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868년 철감선사 창건한국전쟁 때 오백전만 남아광주 젖줄 경양방죽 축조한광주목사 김방이 나한 불사오백나한 모두 흙으로 조성 ▲오백나한님 모두 흙이 빚었다. 아니, 부처님 가피로 목숨 구한 광주목사 김방의 절절한 신심이 빚었다. 부처님 모시고 옆으로 아난과 가섭 존자, 16제자들이 자리했다. 화려한 닫집이 없어 담백했다. 자리가 비좁아 대들보에도 오백나한님들이 앉았다. 좁은 곳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자리한 오백나한들 표정도 제각각이다. 도량이 숨을 죽인다. 쓸데없는 소리가 없다. 풍경조차 입을 닫았다. 하늘만 시끄럽게 운다. 마음도 번뇌로 잡음이 인다. 2년간 기도도량 40여곳을 순례했다. 무엇을 찾아 헤맸
‘달빛 아래 첫 마을’에 위치도선국사가 갈옥사로 중창명종 10년에 무위사로 개칭무주고혼 달랜 수륙재 도량 세종 12년 세워진 극락보전국보 아미타여래삼존불 벽화 벽화 뒤 백의수월관음 ‘영험’ ▲오랜 편견이 깨졌다. 관음보살님의 여성성에 기댄 생각은 여기서 무너졌다. 넓은 얼굴과 어깨, 두꺼운 목과 근엄하지만 자애로운 눈빛을 지닌 강진 월출산 무위사 백의수월관음보살님. 선재동자가 예배 올리리란 예상도 빗나갔다. 어깨에 파랑새 한 마리 앉은 노스님 한 분 있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깨어났다. 천년 전에 사라진 신비에 홀렸다. 달빛은 등에 업고, 신비는 입에 물고 사라진 파랑새의 흔적을 좇았다. 꽁지깃이 하늘 위에 남긴 궤적
신라 문성왕때 염거선사 창건효심에 승천 미룬 용의 전설 대웅보전 뒤 굴에 서려 있어한 가지 소원 성취되는 도량 ▲좁은 바위굴 위, 하늘 길로 통하는 비밀스러운 틈으로 늦가을 바람이 든다. 바람 타고 온 손님이 용인 성륜산 굴암 용덕사 용굴의 어둠을 사른다. 하늘서 내려온 한 줄기 빛은 관세음보살님 용상에서 미끈한 어깨를 타고 내려와 몸 전체를 감싼다. 관세음보살님, 백옥 같은 웃음 피운다. 성륜산에 머물던 가을이 몇 발짝 비켜섰다. 단풍으로 산을 수놓던 가을은 생기 잃은 채 시무룩한 표정이다. 물러선 가을 곁에 성큼 겨울이 다가왔다. 체로금풍이다. 나무들은 바람에 맨살 드러내며 겨울을 맞이할 채비다. 비바람 막
대웅전 자체가 도량의 산증인꽃살문·나무기둥이 세월 대변용상에 때묻지 않는 관음 유명꿈 이루는 아름다운 절로 기억 ▲연꽃, 모란, 무궁화, 국화, 작약이 나무문에 피었다. 대웅전 어간문이 부처님께 꽃 공양이다. 이 아름다운 꽃살문이 연화장 세계를 만든다. 마음도 화사하게 핀다. 부처님은 두 눈 지긋이 내리깔 뿐. 대웅전이 얕게 숨을 쉰다. 나무문은 연꽃, 모란, 무궁화, 국화, 작약을 피웠다. 기둥은 자라던 모습대로 휘고 굽이쳤다. 늦은 오후 고양이 한 마리 주지스님 좌복 위에 앉아 한가롭다. 다른 고양이는 날지 못하는 벌을 좇느라 바빴다. 해는 불명산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절 마당 한 쪽에 연리근이 그늘을 드
고려 공민왕 때 나옹 스님 중창 상서로운 구름 피어오른 곳에서 용 오르내렸다해서 청룡사 명명 왕실 원찰로 극락왕생 빌던 절 인로왕보살 반야용선 벽화 눈길 ▲ 무슨 미련일까. 안성 청룡사 대웅전에는 시간이 쉬고 있었다. 대웅전 기둥은 몸에 700여년의 세월을 새긴 채 제자리였다. 위아래로 굽이쳐 흐르던 시간이 주름처럼 남았다. 대웅전 위 파란 가을하늘에 흰 구름만 유유히 흘렀다. 외진 곳은 모든 게 드물다. 인기척도 시간도 드문드문 했다. 가을도 오는 둥 마는 둥이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가 그랬다. 서운면 청룡리라는 경기도 끝자락에, 충청북도와 마주하는 곳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속
자장 율사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호서제일선원 일주문 현판 눈길 1300여년간 면면히 법등 밝혀와 700년전 호두나무 시배지 유명 금·은물로 쓴 묘법연화경 소장 효령대군 사경한 부모은중경도 ▲호두나무는 400년간 늘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외롭지 않았다. 천안 광덕사 문턱을 넘나들었을 수많은 기도객들 마중은 그의 몫이었으니…. 호두나무가 여름내 잘 여문 열매를 떨궜다. 하늘도 여름 떨쳐내고 가을로 물들었다. 우리네 마음엔 어떤 열매가 떨어졌을까. ‘왜일까.’ 깊은 밤 호롱불빛은 효령대군 마음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효령의 눈은 어두운 광덕산을 정처 없이 더듬었다. 광덕사 경내를 넘실대던
신라 헌강왕때 도선 스님 창건나라 뺏긴 경순왕 머물렀던 곳용이 문 여의주 자리에 응진전석조관세음보살·나한상 유명 ▲ 용이 누워있다는 제천 와룡산, 제 집 버리고 파란 하늘로 들어가 잠룡이 되려나. 태양이 식어간다. 뜨거움에 움츠렸던 바람이 가을 싣고 기지개를 켠다. 하늘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용의 머리둘레에 앉았다는 응진전, 용이 문 여의주 자리란다. 용이 깊은 가을 하늘에 머리를 담그려는 찰나, 응진전은 고산사에 여법함을 더했다. 와룡산(臥龍山). 용이 제 몸 숨겨 웅크리고 누워서일까. 용 품에 안긴 고산사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신륵사로 들어가는 들머리 수산 2구를 지나 단양방면으로 36번 국도를 계속 달리
중건한 스님 법호를 따 명명이천시 굽어보는 마애미륵불나옹 스님과 얽힌 설화 유명어머니 천도 49일 지장기도꽂아 뒀던 지팡이는 고목 돼 ▲이천의 진산, 설봉산 초목들 사이로 마애불이다.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주는 시무외인 수인을 하고 있다. 넓적하고 큰 코와 두툼한 입술에 웃음부터 어린다. 웃음은 잡다한 근심을 몰아냈다. 쓸데없는 근심으로 먹구름 낀 우리네 마음 사이로 신심 한 줄기 얼굴 내민다. 이천의 진산, 설봉산은 가파른 만큼 속이 깊었다. 영월암으로 안내하는 야트막한 기와돌담은 이끼를 키워내고 있었고, 전화기 없는 공중전화박스는 세간출세간 인연을 잇던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낮은 기와돌담 끝에 덩그러니 자리한 공중전화박
만년간 훼손되지 않을 도량해남 대흥사 북쪽 산내암자진불암 숲속 바윗길로 40분 신라시대 조성 마애여래좌상2004년 좌우 공양상 발견돼이듬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 ▲침묵은 솔직한 감정이다. 군더더기뿐인 말을 거뒀다. 대신 가슴이 소리 없이 환희했다. 국보 제308호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땅 끝에 앉아 있었다. 매서운 눈매가 삿된 생각 물리쳤다. 먹먹한 가슴에 신심이 요동쳤다. 비로 물든 땅이 물안개를 피워 올렸다. 한반도 끝, 땅끝마을에 서성이던 장마 비구름이 숨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땅 끝 하늘과 해를 가렸던 비구름이 틈을 보인 찰나였다. 생명을 키워낸 물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햇볕은
고려 때 창건…정유재란에 소실10m 불상과 수백명 스님 머물러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무대10년간 비구니 홀로 복원 발원 ▲임진왜란 후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수백명 스님들이 수행하며 기도했던 만복사가 화마에 휩싸였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눈과 비바람 견디며 천년을 서 있었다. ‘석조 여래입상’이라 불리는 만복사지 부처님, 흘러내린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목탁소리가 사라졌다. 향 사르던 냄새도 자취를 감췄다. 쉼 없는 정진을 당부하던 풍경도 입 닫고 자리를 떠났다. 수백명 스님들이 포행하던 길도 알 수가 없다. 대웅전 문 턱 닳도록 드나들었을 기도객의 신심 역시 몸을 숨겼다. 절터에는 과거를 짐작케 하는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은신라시대 용선대 돌부처님1300년간 중생 굽어 살펴 ▲수십 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앉았다. 장맛비 품은 운무가 화왕산을 드리웠고, 볕은 아직이었다. 관룡사 용선대 부처님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비바람 견디며 중생들을 굽어 살피셨을까? 왼쪽 뺨이 언뜻 엷은 미소를 피웠다. 장대비 같던 장맛비도, 창녕 화왕산에 든 객의 숨소리도 잠시 멎었다. 숨 고르는 비구름의 숨결이 화왕산을 희뿌옇게 물들였다. 아직 못다 뿌린 비가 아쉬운지 구름은 화왕산 자락에 머물고 있었다. 운무에 휩싸인 화왕산, 숨겨졌던 화왕산의 여름이 비로소 신비스러운 제 몸을 드러내니 숨이 멎고 입은 말을 잊었다. 화왕산 군립공원
백제시대 인도승 마라난타 창건네 마리 용들이 앉은 보물 동종왕 탄생 예견한 스님의 공양물영조 생모 숙빈 최씨 전설 남아 ▲환희는 사라졌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뒤, 연등은 사찰로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종적을 감춘 환희는 담양 몽성산에 초록빛 녹음으로 모습을 바꿨다. 이 땅에 자비와 지혜를 퍼뜨린 부처님을 찬탄했던 마음이 초록으로 영글어 몽성산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환희는 사라졌다. 부처님오신날 하루 뒤, 연등은 사찰로 안내하는 이정표였다. 종적을 감춘 환희는 담양 몽성산에 초록빛 녹음으로 모습을 바꿨다. 이 땅에 지혜와 자비를 퍼뜨린 부처님을 찬탄했던 마음이 초록으로 영글어 몽성산을 물들였다. 몽성산 자락, 용흥사(회주 진우
신라말 고려초 창건 추정9개 암자 거느렸던 대찰공민왕때 나옹 스님 중창종 없는 종각·석탑 ‘고풍’ ▲봄볕이 대곡사 앞마당에 내려앉았다. 다층석탑이 범종 잃어버린 종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멀리 목련과 벚꽃이 봄을 알리건만.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는 무엇을 기다릴까. 석탑의 시선은 텅 빈 범종각을 가로질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봄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일주문보다 먼저 마중 나왔다. 분홍빛 벚꽃은 일주문 뒤에서 수줍게 섰다. 봄볕은 의성 비봉산 대곡사(주지 등목 스님) 경내를 쓸다 말다 반복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애꿎은 구름 탓이다. 한가로운 4월 하늘을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이 못내 부러운 게다. 일주문서 반
신라 진평왕 9년에 창건돼관세음보살 꿈 꾼 덕주공주8년 불사 끝 조성한 마애불미륵세계사 석불과 마주봐 ▲누구하나 오라고 한 적 없다. 재촉하지도 않았다. 월악산 중턱, 소나무 한 그루와 극락보전을 벗 삼은 마애불은 그 자리에 계셨다. 구하는 이가 있어야 베푸는 법. 목마름이 물을 찾듯 부처님 가르침도 갈증이 먼저다. 국운은 날카로운 칼끝 위에서 위태롭게 춤추고 있었다. 여차하면 미끄러져 깊게 베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람 앞에 등불은 꺼지고 말았다. 새롭게 일어서는 고려 왕조에 신라는 복속되고 말았다. 남매는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향했다. 목숨 줄 이어 훗날을 기약하고자 월악산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덕주공
‘고삐 없는 소’가 된 경허 선사끝없는 정진으로 깨달음 닦으며 제자 수월·혜월·만공 스님과선기 번뜩였던 연암산 자락 도량 만공 스님은 덕숭산 정혜사에서 눈 푸른 납자 제접하며 법 전해덕숭문중 가풍으로 오롯히 전승 ▲ 시골집 같다. 초하루인데도 신도 한 명 없이 스님 혼자 목탁 두드리며 예불 중이었다. 유기견이었던 길손이만 짖어대며 객을 마중한다. 외로워 보이는 도량에서 외려 선기가 느껴졌다. 경허 선사,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사진 위). 만공 스님의 법맥은 전강 스님이 받았다. 만공 스님은 정혜사에서 법을 전했다. 정혜사 앞마당에 남매탑과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섰다.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인가, 만공 스님과 전강
원효·의상·윤필 스님 정진한한양 남쪽의 관음기도도량칠보전 마애삼존불 칠석기도새 생명 점지하는 영험 보여 ▲육관음전에서 종무소로 난 길을 따라가니 관세음보살이 마중을 나왔다. 돌로 싼 축대 앞에 모셔진 관음보살 보단 좌우로 놓인 수많은 작은 부처님에게 마음을 뺏겼다. 하나씩 찬찬히 바라보니 모두 표정이 달랐다. 자비롭거나 진중하면서도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비는 봄을 재촉하고 있었다. 겨우내 건조했던 안양 삼성산은 간만에 몸을 적셨지만 저물어가는 겨울은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산골짜기, 능선마다 눈을 품고 있었다. 시샘하듯 청명한 하늘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하루하루 봄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건만. 2월
문무왕 16년 의상 스님 창건 선묘의 호법의지 용으로 변해 방해세력 바위 들어 물리쳐 절마당서 선묘석룡 발견돼 배흘림기둥 유명한 무량수전 태백산 자락 앞마당 삼고 호젓 ▲해 그늘 아래 앉은 부석사는 잿빛이었다. 그 빛깔 속에서도 사람들은 분주했다. 언제 오려나. 잎 떨군 나무들과 언 땅이 태백산 기슭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봄소식은 아련하다. 그네들 달래듯 오후 예불의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저물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아팠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가시처럼 뻗었다. 은행나무는 뼈만 남은 제 몸 가릴 게 없어서인지 한이 서렸다. 그렇게 겨울하늘을 노려봤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 들어서는 길 위
두물머리 내려보는 도량나한과 샘물 발견한 세조손수 이름 짓고 중창해다산·초의선사 차 마시며시 짓는 등 깊은 인연 서려 ▲ 수종사 응진전 처마 끝 풍경이 겨울 찬바람에도 가만하다. 아니, 저 너머 남한강과 북한강이 내밀히 몸 섞는 두물머리가 그리울지 모른다.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그곳에 살얼음 앉았다. 아직, 때가 아니다. 북한강은 살얼음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강위엔 물안개가 춤추듯 피어올랐고, 운길산은 차마 녹지 못한 눈으로 옷을 기워 입었다. 운길산 등산로 입구부터 1.7km, ‘힘든 산책’이었다. 살짝 얼어붙은 가파른 길을 50분 정도 숨 가쁘게 올라 ‘운길산 수종사’ 편액이 걸린 수종사 일주문에 다다르
팔공산에 자리한 은해사 말사지눌 스님의 정혜결사 도량 국보 제14호인 영산전 내500나한·부처님 10대 제자16나한 등 526 성중 모셔 ▲제각각이다. 웃거나 찡그리고 눈을 치켜뜨거나 소리를 질렀다. 턱을 괴고 몰두하거나 익살맞게 웃었다. 정말 사람 좋은 얼굴로 합장하거나 호방하게 입 벌리고 웃었다. 나한님들이다. 마음속에 한 분 모신다. 좋은 표정으로 합장이다. 영천 팔공산 거조사 영산전. 거조사 영산전 지붕과 팔공산 산자락에 해가 걸터앉았다. 하루를 열며 숨 가빴던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기 전 쉼일 게다. 그 덕으로 사찰엔 그늘이 졌다. 경내에서 녹아가던 눈도 잠깐 숨을 고른다. 스님은 삽 들고 눈 치우느라
665년 부설거사 아들 등운 창건계룡 하늘과 가장 가까운 사찰조선 운 보호하려 압정사 개명전기·수도 없지만 행복한 도량 ▲시리도록 푸른 계룡산 하늘이 등운암 대웅전 지붕 위에 앉았다. 처마 끝 풍경은 천왕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등줄기를 소기 없이 바라본다. 지붕 위에 쌓인 하얀 눈이 이내 차갑게 투명하게 얼어붙었다. “그래, 이곳이야. 여기서 고개 숙여 마음 살피며 꼿꼿이 출가 초발심 새기고 윤회의 고리를 끊으리라.” 등운은 턱까지 찬 숨 고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계룡산 연천봉으로 향하는 길은 정상 200m 아래에 자리한 평지로 발을 뻗고 있었다. ‘이만하면 움막 하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