정(拙正)의 부덕이라, 삼보 전에 참회의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오늘 당장 물러나야 옳을 줄 아오나 이런 와중에 물러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종단이 어느 정도 개혁의 궤도에 올랐을 때 책임지고 떠날 것을 밝힙니다. 종도 여러분들께 흉금(胸襟) 깊이 참회 드리며, 불타(佛陀)의 유훈에 따라 종단을 여법하게 개혁하는데 동참해 주실 것을 또한 호소합니다.” (종정 서암 스님이 1994년 4월7일 발표한 읍소문)

4월5일 원로회의 결의에
종단여론 범종추로 기울어
혼란을 예상한 서암 스님
읍소문 발표하며 화합당부

혜암 스님, 종단 현안 논의
9일 원로중진회의 소집요구
8일 밤 돌연 취소결정 통보

서암스님, 9일 종정교시발표
“승려대회 금지·수습위 구성”
혜암스님, 종정교시 거부 시사
원로회의 소집해 불신임 추진

▲ 서암 스님은 4월9일 원로중진회의 직후 “승려대회를 금지”하는 교시를 발표했다.

1994년 4월5일 원로회의 결의는 여론의 판도를 바꿔 놨다. 서울 조계사뿐 아니라 전국에서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 촉구가 이어졌다.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을 폭로하는 기자회견도 잇따라 열렸다. 여산 스님은 4월5일 “의현 총무원장이 3월29일 조계사를 침탈했던 폭력배들의 숙박비를 지급하라고 도오 스님에게 지시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4월4일 동화사 전 재무국장 선봉 스님은 양심선언을 통해 의현 총무원장의 매관매직을 폭로했다. 선봉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이 종단 내 각종 인사와 사찰불사 과정에서 한 번에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씩 금품을 상납 받아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고 주장했다.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가 설자리는 점점 더 좁아졌다. 그러나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4월6일 범불교도대회를 개최하면서 의현 총무원장을 궁지로 몰았다.

4월6일 조계사에서 열린 범불교도대회에는 전국에서 스님과 신도 2000여명이 참석했다. 범종추는 공권력이 사찰 경내를 침범한 3월29일 조계사 사태를 ‘제2의 법난’으로 규정했다. 설정 스님은 대회사를 통해 “사찰 내에 경찰이 폭력적으로 난입하고, 경찰의 호위 속에 총무원장이 선출된 이번 조계사 사태는 5·6공 때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법난이었다”고 규탄했다. 참가자들은 김영삼 정부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부장관의 해임, 종로경찰서장과 정보과장의 구속을 촉구했다. 의현 총무원장의 즉각 퇴진도 요구했다. 전 종도의 의지를 모아 종단개혁을 추진할 것을 다짐했다. 대회가 끝나자 지선 스님 등 범종추 대표들은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를 찾아 대정부 항의서를 전달했다.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청와대를 압박해 나갔다. 이 시기 야당의 폭로로 촉발된 상무대 비리 의혹과 조계사 공권력 투입은 문민정부를 옥죄는 뇌관이었다. 여론에 부담을 느낀 김영삼 대통령은 4월2일에 이어 6일 ‘조계사 폭력사태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관련자 엄중처벌’을 재차 명령했다. 이회창 총리도 내무·법무부 장관에게 “폭력사태 진상과 상무대 의혹의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쏟아지는 비판 여론을 피해가려는 궁여지책이었다.

종단 안팎의 여론은 완전히 범종추로 기울었다. 그럼에도 총무원 집행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원로회의의 대안 없는 총무원장 사퇴 결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총무원 교무부장 대우 스님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종권이 이양돼야 한다”며 “그 때까지 의현 스님이 원장 직을 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론의 향배를 읽지 못한 발언이었다. 오히려 의현 총무원장의 즉각 사퇴를 촉구하는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다. 범종추는 승려대회 개최에 대한 명분을 차곡차곡 다져 나갔다.

이 시각 종정 서암 스님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대로 방치하기엔 종단의 상황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그렇다고 마땅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미 원로회의조차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범종추의 승려대회 개최를 용인해 준 상태였다.

스님은 4월7일 종도들에게 읍소했다. 스님은 “우리는 어느 시대에서나 그 시대의 선봉에서 활로를 제시해 온 인천의 스승”이라며 “원만 화합으로 불자로서 본분도리를 다하는데 힘을 기울이자”고 호소했다. “반목과 쟁투(爭鬪)는 끝없이 순환돼 안정과 평화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며 “우리 스스로 우리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진중히 살펴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스님은 “불교교단은 부처님 당시부터 장로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며 “원로가 개혁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로가 중심에 바로 설 때 종단이 안정된다는 것은 서암 스님의 지론이기도 했다. “승가의 위계질서를 혼탁케 하는 것은 교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암 스님의 읍소는 일부 원로 스님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에 따르면 4월7일 오후 4시경 원로 원담 스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4월5일 종정 서암 스님이 부재중인 상태에서 진행된 원로회의 결의는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연이어 혜암 스님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원로 중진회의를 소집해 종단 현안 문제를 논의하자고 말했다. 혜암 스님은 “4월9일 오후 총무원 4층 회의실에서 여는 것이 좋겠다”고 시간과 장소까지 확정지었다.

혜암 스님의 원로중진회의 소집은 종정 서암 스님에게도 보고됐다. 서암 스님은 원로 중진회의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스님은 원로를 비롯해 총무원 집행부, 교구본사주지, 종회의원 등이 모인다면 종단사태를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4월8일 밤 원로중진회의 소집을 요구했던 혜암 스님이 돌연 취소를 요청했다.

원두 스님은 “밤 9시가 넘어 혜암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원로중진회의를 취소해야겠으니 종정 스님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취소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혜암 스님은 즉답을 피했다. 무작정 취소해달라고만 말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내일 아침 일찍 종정 스님께 보고하고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회고했다.

 

▲ 혜암 스님은 1994년 4월8일 밤 자신이 소집 요구했던 “원로중진회의를 취소한다”며 의현 총무원장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그 시각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지 혜암 스님은 4월8일 밤 11시9분, 의현 총무원장 앞으로 긴급히 전보를 날렸다. “4월9일 예정되었던 원로중진회의를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혜암 스님은 “대신 4월10일 전국승려대회에 필히 참석해 대회가 원만히 치러지기를 바란다”는 말도 전했다. 혜암 스님이 왜 이 전보를 의현 총무원장 앞으로 보냈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를 촉구하기 위한 승려대회에 당사자를 참석하도록 한 것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승려대회에서 대중공사라는 형식을 빌려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를 받아내려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서암 스님이 이 전보를 확인한 시각은 4월9일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원로중진회의가 열리기 직전 총무원 직원으로부터 건네받았다. 서암 스님은 혜암 스님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덕함으로 돌렸다.

혜암 스님의 취소 통보에도 회의장에는 원로와 교구본사주지, 종회의원 등 40여명의 스님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현직 원로로는 월정사 조실 비룡 스님과 화엄사 조실 도천 스님이 참석했다.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을 대신해 부방장 청하 스님과 해인사 전 주지 법전 스님도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혜암 스님은 끝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서암 스님은 묵묵히 회의를 이끌었다. 원로중진회의에서는 현 사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위원회 대표는 원로 그룹과 중앙종회의원, 전국비구니회장 등 11명으로 구성했다. 범종추를 대표해 청화 스님도 명단에 포함시켰다. 2시간여의 회의 끝에 종정 서암 스님은 기자회견을 열어 교시를 발표했다. 스님은 “사부대중은 종단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화합의 장을 갖도록 하라”며 “4월10일 예정된 집회(승려대회)는 종단의 분열과 법통의 단절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금한다”고 밝혔다. 대신 스님은 “종단수습을 위해 원로회의를 비롯한 중앙종회와 집행부, 범종추 대표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종단을 수습하라”고 당부했다.

서암 스님의 승려대회 금지교시는 거센 파장을 몰고 왔다. 승려대회의 수순을 차곡차곡 밟아온 범종추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시각 혜암 스님을 비롯한 일부 원로들이 ‘범종추 구하기’에 나섰다. 혜암·원담·승찬·응담·석주 스님은 서암 스님이 종정교시를 발표한 직후인 4월9일 오후 5시경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원로중진회의의 결정을 따를 수 없다”고 밝혔다. 스님들은 “원로중진회의의 결정은 일부 의현 총무원장측 원로와 중진스님들에 의해 나온 것”이라며 “이는 전체 원로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원로들은 “4월5일 원로회의 결의에 따라 의현 총무원장은 즉각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종정교시에 대한 구체적인 거부 표현은 담지 않았지만, 내용적으로는 서암 스님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이었다.

 

▲ 혜암 스님을 비롯한 원로들은 개운사에서 “원로중진회의의 결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예정대로 승려대회를 강행한다고 밝혔다. 1994년 4월10일 동아일보 캡처.

범종추도 4월10일 오후1시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종정 스님이 교시를 통해 승려대회를 금지한 상황에서 이를 무시하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급기야 혜암 스님은 4월10일 오전 서울 종로 칠보사에서 다시 원로회의를 소집했다. 승려대회 개최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서암 스님의 불신임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도 원로회의 소집은 서암 스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원로들은 이날 회의에서 종정 스님의 교시를 거부하고 끝내 승려대회를 강행하기로 결의했다. 종단 안정과 화합을 위해 종정이라는 권위마저 내려놓았던 서암 스님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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