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 선사가 천목산에 들어와 15년간 면벽수행을 했다는 무문관 사관(死關). 사관은 고봉 선사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문을 닫고 영원한 세계의 문을 연 곳이다. 고봉은 남명사 산문을 나서 강심사(江心寺), 국청사(國淸寺), 설두사(雪竇寺) 등으로 행각(行脚)을 떠났다가 3년 뒤 다시 설암 선사를 찾았다. 설암을 시봉하며 지내던 어느 날, 설암이 “매사 주인공이 되느냐”고 묻자, 고봉은 주저 없이 “그렇다”고 했다. 이에 다시 설암이 “잠잘 때도 주인공이 되느냐”고 물었고, 고봉은 이번에도 거리낌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설암 선사는 “잠잘 때에는 꿈도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거늘 주인공이 어디에 있느냐”고 다그쳤다. 순간 고봉은 머릿속이 텅 빈 채 아무
천목산에 위치한 선원 ‘개산노전(開山老殿)’에 모셔진 고봉(中) 선사와 제자 중봉 명본(左), 단애 요의(右) 스님. 1259년, 22세의 청년 고봉은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로 단교 화상을 찾아갔다. 단교 화상은 고봉을 흐뭇한 미소로 반기며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오고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生從何來 死從何去)?”라고 물었다. 그러나 고봉은 답을 내놓지 못했고, 단교의 물음은 곧 고봉의 화두가 됐다. 그러나 고봉의 생각과 달리 공부는 진척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목석마냥 우두커니 앉아있기만 하려니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져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배수진을 쳤
정자사 대웅보전 전경. 고봉 선사가 3년 안에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각오로 불퇴전의 용맹정진을 한 곳이다. 항저우(杭州)의 아침은 언제나 안개와 함께 시작된다. 지독하리만큼 짙은 안개는 태양이 지평선 위로 올라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걷히고, 자동차도 그때서야 겨우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2500년 전 인위적으로 만든 세계 최고의 인공 물길 경항대운하(京抗大運河) 때문이다. 경항대운하는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길이 1764㎞의 세계 최장의 수로. 그러나 항저우 곳곳에 연결된 이 물길로 말미암아 시내는 1년 365일 중 300여 일이 안개에 묻힌다. 순례단이 겨우겨우 안개를 헤치며 항저우 시내에 위치한 정자사(淨慈寺)에 도착했다. 정자사는 소동파(蘇東坡)가
‘동남불국(東南佛國)’이란 별칭을 가진 천동사는 17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중국 내에서도 원형이 잘 보존된 몇 안 되는 고찰이다. 고요하고, 고요하다. 산중에 폭 파묻힌 산사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처럼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천동사(天童寺)를 본 첫 느낌이다.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아육왕사 동쪽 25㎞ 지점에 위치한 천동사에 도착했다. ‘동남불국(東南佛國)’이란 별칭을 가진 천동사는 1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내에서도 원형이 보존된 몇 안 되는 고찰이다. 저장성 중점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은 송나라 때 999동에 달하던 전각 가운데 지금도 730동이나 남아 대찰의 웅장함을 유지하고 있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서기 300년 의흥이란 스님이
경산사는 대혜 선사가 황제의 명으로 42세와 70세에 주지를 살았고, 입적할 때까지 머문 곳이다. 사진은 경산사 선당 전경. 융흥 원년(1163년) 8월 9일, 대혜 선사는 경산사 명월당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갑작스런 스승의 호출에 제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대혜 선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가리라.” 일순간 명월당 안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제자들은 멍하니 스승의 얼굴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승의 말은 오늘 입적에 들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윽고 제자들의 어깨가 하나둘 들썩이기 시작했고, 몇몇 제자들이 스승에게 나아가 더 머물며 후학을 지도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스승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
천녕사는 대혜 선사가 스승인 원오 선사를 만나 일대사를 해결했던 오도처다. 문화혁명 당시 완전히 파괴된 것을 중국 정부가 1979년부터 200억 원을 들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결국 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빗속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장쑤성(江蘇省) 천녕사. 대혜 종고가 스승인 원오 극근을 만나 일대사를 해결했던 오도처다. 천녕선사(天寧禪寺). 도량에 들어서기도 전에 일주문 위에 걸린 거대한 편액이 순례단을 압도한다. 당조 영휘년(650년)에 건립된 천녕사는 복원 이후 중국 정부가 중점 관리하는 사찰 중 하나로 ‘동남제일총림(東南第一叢林)’으로 불린다. 창건 이후 다섯 번의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다 문화혁명 당시 완전히 파괴된 것을 중국 정부가
대혜 선사의 활발발한 선기 드날린 별전의 도량 지난 3월 10~13일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지식 고우 스님(봉화 금봉암), 대강백 무비 스님(범어사 승가대학장)이 중국의 간화선 선적지를 찾았다. 간화선을 창시한 대혜(大慧, 1089~1163) 선사의 흔적과 고봉(高峰, 1238~1295) 선사의 숨결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조계종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이 주관한 간화선 선적지 순례에는 108명의 간화선 수행자들이 함께했다. 법보신문은 순례 길에 동행, 7회에 걸쳐 연재한다. 1600여 년 전 중국 동진시대에 창건돼 선종 5산의 하나로 꼽히는 아육왕사는 대혜 선사가 15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68세부터 3년간 주지를 살며 선기(禪氣)를 드날린 도량이다. 오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