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스님 말씀 듣고 염불 수행 알아매일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며 행복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찾았던 사찰에서 어느 비구니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것이 불교의 정설이고 진실인양 헛 꿈을 꾸며 살아온 13년. 긴 세월이 흐르면서 회의도 들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더욱 혼미하기만 했다. 물론 공부는 당연히 자력으로 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청화 스님이 쓰신 책을 읽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염불은 글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는, 아무 것도 모르는 할머니들이 기복적으로 하는 것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청화 스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청화 스님의 책을 읽으면서 염불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하게 가졌던 편견이 일순간 사라지게 되었다. 이미 입적하셨지만 마음
진정한 발심없이 출가했다가 줄행랑 이것 저것 수행유람하며 비참한 마음 새벽 3시, 잠을 깨우는 자명종 소리가 어김없이 울린다. 새벽예불 시간에 늦을까 싶어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잠에서 깨기 위해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있노라면 문득 ‘나무아미타불…’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가는 중에도 의식은 그 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다. 염불을 시작하면서부터, 아니 정확하게는 자성염불이 되고 나서부터는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나무아미타불’염불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물론, 내 삶이 이렇게 바뀌기 까지는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사연도 많았다. 지난 92년 봄이었을까. 평소 존경하는 박 선생님께서 어느 큰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가자고 해 처음 절을 찾았다. 불교에 대해서는 아무
사경-절-염불 수행으로 안정찾고 다라니 주력수행하면서 자기 정화 세상 사람들 누구나 한번쯤은 삶 속에서 어렵고 힘든 일을 겪게 되지만, 우리 가족이 이런 황당한 사고를 당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상황에서도 업장이 두터운 탓이었던지, 고통스러운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내 욕심의 굴레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두려 했던가. 내가 만든 잣대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분별하고 차별했던가. 부처님 말씀 하나 하나가 가슴에 스며들며 내 욕심과 이기심을 차츰 녹여나갔다. 금강경 사경을 하면서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있음을 알았고, 온몸을 고통으로
갑작스런 남편의 사고로 일상 붕괴절 찾아 발원 기도해도 혼란만 가중 13년 전 어느날. 이날도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집안 일을 하고 아이들 뒷바라지하는 주부의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오후가 되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수화기를 들었을 때,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남편 직장동료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가볍게 다쳤으니 의료보험증을 갖고 병원으로 오라는 남편 동료의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모를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의 상태는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길을 가다가 맨홀뚜껑에 발을 딛는 순간 뚜껑이 뒤집어 지면서 급소를 쳤는데, 검사결과 요도가 파열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끊어진 요도를 잇는 것 자
일수 스님 만나면서 동중선 공부 시작 점검-경책 받으며 가족모두 참선 수행스님께서 “남편도 부처님의 화신이요, 자식도 부처님의 화신이니 시봉 잘 하라”고 말씀하신 이후, 정말로 남편이나 아이들을 부처님 화신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마음 또한 편안해졌다. 당시 고암 스님이 소개해 준 스님은 삼정사 삼밀 스님이었다. 삼정사에 다니면서 마음공부를 시작했고, 둘째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가정에 평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암 스님이 열반에 드시고 삼밀 스님마저 열반에 드시면서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이 죽음의 공포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마음 둘 곳 없이 있던 중 남편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대전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이사를 했다. 대전에서 조그마한 암자를 의지처로 삼아
출가 꿈 포기… 부모님 권유로 결혼 남편은 무직에 술까지… 고행의 시작 부모님의 종교생활은 어머니가 1년에 한·두 번 정도 만신 집에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시골 토속신앙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릴 적 공부가 더 하고 싶었지만 집에서 뒷바라지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집안에 보탬이 될 일을 찾기로 했다. 그리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일곱에 셋째 오빠를 따라 서울행 완행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고된 생활에도 가정에 보탬이 된다는 뿌듯함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힘든 줄도 몰랐다. 그 때의 즐거움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 맛 볼수 없었던 그런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셋째 오빠에게는 의형제 사이인 김씨 아저씨라는 분
모든 것은 순간적 현상…무상함 깨달아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게 돼 지난날의 삶을 참회하고 지옥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불법에 감사하며 열심히 수행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수행을 지도해주는 스승이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진했다. 그러던 중 도반의 소개로 묘원 법사님의 위빠사나 강의를 듣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수행에 대한 열망에 따라 스승님들과의 인연이 지어지고 그 인연에 따라 조금씩 불법을 몸으로 체득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음 카페에서 깔야나미타 명상선원을 운영하고 계신 아눌라 스님께 처음으로 4박 5일의 집중수행 지도를 받으면서 마음챙김은 판단함 없이, 다르게 되기를 바라는 바 없이,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수행임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집중수행
중학생 아이 방황 끝 자퇴에 충격매일 참선하며 눈물…내 잘못 참회 아차산 산자락을 휘감은 운무의 모습에 감탄하며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언제부터인가 누구와 비교해서 뽐내고자 하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 자체로서 주변에 밝고 아름다운 기운을 보낼 수 있는 자연을 닮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도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출근길에서 만나는 모든 차량에 자비(metta)를 보낸다. 그 순간에 내 마음도 훈훈해진다. 학교에 도착해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마음을 모아서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비를 보내며 학교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 순간 깨어있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한다. 현재 이 순간 깨어있으려고 자각하는 모습이 되기까지 5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 같
정토선 염불하면서 극락세계 확신자성염불 3년에 미움·시기 사라져부처님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한없는 절망의 병고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절에 다니면서 참선, 관음정근, 나한기도, 옴마니반메훔 주력, 절 등 안 해본 것이 없다. 그러던 어느날 청량리 금강선원 활안 스님께 연락이 왔다. 중국에서 오신 선지식을 친견해야 된다는 부름이었다. 중국에서 오신 관정법사님을 만나뵙기 위해 선원으로 달려갔다. 법사님은 “우리가 극락에서도 이렇게 법회에서 서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하고 한마디 하셨다. 대단히 인상이 깊은 분이셨다. 관정법사님을 만난 인연으로 시내 중심 종로 3가에 있는 ‘아미타사’ 포교당을 알게 되었고 그곳 스님에게서 받아온 관정법사님의 ‘극락세계 유람기’와 ‘정토선 정의’
사단법인 대한불교청소년연합회(총재 현성 스님, 전 청소년교화연합회)가 5월 28일 오후 2시 동국대 중강당에서 ‘제 19회 청소년 전통예술경연대회’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지난 1988년부터 매년 이어져 오고 있는 청소년 행사로 대한불교청소년연합이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고 청소년들의 잠재된 예술적 소양을 고취시키기 위해 개최하는 대표적인 행사다. ‘2006 청소년! 대한민국의 힘입니다’의 해와 5월 청소년의 달을 맞아 행사 취지의 의미를 더하고 있는 ‘제 19회 청소년전통예술경연대회’에는 전국에서 총 10개 팀이 경연에 참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으로 무대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보인다. 또 매년 800명 이상의 청소년들이 행사에 동참해 전통문화예술축제의 장이 돼왔던 이 행사에는
실수한 남편, 내 친구들이 3년이나 비방 정신적으로 충격받고 억울함에 남편 원망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내가 큰댁에 간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께선 70이 넘으셨는데 창호지 한 장을 내놓으시면서 나무아미타불과 지장보살을 써달라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께 정성들여 ‘나무아미타불, 지장보살’을 써 드렸다. 할머니께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또박또박 읽어드렸다. 그 후로 할머니께서는 내가 써 드린 그 종이를 펴 놓으시고 한 손가락으로 짚어 가시며 ‘나무아미타불, 지장보살’을 늘 읽으셨다. 이후 한글을 배워 이산혜연선사 발원문까지 줄줄 읽으셨던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실꾸리에 실을 감으시다가 방 벽에 기대시며 “아유 졸립구나! 잠깐 쉬고 일어나마” 하시며 옆에 있는 손자
가르침대로 내 안의 불성 믿고 수행남과의 시시비비 없어지고 마음 평온 참선도량 공생선원에서 들은 스님의 첫 법문은 ‘우리는 작은 대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내용이었다. 대롱 속에 비친 모습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거기에 물들어 웃고 울지만 그 모습이 싫으면 대롱을 치우면 된다는 말씀이다. 그 때 스님은 참선은 바로 내 안의 불성을 믿고 봄으로써 스스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유인이 되는 공부라고 하셨다. 그 법문을 듣고 “그래, 이거다!”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가슴이 벅차 올랐다. 우리 아이를 볼 때도 대롱을 치우고 아이의 진면목 전부를 보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참선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좌선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루했다. 잡생각은 또 얼마나 머리 속을 가득
둘째 아이의 장애 보면서 불교 귀의 기도 미명 아래 허겁지겁 부처 찾아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끔 절에 가면 과거의 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끼곤 했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젊은 날은 학교 공부에 매달리고 세속의 기준에 나를 맞추느라 불법과는 별 인연이 없이 살았다. 모든 것은 내 의지대로 될 수 있다는 자만심이 가득했고 별다른 고통이나 실패 없이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의사인 남편과 결혼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자신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해 친정 할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꿈속에서 보여주셨던 너무나 생생한 체험은 내게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나 막연하지만 무엇인가 분명히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확신을 주었고 갑자기 불교
매일 금강경 50∼100번씩 집중 독송 경전 읽으니 깊은 분노-원망 사라져 2005년 1월, 금강경으로 모든 시름에서 벗어난 어느 선지식 한 분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그 분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듣게 되었고, 나도 금강경을 공부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다. “일체 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그 날 처음 일독을 35분 만에 마치고, 이 사구게에 마음이 꽂혀 한 없이 울었다. 마치 나에게 들려주기 위한 구절인 양 생각되었다. 그리고 5독을 마친 뒤에 정말 깊은 단잠에 빠져 들었다. 꿈도 없었고, 뒤척임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금강경에 매달렸다. 그
누명-건강 악화 절망서 금강경 만나 1년간 금강경 1만번 독송한 후 새 삶 지난 일 년은 내 생에 가장 뿌듯했던 한 해였지 싶어진다. 1년 동안 금강경 일만 독의 목표로 노력한 결과 12개월 21일 동안에 일만 독송을 마쳤으며, 그로 인해 내가 뿌린 내 허물과 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내 생에 악몽 같았던 지난 4년, 그 시간이 있었기에 조금쯤은 나로부터 놓여날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평범한 불교집안에서 6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나 명랑하고 쾌활하게 자랐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염했고, 그냥 소풍가는 기분으로 사찰에 드나들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 6남매는 한결 같은 모범생으로 성장하여 사회의 주역들이 되었고, 나 또한 졸업과 동시에 솜씨 좋은
우곡선원서 관법-좌선 등 수련 토요일 청소년들에게 참선 교육 생소하기만 하던 날숨호흡과 실상관법, 선기공 체조, 좌선, 참 품세, 우곡 선사님의 법문, 만행 등 우곡선원 참선교육은 그동안 내가 접했던 구하고 매달리는 불교수행과는 많이 달랐고 갖가지 의문도 들어 머릿속에서는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번 다녀보자, 무언가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금요정기법회와 만행정진은 빠지지 않고 다녔다. 처음 만행을 다녔을 때에는 왼쪽 무릎이 아파 고생을 많이 했었는데 도반님들의 말대로 날숨호흡을 하면서 산을 오르내리고 우곡 선사님께서 인도해주시는 명당자리에서 좌선하며, 즉석에서 열리는 야단법석과 선사님의 법문을 듣고 있다 보면 흐릿한 안개 속 같았던 의문점과 불분명한 것들이 명쾌해지고 힘이 생겨나면서 다
직장-가정에 쫓기다 나중엔 허무만 교장 선생님 적극 권유로 참선 시작 봄비로 촉촉해진 땅에서 쑥이며 냉이, 봄나물들이 봄 향기를 내뿜으며 파릇파릇 새싹을 피워 올리는 것을 보면서 이젠 봄인가 했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드는 꽃샘추위로 여린 새싹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새 학기를 알리는 3월, 학교는 새로운 얼굴들과 그리운 얼굴들로 아직도 분주한 가운데 내가 맡은 중학교 1학년 새내기들은 조금은 헐거운 교복에 여전히 초등학생 같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끊임없이 궁금증을 물어온다. 그 물음들에 일일이 응대해 주고나면 여지없이 하루해가 기울듯 내 체력도 바닥이 나기 일쑤다. 오늘도 아이들과 나와의 행복한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젊음이란 단어와 함께 대학생활을 마치자 꿈에 부푼 교직생활이 시작되었고
시민단체가 국립공원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를 합동징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문화연대는 3월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문화재관람료를 국립공원입장료와 통합징수하는 행위는 전혀 법적인 근거 없이 국립공원을 찾고자 하는 국민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재산권, 행복추구권 등을 제한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재판소를 찾아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 자리에서 문화연대측은 “이번 헌법 소원은 불교계나 조계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위해 추진한 것”이라고 전제한 뒤 “국립공원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의 합동징수는 그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행정 편의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이는 명백한 부당 행위로, 문화재 관람의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단지
염불 뒤 원망-미워하는 마음 사라져 인대 끊어진 아들 저절로 회복되기도 염불을 열심히 하고 있던 어느 날 대구 염불선원이란 절에 법회를 보러 갔다. 당시 주지 스님이셨던 수산 큰스님께서 설법을 하는데 법장 스님과 똑같이 말씀하셨다.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시며, 오종정행을 해야만 빨리 삼매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오종정행은 중국 선도대사께서 주창하신 것으로 아미타불께만 귀의하는 예배정행, 정토삼부경만을 읽는 독송정행,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는 칭명정행, 아미타불과 극락세계를 관하는 관찰정행, 아미타불을 찬탄하고 공양하는 찬탄공양 등을 일컫는다고 했다. 수행의 길 앞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있는 건 당연하다고 본다. 전생을 살아온
미타사 스님 인연으로 23년째 염불 집에 부처님 모시고 매일 기도정진 서산에 지는 해와 같은 어느새 내 나이 쉰을 훌쩍 넘겨버렸다. 처음 염불을 만나 매일매일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진해온지도 벌써 23년이 되었다. 1984년 경주 미타사 법장 스님과의 인연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지표가 되는 만남이었다. 스님께서 출가 하시기전 나의 남편과 먼저 인연이 되어 내가 알게 되었다. 처음 뵙게 된 건 어느 날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 직원으로만 알고 있었던 중년 남성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오면서부터다. 평소 조용하고 진지해보이던 그 분은 우리 집에 찾아 오셔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해보라고 하셨다. 당시 관세음보살님 정근을 하고 있던 나는 왜 아미타불이냐고 의아해 하면서 한 귀로 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