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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판과 대장경

  • 기자칼럼
  • 입력 2020.12.07 09:43
  • 수정 2020.12.07 13:09
  • 호수 1564
  • 댓글 0

청량 국사의 ‘화엄경’ 주석서를 우리말 34권 ‘화엄경청량소’로 완간한 반산 스님의 출판기념법회가 얼마 전 스님과 인연 있는 이들만 참석한 채 소박하게 열렸다.

이날 통도사 극락암 부처님께 책을 봉정한 반산 스님은 학인 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며 30여년 전 역경 불사를 다짐한 계기를 밝혔다. 평소 직설적인 언사로 유명한 반산 스님은 인사말을 하면서 ‘빨래판’ 발언으로 참석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스님이 해인사 장경각에서 지객 소임을 보던 시절, 이교도들이 장경각을 돌아보며 “빨래판 같은 나무토막에 불과한데 왜 문화재로 관리하는가”라며 못마땅하게 이야기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노라고 했다. ‘대장경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면 부처님의 진리 정법이 담긴 성보 대장경도 한낱 빨래판 취급을 받을 수 있겠다’라는 걱정이 앞섰다. 이후 스님은 제방 강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며 23년을 매달려 ‘화엄경’ 역경은 물론, 청량 국사의 소(䟽, 주석)와 초(鈔, 정리문집)까지 정리해냈다.

이 책은 스님 개인적으로도 치열한 수행의 결과물이고 대단한 성과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불사를 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물을 대중 앞에 공개할 수 있도록 마무리를 지은 것은 교계 한 출판사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표와 직원 10여명으로 운영되는 이 출판사는 방대한 화엄경 시리즈를 연이어 내고 있다. 이 시대 대표 강백 무비 스님의 ‘화엄경’을 시작으로 반산 스님의 역서에 이어 해주 스님의 ‘화엄경’ 독경·사경 시리즈까지 그야말로 대작불사다. 무비 스님의 책이 “누구나 쉽게 펼치는 우리말 화엄경”이라면 반산 스님의 책은 “화엄경 공부를 위한 참고서” 그리고 해주 스님의 책은 “수행 활성화”라는 기획 의도를 품는다. 간경, 독송, 사경 등 한국 전통 수행법을 총망라한 ‘화엄경’ 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할 기세다.

일부에서는 “팔리지도 않을 책을 왜 그리 자꾸 내는가?”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상당하다. 하지만 부처님 진리를 우리말로 남기고, 또 그 결과물을 진리를 갈망하는 누군가에게 읽히게 하려는 절박한 원력을 무시하거나 딱하게만 보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불교출판의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빨래판으로 전락할 목판, 그냥 파지로 고물상에 던져질 불서를 두고 보지 못하는 이 시대 원력 보살들의 헌신을 더는 방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격려하는 방법은 책을 사서 읽고, 베껴 쓰고, 도반과 나누는 일, ‘수지·독송·서사·유통’하라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을 향한 실천이며 이것이 참 불자의 도리 아닐까.

주영미 기자

이날 법회에서 “탈자, 오역이 발견되면 찾아가 따져 물어야 할 것이고 스님도 그렇게 찾아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기 바란다”는 한 어른스님의 격려사가 오늘을 사는 불자들에게 던지는 화두 같아 귓전을 쟁쟁히 맴돈다.

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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