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단 오르던 숱한 영웅호걸 그 누가 승리자라 자부하랴 중세 오우치 문화를 상징하는 루리코지는 수차례 재건됐지만 이 절의 오층탑만은 600여년간 거듭된 전란 속에서도 본래 모습을 유지해 왔다. 문학을 사랑하고, 교토의 아름다운 풍경을 동경한 14세기 야마구치의 다이묘 오우치 히로요. 그는 자신의 고향 야마구치를 교토와 같은 문화 도시로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잔인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야마구치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것도 그의 아들들이 서로를 향해 겨눈 칼에 의해서 말이다. 1399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요시미쓰에 대항한 히로요의 큰아들 요시히로가 센슈성에서 전사한 후 요시미쓰는 오우치계가 갖고 있던 도요타(豊田)·이즈미(和泉) 등을 몰수하는 동시에 히로요
잔혹한 전쟁사 깃든 비운의 사찰 연못 속 그림자로 무상을 설하다 한국의 가을이 다 저문 초겨울 일본 혼슈섬의 최서단인 야마구치현의 가을 한 복판에 서있다. 한국의 을씨년스런 겨울 풍경과 달리 일본 서부의 가을은 꺼져 가는 가슴의 불꽃을 일렁이게 할 만큼 절세가경을 뽐내고 있었다. 루리코지 연못 위로 단풍에 물든 오층탑의 그림자가 흐릿하니 드리워져 있다. 세월을 한웅큼 먹어갈수록 가을은 머리도 가슴도 아닌 ‘거리감’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내가 떠난 것도 아니’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머물러 있는 줄 알았던 푸름이 조금씩 잊혀가듯이. 주위 사물들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이방인으로서의 고즈넉한 쓸쓸함을 느끼며 나는 야마구치의 가을 풍경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고 있다
도모노우라 앞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다이쵸루에는 8개의 창문이 있다. 그 문의 위치에 따라 도모노우라 항은 각각 다른 절경으로 다가온다. 1748년 후쿠야마번에서 조선인들이 일대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데모를 벌인 사람들은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 500여명. 이유인즉 그들의 숙소로 후쿠젠지(福禪寺)라는 사찰을 내주지 않은 후쿠야마번 관계자들이 괘씸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그날 밤 결국 배에서 내리지 않은 채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새벽 일찍 에도를 향해 출발했다. 조선통신사는 대마도를 거쳐 에도로 가는 동안 일본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지역들을 골라 머무르며 국빈 대접을 받는 것이 관례였다. 이들이 받은 대접의 수준은 일본 한해 예산과 맞먹을 정도로 호화로왔다고
한국인들의 코를 모아 만들어진 귀무덤에는 임진왜란에 희생당한 조선 백성들의 원혼이 짙게 배어 있다. 원래 코무덤으로 불리던 것이 너무 잔인하게 들린다 하여 17세기 하야시 라잔에 의해 귀무덤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 일행이 ‘미미즈카’라 불리는 귀무덤에 도착할 때까지 여전히 교토의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눈물처럼 흩뿌리는 가랑비 때문인지, 귀무덤(耳塚)과 도요쿠니(豊國) 신사를 들르는 내내 가슴에서는 축축한 물기운 같은 것이 묻어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수교를 맺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사명대사, 그리고 이후 조선통신사 행렬단이 교토를 지날 때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했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그래서 아까 전부터 자꾸 사명대사가 떠올랐나 보다. 이역만리에서 동분서주했을 그를 생각하니 명치
아름다운 자태로 서있는 오사카성에는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를 잃은 지나이마치(寺內町) 사람들의 눈물이 배어있다. 지금은 ‘천하의 밥상’, 내지는 ‘상업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오사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절 마을’ 즉 지나이마치(寺內町)라 불릴 정도로 불심으로 똘똘 뭉친 도시였다고 한다. 신란 스님의 제자 렌뇨(蓮如) 스님에 의해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가 세워진 후 오사카 주변으로 몰려든 불심 깊은 사람들은 ‘어동붕’(御同朋)이라는 염불 외는 단체를 만들고, 상업지역을 형성하는 등 소박한 불교공동체를 일구어가고 있었다. 지정학적으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지라 지나이마치는 점차 간사이(關西) 지방의 물산이 모이는 요충지로 자리잡았고, 상당히 부유한 마을로 성장하게
감사원이 ‘국보 제 1호에 재지정 검토’방안을 발표하면서 사회적으로 국보 1호 재지정 문제에 대해 찬반 논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현재 국보 1호로 지정된 ‘숭례문(남대문)’이 우리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교체해야한다는 주장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우열의 순위가 아니므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등록 번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다. 일제는 1933년 ‘중요문화재 보존령’을 발표하면서 34년부터 전국에 산재된 각종 문화재에 일련번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문화재를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으로 나눠 일련번호를 부여했을 뿐 국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해방이후인 1955년부터다. 광복 후
감사원의 국보 1호 재지정 검토 방안이 발표된 이후 차기 국보 1호 후보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한글, 즉 훈민정음이다. 실제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결과 훈민정음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훈민정음이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이 담겨있다는 점과 창제과정과 원리가 기록으로 명확히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표기수단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리나라 문화 전통을 돌아보면 독창성과 역사성이 가장 뛰어난 문화재가 석굴암이기 때문에 국보 1호는 당연히 석굴암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특히 석굴암은 신라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역사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독창적인 양식, 예술성이 뛰어나 이미 전세계인들로부터 각광
우리나라처럼 문화재에 지정번호를 매긴 나라가 또 있을까. 그러나 일제시대 우리나라 문화재에 지정 번호를 부여했던 일본도 지난 1950년대 문화재에 우열을 두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이유로 폐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문화재에 일련번호를 지정한 것은 세계적으로 남-북한 밖에 없다는 것이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문화재를 관리, 분류하기 위해 편의상 문화재 지정번호를 부여한 나라는 우리나라(북한 포함) 밖에 없다”며 “그러나 이 문화재 지정번호가 결코 문화재에 대한 우열 순위를 두거나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학계에서는 문화재에 대한 지정번호에 지나치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분류체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츠쿠시마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도리가 뭍과 바다의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도리는 죽은 이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다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히로시마에서 뱃길로 1km쯤 가면 일본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한 섬 미야지마가 나타난다. 맑은 바닷물에 잠긴 주홍빛 신사, 벚꽃 문양의 휘장이 펄럭이는 고풍스러운 사찰, 무성한 원시림으로 뒤덮인 섬 곳곳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사슴떼. 이곳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일본만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이 섬의 백미는 인간과 신, 자연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곳이라는데 있다. 미야지마는 사람과 동물, 자연과 신의 경계가 모호한 곳이다. 미야지마 섬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하듯이…. 미야지마는
“대한불교청년회는 범불교 청년단체로 청년불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활동해 왔습니다. 그러나 대한불교청년회가 조계종의 산하단체라면 더 이상 불교를 대표하는 청년단체일 수 없습니다.”(대한불청) “대한불교청년회는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등록 단체입니다. 그러므로 조계종이 대한불교청년회에 매년 소정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별도의 금일봉도 지급하는 것입니다.” (포교원) 대한불교청년회 회원들은 스스로 대한불청의 정체성에 대해 조계종 소속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85주년을 맞은 사단법인 대한불교청년회(이하 대한불청)가 최근 단체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치열하다. 논란의 발단은 지난 7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의 완공을 앞두고 조계종 포교원이 산하 기관들의 사무공간
대한불교청년회 내부에서 ‘대한불청이 조계종 산하단체인가 아닌가’를 놓고 불거진 정체성 논란과 관련, 다른 종단 관계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대한불청은 1920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조선불교청년회의 후신이라는 점을 들어 범 불교 청년단체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번에 불거진 정체성 논란 역시 범 불교 청년단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데 있다. 그러나 다른 종단 관계자들은 “대한불교청년회가 활동해온 모습을 볼 때 분명히 조계종의 산하단체일 뿐, 범 불교 청년단체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며 대한불청의 범불교 청년단체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특히 태고종 산하 한국불교청년회는 “정확히 구분하면 조선불교청년회의 후신은 대한불청이 아니라 한국불교청년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를 머금은 조사당문 너머로 히가시혼간지 조사당이 보인다. 히가시혼간지 어영당 안에는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검은 밧줄 꾸러미가 유리관 안에 모셔져 있다. 설명문에 따르면 케즈나(毛網)라 불리는 이 밧줄은 메이지 시대 일본 전국의 여성들이 바친 머리카락과 삼[麻]줄을 엮어 만든 것으로, 어영당을 지을 목재를 나르는데 쓰였다고 한다. 1864년 화재로 전소된 히가시혼간지는 1879년 전국적인 불사로 재건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 중에서도 신란 스님을 모신 어영당은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졌다. 이 건물에 일본 ‘민중불교’를 상징하는 신란 스님이 모셔진 것, 또 이것이 일본에서 가장 큰 건물로 조성된 것,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정체불명의 밧줄꾸러미는 메이지 시대의 혼란한 사회정황과 밀접하게 연
일본에 도착한지 며칠이 지났건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통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 오는 밤 따뜻한 정종을 마시며 교토의 밤을 즐긴 것까진 좋았는데, 엄청나게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야외로 돌아다니는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 결국 가이드의 임기응변으로 우리 일행이 찾은 곳은 교토역 주변에 위치한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였다. 그런데 덤으로 간 이 사찰에서 뜻밖의 횡재를 만났다. 가마쿠라 신불교를 대표하는 신란(親鸞, 1173~1262)이라는 스님이 이 절 어영당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이 사찰이 본래 신란 스님 집안의 가묘(家廟)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후 신란 스님을 종조로 하는 정토진종의 본산 역할을 하면서 사세는 전국 최고 규모에 이르게 되었
'실크로드의 종착역'이라 불리는 쇼소인 전경. 이곳에는 실크로드와 당, 백제, 신라를 비롯한 여러 시대·여러 지역의 유물들이 9000여점 소장돼 있다. 가을 아침의 들녘 위에 감도는 안개와 같이 내 사랑 어디에서 멈춰 설 수 있을까 이 시는 일본의 고대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실린 와카(일본의 노래 일종)이다. 도다이지 대불전 뒷길을 따라 쇼소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본의 옛 노래를 가만히 읊조려보았다. 고대인들의 노랫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느리고 더 단조롭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소리의 깊이는 바다와 이야기하고 산을 움직일 만큼 심금을 울렸으리라. 중국의 시경(詩經)이 그러하고, 한국의 향가가 그러하듯이. 도다이지의 비로자나 부처님이 조성되던 텐표(天平) 문화의 시기에 일본에서는 ‘천년의
총지종이 10월 17일 서울 종로구 행촌동 관성사 낙성법회를 봉행했다. 총지종 관성사는 종단 창립 초기에 종도가 보시한 사택에서 포교활동을 펼치기 시작해 인근 건물을 매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지종으로서는 종단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온 서원당이다. 관성사는 140여 평 대지에 연면적 169평 3층 규모다. 이날 법회에서는 태장계만다라의 중심인 중대팔엽원과 사인회만다라 봉안불사가 동시에 진행됐다. 우승 통리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불사를 진행해온 관계자들은 치하하고 “아상과 아집, 탐진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상대방이 고의 불행에 빠지게 되면 반드시 자신도 불행에 빠지게 된다는 진리를 체득해야 한다”며 “상대방의 허물을 드러내기에 앞서 따뜻한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감싸 안으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
도다이지 청동대불이 모셔진 대불전 전경. 8세기 중반의 대불전은 화재로 소실됐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709년 개축된 것이다. 도다이지 대불전에 들어서자 순간 숨이 턱 멎었다. 건물에 꽉 들어찬 청동대불. 너무도 엄숙하고, 너무도 웅장한, 내 가슴 밑바닥까지 드러내고 울어도 될 만큼 그의 품은 넉넉해 보였다. ‘아! 이래서 과거에 큰스님들이 대불을 조성하셨구나!’ 역시 딴나라에 가면 내가 아주 당연시 여기던 사물들이 또다른 관점으로 다가오곤 한다. 도다이지 대불전이 비록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하지만, 대불전에 들어서니 왠지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 내부에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이나 각종 전시물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물 내부가 대불에 비해 비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안내판을
구다라 관음의 온화한 미소 오랜 벗을 다시 만난 듯 따뜻함과 포근함 느껴져 일본 여행 도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호류지의 구다라(百濟) 관음을 꼽고 싶다. '동양의 비너스'로 꼽히는 호류지 구다라(百濟)관음. 이 보살의 아름다움은 1400년전 '백제의 미소'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가 “만약 일본 열도가 바다에 가라앉는다면 나는 저 관음상을 가져가겠다”고 했던 매력적인 몸매의 보살이 바로 그것인데, 서양 사람들은 그를 ‘동양의 비너스’라고 부르곤 한다. 이 보살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다지 얼굴이 예쁜건 아닌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1990년대 미인이 김혜수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화려한 이미지라면, 2
금강산 신계사 삼층석탑의 해체보수 공사가 완료됐다. 조계종 금강산 신계사 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종상 스님, 이하 복원추진위)는 10월 10일 지난해 8월 해체한 신계사 삼층석탑에 대해 발굴 및 보존처리를 마치고 다시 복구하는 ‘해체보수공사’를 모두 마무리지었다고 밝혔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신계사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성보였지만, 세월의 무게와 전쟁의 상흔 등으로 상륜부가 결실되고 옥개석 등이 많이 훼손돼 기단의 갑석이 내려앉는 등 석탑자체가 붕괴위험에 노출돼 해체보수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 불교계는 지난 2003년 1월 신계사 복원불사에 합의, 우선 작업으로 삼층석탑을 해체, 보존 처리해 지난 9월 29일부터 10월 5일까지 다시 삼층석탑을 조립, 보수공사
나라 호류지 금당 제6호벽에 그려진 아미타정토국. ‘이곳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호류지 금당이구나!’ 곱게 내리뻗은 서까래며 창살 올올이 세월의 때를 간직한 고색창연한 법당 앞에 서니 발걸음과 옷매무새에 사뭇 신경이 쓰인다.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안경을 벗어 일본 여행에서 쌓인 먼지들을 천천히 닦아냈다. 고구려가 낳은 위대한 화승 담징의 작품, 중국 윈강석굴·경주 석굴암과 더불어 동양 3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금당 벽화를 조우할 생각에, 전날 마신 교토산 정종의 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금당에 들어서니 조명이 하나도 없다. 가늘게 들어오는 빛이 벽화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벽화 앞에서 1400년 전 이 벽 속에 연화세계를 발현한 고구려
정문에서 바라본 호류지 전경. 멀리 오층탑과 남문이 나란히 보인다. 호류지는 고대 일본과 한국의 두 왕자, 즉 쇼토쿠 태자와 여창 왕자의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배어있는 사찰이다.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쇼토쿠 태자가 수많은 살해 위협 속에서 살아남아 섭정의 지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아버지를 위해 훌륭한 절을 짓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신라-백제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머리가 잘려나간 아버지 성왕의 시신을 부여안고 통곡했던 왕자 여창은 백제왕이 되어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불상으로 조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가 환생한 땅 일본에 아버지의 조상을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이곳 호류지는 백제 위덕왕과 일본 쇼토쿠 태자라는 비슷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