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서울 화곡동에 위치한 성심사에 가서 새벽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다. 벌써 4년째 기도를 올리고 있다. 새벽에 25분을 걸어서 가는 길이 너무 즐겁다. 남들은 여자가 컴컴한 새벽길을 가는 것이 무섭지 않냐고 하지만 부처님께 기도 올리러 가는 길이어서 즐겁기만 하다. 나는 불교를 몰랐다. 그러나 내 인생에 두번의 큰 사건이 있은 후 불교를 알게 됐다. 세째딸을 임신했을때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기독교인들이 와서 찬송가를 불러주었지만 49재는 절에서 지냈다. 초파일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갔던 기억이 있었고 절에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관사를 찾아가 무작정 스님들께 49재를 치러달라고 떼를 썼다. 스님들은 나의 무례한 행동에도
금년도 저물어 가는 지난 일요일, 여느때처럼 아침 설겆이를 대충 끝내고 오전 10시에 집을 나서 남산에 있는 대원정사 일요법회장으로 향했다. 일주일전에 미리 다음주 법사님을 예고해 주지만 까맣게 잊고 `오늘은 어떤 분이법문을 하시려나'하며 법당에 들어섰다. 청법가가 끝나고 단에 오르신 분은여든셋으로는 보이지 않는 꼬장꼬장한 노스님이셨다. "오늘은 내가 `왜 불교를 믿어야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할건데 이 문제에대한 답을 명확히 말하지 않으면 내가 여러분께 빚을 지는 것이고 옳은 답을듣고도 실행하지 못하면 여러분이 빚을 지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나?' 이건 방금전에 여러분이 독송한 반야심경속에 다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우주관이고 인생관이며 `나'는 우주의 축소판입니다. 그러니 모든 우주의이치
그저 착하게만 살아야 한다는 막연함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믿고 따르며 살아왔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의 존재에 대해 깊은 성찰에 잠기곤 했다. 오매불망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야할 진리를 설하시는 스님께 정말 숙연해지는 마음 금할길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는데 불교도 대중속으로 같이 호흡하며 두손모아 기도만 하는 구시대적 불교에서 벗어나 생활 속의 불교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계(戒)˙정(定)˙혜(慧)를 실천할 수 있도록, 8정도를 깊이새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일체의 그릇됨을 막고 악행을 그치게하는 인류공통의 덕목으로 믿고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깨달아야 한다.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알기 시작한 불교진리는 사찰에 나가면서 구체화됐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부터는
나병숙(서울 봉은사 불자)이제 곧 겨울이다. 벌써 내가 야간불교대학에 다닌지도 한학기가 다 되어간다. 슈퍼마켓을 경영하며 짬짬이 틈을 내 다닌 야간불교대학. 힘든 가운데 배우고 익히지만 불교에 대한 신심하나만은 점점 더 뜨거워만간다. 날씨는 추워지지만…. 봉은사에 매주 나가면서 야간불교대학에 다니게 됐다. 항상 허전하고 마음속으로 이를 어떻게 채워볼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었다. 늘 바라고 원했던 일이라 생활은 뒷전에 맡기고 우선 등록부터 했다. 절에서신행생활을 하며 잘 몰랐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깨치는 재미가 여간이 아니었다. 대부분 직장인들로 보이는 같은 불교대학 수강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법사님의 가르침에 진지해지곤 했다. 조금만 늦게가면 자리를 잡기가 힘들었다. 먼저와서는
부처님전에 꽃을 공양한지가 어느 덧 9년째가 되었다.내가 다니는 반야사엔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봄날 긴 빨랫줄에 희다못해 옥빛도는 옥양목 호청에 풀먹인 내음이 있는 듯한 청아한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 도량이다. 나의간절한 작고, 큰 소망의 발원들이 고통과 피, 땀의 능선을 넘으며 희열의세계가 열림을 기도를 통하여 느끼게 되었다. 나의 생일날 `초연실'이라는 `세속을 초월한 모양, 성품을 뛰어넘는' 곧 해탈을 의미하는 빛나고 벅찬 법명을 지어주시며 영원히 어둠을 밝히는 불멸의 마니주가 되라고 하셨다. 나는 소중한 법명을 지니면서 우리들의 산란함을 쉬게하는, 영리한 사랑보다는 지혜로운 사람되기를 발원하며 머물수있는 청정도량을 위해 환희심을 회향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 꽃공양이었다. 멀리 있으나
광덕의 일생은 그대로 빛이었고, 참 진리의 상징이었으며, 세간의 등불이라 할 만했다. 이 땅에 불교의 현대화, 대중화를 구현하고, 생활불교를 정착시키기 위해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했으니, 그가 보여주고 간 삶의 궤적은 곧 한국불교가 나아 가야할 미래의 진로이자 방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가 평생을 바쳐 전개해온 전법 운동은 곧 불교포교를 연구하는 나침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은 1999년 3월 3일 광덕의 입적(入寂)을 맞아 영전(靈前)에 올린 법어를 통해 “(광덕 스님은) 문수(文殊)보살의 지혜요, 보현(普賢)보살의 만행이며, 포교를 잘하니 진리의 등불(法燈)이시며, 계행(戒行)이 엄정하니 승단의 청정한 사표였고, 삼매선정에 들어 지혜가 매우 밝으셨다”
▨삼귀의(노래로 가족 모두) ▨반야심경 봉독(가족 모두.집전 자녀1) ▨5계 수지문 낭독(가족 모두) 우리 가족 모두는 살생을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탐내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삿된 행위를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거짓말이나 나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족 모두는 좋지 않은 음료나 술, 마약을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다. ▨찬불가(가족 모두 `홀로 피는 연꽃'
정도인
Q : 30초반의 미혼 남성입니다.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을 맺는 것과 업을 짓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습니다. 결혼의 인연을 맺는 것도 업을 짓는 일이 아닌지요. A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그물처럼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울가에 굴러다니는 돌 조각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 문득 지나치는 곤충들조차도 다 우리와 무관하지 않지요. 초보 불자라면 이해가 좀 어렵겠지만 이 세상은 이처럼 연기적 세계로 되어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모두 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특별히 더 소중할 것도 더 가벼이 여길 것도 없겠지만, 어디 중생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가요. 굳이 더 소중하고 지중한 인연을 가진 것을 가리게 되는
청소년 시절의 나는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계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가끔씩교회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으나 나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내가 불법을 처음 만난 것은 5∼6년 전의 일이다. 우연히 서점에서 《말과침묵》이라는 법정스님의 수필집을 접하게 되었고 그 때의 감동은 이루 말 할수 없을 만큼 벅차오름이었다. 불교에 대한 잘봇된 인식이 하나하나씩 무너지기시작했고 그 후 많은 불교서적을 찾아 읽으며 불교강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아직은 당당한 불자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을 만큼 배움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사찰에 매일 불성을 드리는 형편도 되지는 못하지만, 늦깍이 학생처럼 떠도는 나그네처럼 혼자서 가고 있지만 지금은 불법을 만날 수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무한히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선응이는 방문 앞으로 달려와 시니임, 하고 무릎을 꿇으며 힘없이 쓰러지더니 쪽마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고 말았다. 두해 전 강아지가 죽었을 때도이런 일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무섭게 달려오지는 않았었다. 백곡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아가, 지금 내가 너와 더불어 강아지 같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건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선응이의 울고 있는 모습을 그저묵묵히 보고 있으려니 선응이가 잠시 후 마루에서 고개를 채 들어올리지도못하고 계속 우는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으로 일주문께를 가리켰다. 거무스름한 아낙 한사람이 보이는데 그 옆에는 조그만 아이가 따르고 그들뒤에는 여러명이 엉켜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백곡은 오랜만에 책상다리를 풀고 일어나 멀리 내다보았다.아낙이 잰 걸음으로 뛰어 오고 있었다. 아이
작은 환경운동부터 실천을 불교계가 지리산살리기댐백지화범불교연대를 결성해 댐 건설로 인한 자연환경과 수행환경 파괴에 적극 대처하고 나섰다. 불교계가 환경문제에 발벗고 나섰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환경문제에 대한 일반 불자들의 인식은 낮은 것 같다. 며칠전 한 도심사찰을 참배할 기회가 있어서 점심을 먹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필자를 놀라게 한 것은 음식을 남기는 불자들의 행태였다. 불교에서는 쌀알 한 톨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톨의 쌀알이 내게 올 때까지 들어간 뭇 생명들의 희생과 농부들의 땀방울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본 불자들은 상당량의 음식물을 남겨 잔반 수거통에 버리고 있었다. 농
자객을 시켜서 서지평을 죽이라고 한 일이 마음에 걸린 한전원, 마음 속으로 "이 스님은 타심통을 했다. 내가 이지웅을 시켜 서지평을 죽이라 한일을 어찌 아는가. 게다가 이지웅은 돌아오지 않고 서지평과 하인마저 소리없이 사라졌을 뿐아니라 각천루는 원인 모를 불로 타고 말았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생각하니 두려움에 온몸이 떨린다 . "스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요""병을 고쳐주면 딸과 서지평을 짝 지어 주겠는가. 후회하지 않겠는가"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진승상의 집에서도 쫓겨난 몸입니다. 두번 다시 두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다. 그런짓을 하다가는 더한 벌을 받을 것이 두렵습니다." 한전원의 다짐을 받은 제전선사, 주머니에서
요즘 강남의 대형교회의 세습문제가 이슈다. 타종교 일이라고 외면하지 말고 교계도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특정 문중이 잘나가는 본사나 관광사찰, 기도사찰 뿐만 아니라 말사까지 독점하고도 모자라 상좌 손상좌에게까지 물려주는 행태가 있다. 며칠 전 모 본사에서 주지로 추대된 이가 바로 그 본사 조실의 상좌 스님이었는데, 이런 류의 사례가 절집 안에 만연하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 때문에 사찰 재정권이 불투명하게 운영되고 사찰민주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인터넷 독자
찬송가 핸드폰음 안될 말 얼마 전 불교계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그 사람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핸드폰 노래 소리가 놀랍게도 타종교의 찬송가였다. 너무 놀라서 그의 종교를 확인해 보았는데 불교였고, 계도 받은 상태였다. 그에게 이유를 물어 보니 많이 들었던 노래고 좋다고 생각해서 선택했다고 했다. 타종교 노래인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다종교 사회에서 다른 종교의 노래에 대해 배타성을 가질 것은 없지만 교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작은 일 하나에도 무심하게 지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무지, 무심함이 내 종교에 대한 손상을 입힐 수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인터넷 독자
얼마전 동아일보에 난 기사를 보았다.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는 기사였다. 대략 8만장을 넘는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교과서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인사의 설명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팔만대장경 목록에 경판의 수가 기록되어있지 않고 분실된 것, 중복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심지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지금에도 분실된 것과 중복된 것을 정확하게 검증하지 않았다고 하니 불자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얼굴이 뜨겁다. 이런 일이 한 개인이 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계 학자들이 협력해서 중복된 것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불교계 뿐만 아니라 문화관광부 등 관련 기관들도 지원을 해야할 것이다. 나우누리 know24
'달마의 제자들’ 시리즈는 연재를 시작하며 밝혔듯이 송광사 서울분원 법련사에서 발행되는 불일회보에 86년부터 88년에 게재되었던 작품입니다. 본지가 이 작품을 10여년 만에 재연재하는 것은 ‘달마의 제자들’ 시리즈가 지니고 있는 높은 대중성 때문입니다. 만화의 내용 중에서 일부 불자님의 눈에는 다소 경박하고 거슬리는 표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고우영 씨 작품의 특성이며 그의 작품이 대중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표현들을 ‘훼불’, 또는 ‘불교폄하’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지난 시대에 활동하던 훌륭한 조사들의 삶을 우리와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만화적 장치’라고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또 훌륭한 불자만화가를 찾아내는 노력은 지금까지처럼 늘 게을리 하지 않
禪만화 ‘달마의 제자들’을 보고 펜을 들었다. 이 만화의 작가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천주교인이다. 나 역시 만화를 그리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종교가 무슨 종교이건 간에 역사상 훌륭했던 분들의 생애나 사상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법보신문의 자세라고 본다. 제2회분에 보면, 벽보에 “나서라! 중 모집!”이라고 씌여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중”은 스님을 폄하하는 단어이다. 제4회분에도 “나는 가엾은 그대들을 도우러 온 예수님 비슷한 사람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제6회분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불교를 폄하하는 내용이나 기독교적 표현은 법보신문에서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여 적절한 불교내용으로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특별기고-통일운동 할 때는 相을 버려야 스님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원주라는 소임을 맡았을 때였다. 어른 스님께서 불러 놓고 “원주라는 소임을 보려면 모름지기 먼저 상(相)을 버리도록 해라”고 당부하셨다. 원주는 대중을 위한 일을 하는 소임인데, 팔지보살의 마음을 가지고서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한 일을 대중 앞에 내세우고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원주 소임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어른 스님의 말씀이었다. 요즘같이 이 상을 버리라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때도 달리 없는 것 같다. 《금강경》에는 ‘일체 상을 떠나야 보살이라 이름한다(離一切相 是名菩薩)’라는 내용이 있다. 도대체가 도를 닦는 스님들이 상을 내는 것을 좋아하여 염치없는 짓을 예사롭게 하기에 한번
왜 인간의 삶에는 늘 종교가 함께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 오직 종교만이 채워 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우리가 반드시 묻게 되는 궁극적인 물음에 대해 오직 종교만이 적극적인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살아가면서 숱한 문제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적 문제는 인간이라면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지요.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희망을 가져도 좋은가 라고 물으면서 언젠가는 고심하고 맙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차례대로 영혼과 육체에 관한 물음, 시간과 공간에 관한 물음, 운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물음 그리고 죽음과 사후에 관한 물음이라고 달리 표현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