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콜롬보공항과 우리나라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직항이 개설된 것은 2013년이다. 그 이전에는 싱가포르, 방콕, 홍콩 등을 경유했다. 인천공항을 출발, 아무리 서둘러도 10시간 이상 가야하는 머나먼 나라였다. 직항이 개설된 이후 스리랑카와의 교류는 빠르게 증가했다. 동시에 스리랑카의 불교유적을 찾아가는 불자들의 발걸음도 가파르게 늘어났다.콜롬보공항에서 근무하고 있는 우리나라 항공사의 한 관계자는 “스리랑카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불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일반관광객이 아닌 불자들도 스리랑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는 힌두교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고전이다. 인도 코살라 왕국 라마왕자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는 주인공 라마의 부인 시타를 납치하는 악마 ‘라와나’가 등장한다. 라와나는 랑카, 즉 지금의 스리랑카를 지배하는 마왕이다. 라마왕자를 도와 라와나에게 납치된 시타를 구한 1등 공신은 원숭이의 신 하누만이었다. 바람의 신에 아들인 하누만은 하늘을 날아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라마왕자와 그의 군대가 라와나의 섬 랑카로 가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다. 하누만은 히말라야에서 바위와 돌들을 가져와 인도의 해안
계절풍 따라 부드럽게 밀려오는 인도양의 파도는 고대로부터 이국의 상인들을 실어왔다. 아찔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향신료와 형형색색의 보석들이 화수분 같이 끊이지 않는 섬.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아랍 그리고 중국의 상인들은 셀렌디브라 불리는 이 섬에 열광했다. 후대 ‘해양실크로드의 배꼽’이라 평가되는 무역의 요지, 그 명성만큼이나 섬은 풍요로웠다. 섬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 ‘콜롬보’는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콜론토타(켈라니강의 항구)’ ‘콜라암바토타(녹색 망고가 많은 항구)’라는 이름의 바닷가 도시는 고대 상인들, 혹은 탐
싱할라왕국을 침략한 포루투갈의 불교박해를 피해 델가무와사원에 숨겨져 있던 불치사리는 1593년 캔디로 전해진다. 사분오열돼 있던 싱할라왕국의 소왕조들이 차례차례 포르투갈의 침략에 무릎 꿇고 이제 남은 곳은 캔디에 수도를 둔 위말라다르마수리야1세 뿐이었다. 불치사리를 전해 받은 왕은 명실상부한 싱할라왕조의 계승자이자 섬 전체의 통치자였다. 그러나 실상은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1589년부터 싱할라왕국은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다. 왕에게는 실권이 없었다.하지만 국왕은 정성을 다해 불치사리를 봉안했다. 왕은 궁성 안에 불치사리를
왕실엔 쿠데타가 난무했다. 1196년 39살에 요절한 니상카말라의 뒤를 이어 아들, 동생, 조카가 잇달아 왕좌에 올랐지만 모두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단명했다. 역사는 왕좌에 오른 여러 왕들이 ‘단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들이 모두 ‘짧은 천수’를 누렸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다. 왕들이 잇따라 죽어나가고 급기야 세상을 뜬지 이미 10여년이나 된 대왕 파라크라마바후, 그의 왕비 릴라바티가 왕좌에 등극하기에 이른다. 싱할라왕국 역사상 두 번째 여왕이었다. 왕실의 일원이자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루후나가문 후손이었던 그녀의 통치는 잠시나
“칼링가왕조가 정당한 상속자인 스리랑카에서 비불교도가 권좌에 올라서는 안 된다.”칼링가왕조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싱할라왕조를 연 최초의 인물, 바로 스리위자야를 지칭한다. 스리위자야의 부모는 ‘사자의 자식’인 싱하바후와 싱하시발리 남매였다. 뱅골 지역의 공주였던 수파데비가 사자와 결혼해 태어난 싱하바후와 싱하시발리 남매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사자임을 부끄럽게 여기고 아버지 사자를 죽인 후 나라를 세웠다. 바로 지금의 인도 오릿사주 인근 칼링가 지역에 위치한 싱하푸라라는 도시가 이들의 수도였다. 이 칼링가왕조(
“나는 나의 왕국에 100개의 사원을 세울 것이다. 100개의 사원이 완성되면 이곳 바위언덕에 세 분의 부처님을 조성할 것이다.”폴론나루와의 전성기를 연 대왕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원력은 웅대했다. 수많은 전쟁과 내전의 한 복판에 서있는 왕이었다. 왕좌를 둘러싼 내분과 친족 간의 권력다툼 속에서 단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긴장과 혼란 속에서 자신을 지켜줄 부처님의 가피와 왕권을 지탱해줄 정통성이었다. 그의 견고한 신심은 몸과 마음을 의탁할 안식처인 동시에 정당한 통치자라는 증명이었다.간절하고 그만큼
“단 한 방울의 빗물이라도 나의 백성에게 이익을 주지 못한 채 바다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자신만만한 파라크라마바후는 마치 빗물에게조차 명령을 내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파라크라마바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뒀다. 백성들은 그가 만든 저수지의 물을 이용해 연중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저수지는 ‘파라크라마 사무드라’ 즉 ‘파라크라마의 바다’라 불렸다. 그의 명령대로 빗물은 백성들에게 풍요를 안겨주었다. 파라크라마바후가 다스리던 12세기 폴론나루
10세기 후반 남인도는 요동치고 있었다. 소수 원주민에 불과했던 타밀족을 규합해 907년 독립국가 촐라왕조를 세운 파란다카1세의 등장 이후 200여년 간 촐라는 남인도의 패권을 장악했다. 촐라왕국은 라자라자1세(985~1014)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1세의 통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영토 확장에 전념했던 라자라자는 인도의 중남부를 비롯해 서쪽의 섬들, 지금의 몰디브까지 손에 넣었다. 스리랑카 북부지역도 촐라왕국에 점령당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싱할라왕국 전체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자라자의 뒤를 이어 1014년 등극한 라
동생의 군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진흙탕에 발이 빠진 코끼리가 몸부림을 칠수록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죽음 앞에 발버둥 치는 코끼리 위에서 카샤파는 오히려 담담했다. 두려움과 외로움의 끝이 보이지 않았던 지난 11년의 시간이 스쳐갔다. 코끼리에서 뛰어내려 맨몸으로라도 싸울 것인가. 혹시라도 이긴다면, 그래봤자 다시 마주해야할 현실은 더 큰 죄책감이다. 스스로의 목을 겨눈 단도는 그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였다. 아니, 죽어서도 자신의 업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두려움으로 가득 찬, 미칠 듯이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104년, 왕좌에 오른 싱할라의 국왕 왓타가마니 아브하야는 타밀족에게 빼앗긴 수도, 왕좌를 되찾기 위해 피 말리는 게릴라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새 국왕이 등극한지 불과 1년 만에 싱할라왕국은 14년간의 치열한 전쟁에 빠져있었다.타밀족과의 14년 전쟁에유례 없는 기근까지 겹쳐굶어죽는 이 즐비하던 때암송으로 구전하던 삼장7년 결집으로 패엽에 기록기원전 1세기 승가분열 후초기불교 전승 구심점으로백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수년째 계속되는 전쟁에 돌보는 이 없는 저수지와 수로는 하루가 다르게 황폐해져
대신들은 한밤중 은밀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타밀족의 침략으로 수도를 빼앗기고 국왕 왓타가마니 아브하야는 이미 담불라 바위산의 석굴로 몸을 숨겼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대신들은 적장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국가의 운명을 걸고 담판을 지으려함인가. 아니다. 투항하기 위해서였다. 날이 저물고 어두운 밤길에 발이 묶인 대신들은 인근 사찰에 하룻밤 잠자리를 의탁했다. 한밤중에 찾아온 대신들의 행보가 미심쩍었던 스님이 연유를 물었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마하팃사 스님의 물음에 대신들은 자초지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