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혁 등 “정권 업은 비구들 교권 쟁탈” 김광식 등 “日 잔재 청산-승단청정 계승” 20세기 한국불교사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꼽히는 이른바 ‘비구·대처승간의 분규’.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비롯된 이 분규는 기존 교단 집행부였던 ‘대처측’과 불교정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에 맞섰던 ‘비구측’간의 치열한 투쟁으로 17여 년 간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사찰 내에서 폭력배들간의 잔인한 폭력이 발생하는가 하면 불교내부의 문제가 법정다툼으로 이어지면서 한국불교의 위상에 커다란 손실을 입혔다. 결국 1970년 대처측이 세운 태고종이 새로운 종단으로 등록되면서 오랫동안 지속돼 온 ‘비구·대처승간의 분규’는 마침내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분규를 두고 승자인 조계종은 ‘정화(淨化)’로, 패자인 태고
박성배 “보조 비판 앞서 성철의 修 제시해야” 윤원철 “성철 돈수 주장, 수행독려 위한 방편” 성철 스님의 보조 스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시작된 이른바 돈점 논쟁은 이후 보조사상연구원이 1990년 송광사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본격화됐다. 특히 학술대회에서는 한국 선불교 조계종의 종조 내지 중흥조로 추앙받았던 보조 스님을 비판한 성철 스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문들이 속출되면서 돈점 논쟁이 사회적으로도 관심을 끄는 계기가 됐다. 반격의 포문을 연 것은 박성배 교수였다. 박성배 교수는「성철 스님의 돈오점수설 비판에 대하여」를 통해 “보조 스님이 말한 돈오점수의 의미는 수도자라면 누구나 깨닫기 위해 먼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불경을 읽고, 모두 참선해야 하며, 그리고
성철 “점수, 거짓 선지식 잘못된 이론” 주장 법정 “부처님도 돈오 이후 점수했다” 반박 현대 한국불교에서 오랜 기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던 논쟁 가운데 하나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가’, ‘돈오점수(頓悟漸修)인가’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돈점’ 논쟁의 시작은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이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보조 지눌 스님의 돈오점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비롯됐다. 스님은『선문정로』에서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깨치지 못한 거짓 선지식이 알음알이(知解)로 조작해 낸 잘못된 수행이론으로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며 “이 같은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知解宗徒)이며 이단사설(異端邪說
최남선 등 “원효서 비롯된 통불교” 주장 심재룡 등 “통불교, 보편적 특성에 불과” 반박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지 1700여년.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 동안 한국불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대변하는 것이 ‘통불교’였다. 이는 1930년대 일본인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의해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연장이나 한 분파로 해석하고 그 독자성을 부정한 것’에 대해 민족사관으로 맞선 육당 최남선이 처음 사용하면서부터 비롯됐다. 최남선은 1930년 태평양불교학자대회에서 「조선불교-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를 통해 “조선 불교가 가지는 진정한 자랑과 독특한 지위는 불교의 진생명을 투철히 발양, 불교의 구제적 기능을 충족히 발휘해 이론과
도업 스님 “한국 최초 화엄사상가는 자장” 주장 해주 스님 “한국 화엄 교학체계 구축, 의상” 반박 중국의 화엄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해 한국 화엄의 전통을 수립한 해동 화엄의 초조(初祖)는 누구일까. 그 동안 학계에서 ‘해동화엄의 초조는 의상’이라는 점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는 신라 최치원이 찬한 ‘해동화엄조초기신원문’과 찬영의 ‘송고승전’에 해동화엄의 초조는 의상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시대 이후 화엄의 주류를 형성했던 것은 의상 스님이 분명하지만 화엄을 처음 국내에 들여와 설했던 사람은 자장 스님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있었다. 즉 해동화엄의 초조는 의상 스님이 아닌 자장 스님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동국대 김영태 교수는「법시」(1971년5월)에
“설화-국명변화…가야불교 존재” 주장에 “설화만 주목한 결과…신빙성 없다” 반박 서기 전후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던 가야. 그러나 가야사(加耶史)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불교 조차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 따르면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해 가려했지만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사 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부왕의 명을 따라 파사석탑을 싣고 가자 그제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바닷가에 정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日 학자 ‘일본서기’ 분석 … “5~6세기에 수용” 韓 학자 “편협한 사료연구 결과 … 침류왕 원년” 백제가 불교를 처음 수용한 시기는 언제일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침류왕 원년 9월에 고승 마라난타가 진(晋)으로부터 오므로 왕이 궁내에 영치(迎致)하고 예경하니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됐으며, 이듬해 불사(佛寺)를 한산에 세우고 승(僧) 10인을 출가케 했다”고 기록돼 있어 백제의 최초 불교 수용 시기는 침류왕 원년(384)으로 알려져 왔다. 이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서도 이 같은 기록이 언급돼 있어 백제의 불교 수용시기가 침류왕 원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일본학계를 중심으로 “백제 불교 수용시기를 침류왕 원년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도선-혜명-몽고 외압설 등 논란 11세기 혜명 창건설 설득력 강해 신라말 고승 도선 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화순 운주사. 이 절은 특이한 돌부처와 석탑이 모두 한 절 안에 봉안돼 있고 천불천탑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우리나라 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사찰은 비록 현재 70구의 불상과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1000여구의 불상과 탑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다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 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계속돼 왔다. 학계에서 운주사에 대한 학술연구가 본격적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당시 전남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성
노태돈 “인명-용어 당시 표기법 아니다”주장 이종욱 “향가 수록-관직 등 기재… 진본” 반박 신라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의 유래에 관해 적은 책으로 알려진 『화랑세기(花郞世紀)』. 이 책은 신라시대 화랑제도의 성립 및 활약상을 다뤄 화랑 본래의 모습을 가장 잘 전하는 기록으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문헌에서만 전할 뿐 그 실체가 발견되지 않아 그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화랑세기』가 세간에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당시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화랑세기』의 필사본(筆寫本)이 발견되면서부터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필사본이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원본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진위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 이른바 필사본 진위논쟁이 본격적으로 학계에서 거론된 것은 1995년 4월
“78호 신라 - 83호 백제 제작” 주장에 “78호 고구려”-“모두 신라 제작” 반박 뛰어난 예술성을 갖춰 각각 국보 78호와 83호 지정된 금동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상 대부분 그렇듯 이 금동반가사유상들도 명문이 남아 있지 않아 연대와 제작국, 정확한 명칭이 알려지지 못한 채 국보 78호와 83호 등 국보 번호로만 명명돼 왔다. 더욱이 이 불상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것이 아니라 일본인 약탈범들에 의해 강탈된 것을 박물관에서 돈을 주고 사거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기증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불상의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양식과 재질 등의 특징만으로 이 반가사유상이 삼국시대 작품인 것
“인물묘사 김홍도 수법과 유사” 주장에 “ 25 화승설” - “20세기초 제작설” 반박 용주사 대웅전 후불탱화. 이 불화는 용주사 창건 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불화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불화가 명암법을 쓰지 않는 것에 비해 서양 명암기법을 전 화면에 사용한 실험적인 그림으로 18세기 한국불화 양식의 특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이 불화는 대부분의 불화와는 달리, ‘누가 언제 어떤 발원으로 그렸다’는 화기(畵記)가 없어 제작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이 불화가 이 시기 대표적인 화가였던 ‘김홍도에 그려졌다는 설’과 같은 시기 ‘25인의 화승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설’, ‘19세기 말 또는 20세
임승택 “위빠사나 온전한 경지 초선”주장 김재성 “주석서 잘못된 이해서 비롯”반박 조준호 박사의 문제지적에 김재성 씨의 반박으로 시작된 이른바 ‘위빠사나 논쟁’은 이후 또 다른 초기불교연구자인 임승택 박사가 가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임승택 박사는 2002년 9월 불교학연구회에서 「선정의 문제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김재성 씨와 조준호 박사를 한꺼번에 공격했다. 임 박사는 논문에서 “위빠사나는 ‘첫 번째 선정(초선)’이전 단계에서부터 행해질 수 있으며 ‘첫 번째 선정’에서부터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가능하다”며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非想非非想處定)’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 상태에서는 위빠사나를 행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조준호 “사선 이후에나 가능”주장 김재성 “선정 닦지 않고도 가능”반박 한국불교에 있어 주된 수행법이 간화선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신라시대 이후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으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서도 조계종과 태고종이 간화선을 주된 수행법으로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남방상좌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위빠사나 수행법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이 같은 간화선 수행 전통은 크게 흔들리게 됐다. 갑작스런 위빠사나 수행의 확산에 위기감을 가진 간화선 수행자들은 위빠사나 수행을 ‘하근기 수행법’, ‘소승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맹공격했고, 이에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부처님 당시의 정통 수행법’이라고 반박하면서 끊임없이 논쟁을 이어나갔다.
김병곤 등 “금당 발견… 현 위치맞다” 주장 이종철 등 “불교행사 열리던 가궐 터” 반박 고려 무인정권 시기, 대몽 항쟁을 불태우기 위해 1245년 창건된 강화 선원사. 이 사찰은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고려 2대 선사(禪寺)로 불렸으며 고려 충렬왕 때는 임시 궁궐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웅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태조 7년(1398) 대장경판이 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겨진 후, 점차 사격이 급격히 쇠퇴해져 이후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폐사지로 전락하게 됐다. 강화 선원사가 다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76년. 강화도의 호국 유적지를 탐사하던 동국대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관련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유추해 선원사지를 찾아내면서부터다. 당시
황수영, “일본서 급조해 바꿔치기 한 것”주장 남천우, “중국-신라 주조술 혼용된 한국 종”반박 국내 최고(最古)의 범종으로 알려졌으며 1929년 1월 1일 경성방송국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제야 행사에 사용되기도 했던 조계사 범종. 이 범종은 한국 범종사에서 수작이라 꼽힐 평가될 정도로 그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임에도 비운의 문화재로 알려져 왔다. 이 범종의 수난은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이 범종이 봉안돼 있던 사찰은 경기도 양평 용문산 상원사였다. 그러나 1907년 일본군이 이 사찰에 불을 지르면서 일제는 이 종을 서울 남산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의 경성별원으로 옮겼다. 당시 히가시혼간지는 경희궁의 건물을 뜯어다가 세운 일본 불교 진언종의 총본산지였다. 조선총독부는
中-日, “박산로와 유사… 중국서 수입” 주장 최웅천 등, “백제 독창성 보인 창작품” 반박 1993년 12월 12일 세계 고고학계는 한국을 주목했다.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세계최대, 전대 미문의 화려한 도상을 가진 대향로가 발굴됐기 때문이다. 능산리 고분군의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이 향로는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세계 최대의 크기로 몸체와 뚜껑, 봉황과 받침대 등 크게 4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이 향로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조각하고 있으며 향로에 표현된 조각이 매우 뛰어날 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김영태-기무라 등 “의상 이후 가택된 것”주장 해주 스님 등 “저자 언급돼 재론 여지없다”반박 한국불교 최초의 발원문으로 알려진 백화도량발원문. 고려 충숙왕대(1314∼1330) 목암(木庵) 체원(體元)이 백화도량발원문을 모아 주석을 붙인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에 수록돼 있는 이 발원문은 200여자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신라 관음 신앙의 관계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돼 왔다. 특히 이 발원문은 체원이 백화도량발원문 약해에서 ‘신라 의상 법사제(新羅 義相 法師製)’라고 밝혀 누가 이 발원문을 지었는지를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이 발원문의 저자를 의상으로 볼 수 없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백화도량발원문의 저자’ 논란이 학계에서 처
이능화-최병헌 등 “신라 하대 주류, 선종”주장 김상현-고익진 등 “상호 견제 속 공존” 반박 귀족들의 부패와 왕위 쟁탈 등 고대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모순이 표출되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이 거듭되던 신라하대. 이 시기 불교계에서도 일대 변화가 시도된다. 즉 새로운 불교사상으로 도입된 선종(禪宗)이 사상적 주류를 이루던 교종(敎宗)인 화엄종의 한계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 인해 기득권을 누리던 화엄종은 위축됐고, 존립기반 전체가 흔들려 선종이 신라 하대 주된 사상체계로 자리 매김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920년대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를 통해 “신라 헌덕왕(憲德王, 809∼826) 이후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선종이 홀로 세력을 누렸으며 교학의 제종(諸宗)은 힘이 다함에 묻히고, 강경
日학계 “670년 전소… 담징 작품 아니다”주장 문명대 등 “호류지 재건설 재검토 필요”반박 일본 미술의 최고 정점이라는 호류지(法隆寺). 617년 쇼토쿠 태자의 발원으로 창건된 이 사찰은 1949년 1월 화재로 전소되기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왔다. 특히 호류지는 금당에 한국에서 건너간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12면 벽화가 있어 삼국불교 미술의 일본 전파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이 금당벽화는 그 제작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누가, 언제 그렸는지가 명확히 알려지지 못했다. 다만 『일본서기』에 “610년 일본 호류사를 찾은 고구려 화승(畵僧) 담징은 오경(五經)을 알고 있었고, 채색 및 종이와 먹을 만들고, 아울러
강우방 등 “목조전실-홍예석 철거해야”주장 성낙주 “철거주장, 맹목적 비판에 불과”반박 1960∼70년대 서울대 남천우 교수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이른바 ‘석굴암 원형논쟁’은 석굴암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신영훈 씨와 문명대 씨의 반론으로 이어졌고, 여기에 다시 남천우 교수의 재반박 논문이 발표되면서 당시 학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미술사학자들의 반론이 이어지면서 물리학을 전공했던 남천우 교수의 주장은 다소 주춤했고, 이로 인해 석굴암 원형논쟁은 수그러드는 듯 했다. 이후 30년이 지난 1991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이었던 강우방 씨는 「석굴암 건축구조의 재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일제와 60년대 이뤄진 두 차례의 보수공사로 석굴암의 원형은 사라졌다”고 주장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