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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불교·가톨릭 ‘대충돌’ 조장하려는가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1.09.06 10:58
  • 수정 2021.09.08 15:25
  • 호수 1600
  • 댓글 2

승군의 붉은 피·백성의 울부짖음
남한산성에 고스란히 배어있어
한국 역사·문화 왜곡·외면한 채 
가톨릭만의 ‘성지 순례길’ 안 돼

경기도 광주시가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잇는 ‘성지 순례길’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남한산성과 천진암을 가톨릭의 성지라 홍보하고, 천주교 수원교구와 ‘천진암성지 광주성지 순례길’조성 업무협약까지 체결한 정황을 감안하면 광주시가 추진·지향하는 길은 의심할 바 없는 ‘가톨릭 성지 순례길’이다. 한마디로 역사왜곡이자 종교간 갈등만 불러일으킬 졸속행정이다. 

가톨릭계에서 말하는 박해시대(1801∼1866), 즉 신유(1801)·기해·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목숨을 잃은 신도는 300여명이라고 한다. 신앙의 자유를 온몸으로 보여 준 사실만으로도 종교사에 남을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피 흘린 사람은 가톨릭 신자만이 아니다.

조선을 침략(병자호란)한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조선의 임금 인조(仁祖)를 지키는 게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던 성 안의 군은 사력을 다해 항전했다.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정예군만이 아니었다. 의병과 승군으로 합류한 백성과 승려의 붉은 피가 흘렀다. 

1637년, 항전 46일 만에 항복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했다. 청나라 군에 인질로 붙잡힌 1만여 백성은 항복의식을 마치고 떠나는 인조를 보며 울부짖었다. 남한산성은 ‘인조실록’보다 더 많은 치욕을 기억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 사명대사는 남한산성이 방위보루의 최적지라 확신하고 조정에 ‘축조보강’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명대사는 직접 남한산성에 주둔하며 정병(精兵)을 양성하고 산성을 보강했다. 이괄의 난(1624)으로 공주로 피신해야 했던 인조는 그제야 남한산성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수축(修築)을 결정했다. 그 임무는 각성(覺性) 스님을 총섭으로 한 승군이 맡아 1626년 완공시켰다. 치욕의 삼배구고두 다음 해인 1638년의 남한산성 보수 역시 각성 스님이 맡아 지휘했다.

‘현종실록’의 한 문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민정이 3일 걸려도 못해 내는 일을 승군은 하루 만에 끝낸다(民丁三日之役不及 僧軍一日之役槪).’ 왜 인가? 축조술이 능해서 만이 아니다. ‘스님들은 필히 죽을힘을 다한다(僧人赴役必盡其死力).’ 그 스님들에게 주어지는 급여가 많았던 것도 아니지만 제 때 주어지지도 않았다. 승군은 산기슭을 밭으로 갈아 얻어 낸 조, 피, 기장, 감자로 허기를 매웠다. 

그 후로도 남한산성은 승군이 지켜냈다. 승군은 전국 사찰에서 2개월마다 윤번으로 충원됐다. 경기도 14인, 충청도 28인, 강원도 14인, 황해도 4인, 전라도 136인, 경상도 160인 등 총 356인의 승군이 파견됐다고 한다. 산성 수비와 보수, 그리고 스님의 예불과 정진을 위한 작은 공간이 하나둘씩 만들어졌다. 망월사를 시작으로 옥정사, 한흥사, 국청사, 장경사, 개원사, 남단사, 천주사, 동림사, 영원사 등의 10개 사찰이 들어섰다. 도총섭이 머무는 본부격의 개원사를 제외한 9개 사찰에는 무기와 화약을 보관했다.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따라 성 내의 무기고와 화약을 파괴할 때 사찰도 화마에 휩싸이거나 붕괴됐다. 현재 남아 있는 망월사, 장경사, 국청사, 개원사는 중건·신축된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며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고, 낮에는 군사훈련을 받으며 침략을 대비했던 승군의 노고를 남한산성은 기억하고 있다.

천진암은 주어사의 동쪽에 자리했던 산내 암자다. ‘천주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을 보호하려다 폐사에 이른 암자다. 가톨릭계는 ‘최초 강학지’라는 이유만으로 ‘교황 방문’이라는 강수까지 두며 ‘한국 천주교 발상지’로 굳히고 있다. 그곳이 암자였다는 사실을 지워내는 것은 물론 주어사마저도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려 하고있다. 

광주시에 묻는다. 가톨릭 순교자 선양에만 매달린 채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피 흘린 조선의 민중과 승군을 외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아가 가톨릭과 불교의 앙금이 서린 천진암까지 굳이 연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교와 가톨릭의 갈등을 조장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단언컨대 ‘가톨릭 성지 순례길’ 사업을 전면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추진한다면 ‘갈등’에 그치지 않는다. 불교계와 광주시, 불교계와 가톨릭계의 ‘대충돌’이다.

[1600호 / 2021년 9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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