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에서부터 1960년 4‧19혁명까지 15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적산(敵産) 불하‧군종장교 제도 도입‧공휴일 지정 및 종교방송 허가’ 등에서 기독교에 특혜를 주고 불교와 천도교 등을 탄압하거나 편향된 종교 정책으로 어려운 상황에 몰아넣으면서 종교 판도 자체를 완전히 왜곡(전체적으로는 왜곡(歪曲), 불교와 천도교‧유교 등에는 왜곡(矮曲))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전 인구의 5%도 안 되던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가 주류 종교의 지위로 올라가고 천도교와 유교는 소수 종교로 내려갔으며 불교는 답보상태에 머물게
앞선 두 차례 글(제19, 20회)에서 다루었듯이 문민정부를 자처했던 김영삼(이하 YS)정권은 5년 동안 불교계와 갈등을 이어갔는데, 이번에는 ‘수배자 해산과 연행’을 이유로 YS정권 시절에 조계사에 두 차례나 공권력을 투입했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1994년 3월말에서 4월 초에 걸친 조계종 개혁불사 과정에서 첨예하게 맞섰던 불교계(조계종)와 YS정권은 몇 달 뒤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노동자들이 조계사를 찾아오고 개혁회의에서 그들의 농성을 허용하면서 다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하다 6월26일
1993년 2월 말 출범한 김영삼(YS) 정권은, ‘3당 야합’의 결과로 탄생했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30여년 만에 맞은 문민정부였다. 그렇기에 선거에서 YS에게 표를 찍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 중에도 새 정권에 기대를 거는 이들이 많았다. 임기 말 IMF구제금융 사태를 맞이하면서 YS정권의 모든 공적이 묻혀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금융실명제와 쓰레기 종량제 실시 등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남긴 점까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3년과 이승만 정권 12년 동안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에만 군종장교 제도를 두어, 군 장교와 젊은 장병들 사이에서 기독교 신자가 빠르게 증가한 현상의 배경과 경과에 대하여는 이미 몇 차례 자세하게 밝혔다.그런데 군 내부의 종교 차별 문제는 그 뒤로도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이 하야하고 30여년이 지나서 기독교 장로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이하에서는 YS) 정권에서는 출범 초기부터 이 문제가 크게 불거지기 시작했다. 1993년 2월 말에 YS 정권이 출범하기 직전인 1월8일
정부가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종교 부지를 분양할 때에 모두 ‘자유경쟁’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분양가를 높게 책정할 뿐 아니라 지원 자격을 까다롭게 하고 있어서, ‘자유경쟁’은 명분에 지나지 않고 실제 현실은 ‘제한경쟁’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노태우 정권 이래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권마다 부동산 가격 안정을 이유로 신도시 개발에 나서면서 이런 일들이 반복되고 그것이 도시 인구 분포에서 특정 종교인 개신교의 우위를 더욱 확대하여 굳어지게 하였다는 점이다.신도시는 단기간 내에 해당 지역의 종교지형과 종교경관을 인위적으로 재편하
한국 사회에서 각 종교, 그중에서도 대형교회와 성당들은 선거 때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1996년에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강남 소망교회가 각기 국회의원 6명을 배출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6명 그리고 소망교회가 당선자 8명을 냈으며,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소망교회가 7명, 서울 서초구 사랑의교회가 5명, 수원 중앙침례교회가 3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이때 수원시 전체 지역구 의원 4명 중 3명이 같은 중앙침례교회에 출석하는 ‘교우
1945년 민족해방 이래, ‘법정 다툼’과 폭력을 동원한 절 뺏기 사태까지 이어지면서 사회여론의 비판을 받아온 비구-취처(娶妻) 사이의 갈등이 1962년 4월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면서 형식상 마무리되었다. 여기까지 이르는 기간에 ‘이승만 3선 개헌 촉구 기도회’ 개최, ‘5‧16군사쿠데타 지지’ 등 양측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서로 집권세력에 접근 경쟁을 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불교계 지도자들이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던 안타까운 상황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권력이 불교계를
‘영원할 것’ 같았던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월 4‧19혁명으로 무너졌다. 1년 뒤에는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물러나고, 군인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를 통제하는 ‘군사독재 시대’를 맞았다. 이런 상황 변화는 그때까지 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개신교인들을 통한 개신교의 정치 참여 전략에 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 첫 번째 배경은 1951년 초부터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에만 특혜를 주며 시행된 ‘군종장교(군목과 군신부) 제도’에 있었다. 5‧16쿠데타
1979년 10월26일 밤, 청와대 인근 궁정동의 중앙정보부(‘중정’으로 약칭) 안가에서 중정 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등이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1961년 5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18년 동안 누려온 권력과 목숨을 한꺼번에 잃은 것이었지만, 국민들 중에는 “이제 유신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며 안도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1979년 12월 이른바 ‘12‧12 사태’, 1980년 5월 계엄확대조치와 광주민주화운동, 이어지는 국가
1960년 3월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학생 시위에서 촉발된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12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거쳐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내각 수반인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나라 안과 밖의 기대와 우려 속에 취임한 장면은 정치 기반이 취약한 데다 성격이 나약하여 어려운 시기를 이끌어갈 지도자감이 아니었다. 이는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를 수습할 엄두도 내지 않고 도망쳐 수녀원에 몸을 숨겼던 것으로도 확인된다.장면은 해방 전 동성상업학교 등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1998년과 1999년 말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진 조계종 분규가 일어난 지 20년이 넘었지만 다행히 그 뒤로는 그와 같은 불상사가 없었다. 물론 그 후에도 조계종 총무원을 둘러싼 갈등이 없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몇 차례 작은 충돌이 벌어진 적이 있었고, 조계종뿐 아니라 여러 종단과 전국의 사찰에서 운영을 둘러싸고 법정 다툼으로 번지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그와 같은 폭력사태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마치 옛날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성(城)을 무너뜨려 빼앗으려는 쪽과 지켜내려는 쪽이 펼치는 치열한 공방전을 보는 듯하였고, 갈등과 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1년 초에 개신교와 가톨릭, 범(凡)기독교계에만 군종제도 시행을 하면서 10여년 사이에 전체 인구,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기독교 인구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던 사실은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그런데 전국의 형무소와 경찰서 유치장 등의 진입은 민족 해방의 기쁨이 다 가라앉기도 전인 1945년 12월부터 가톨릭도 배제한 채 현직 목사에게 전국의 형무소와 소년원의 ‘교무과장’ 직책을 독점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오직 개신교에게만 허락하였다. 그리고 법무부 안에 이 형목 제도를 지원하는 ‘형정과(
어릴 적 고향 마을의 작은 감리교회에 달린 작은 방에 고○○씨(앞으로 ‘그’로 칭함) 가족이 옮겨왔다. 그 뒤 그의 처가 쪽에서 두 가족이 이주해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힘이 세고 입이 무거웠던 그가 ‘당시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내 둘째 형님(1948년생)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버님께 “해방 전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학교 선생을 하다 징집당해 인민군 장교로 복무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그곳에서 알게 된
경기도 광주시와 여주시 경계에 있는 앵자봉의 동쪽 여주 산북면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최초 강학지’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성지로 조성하려 애쓰고 있는 주어사 터가 있다. 서쪽 광주 퇴촌면에는 이미 골짜기를 메워 주요 시설을 세우고 그 입구에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 성지’라고 새긴 집채만 한 돌을 세워놓았으며 2079년 완공을 목표로 1979년에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건립공사를 추진하고 있다.20여년 전 청소년단체 책임을 맡고 있을 때, 경기도립 청소년야영장 수탁 운영자 모집공고가 나와서 수련원 입지 조건을 알아보려고 현지
공화당 정권이 ‘대통령 3선 연임금지 조항’을 풀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한 개헌안을 1969년 9월14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키고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한 지 네 달도 안 된 1970년 2월8일, 조계종 기관지 ‘불교신문’(당시 제호 ‘대한불교’)에 ‘침묵은 범죄다-봉은사가 팔린다’라는 칼럼이 실렸다. “지금 총무원 측이 획책하고 있는 구상대로라면, 봉은사 소유의 임야 및 대지 13만평 중에 그 6분의 5가 팔리고 나머지 6분의 1이 고작 도량으로서 존속될 모양이다.”글쓴이는 당시 봉은사 다래헌에 머물며 경전 번역
며칠 전 친구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다 ‘불교탄압사’ 연재가 화제가 되었다. 한 친구가 “다음 원고는 어떤 내용을 다루게 되느냐?”고 묻기에, “국립공원 지정하면서 사찰 토지를 일방 편입한 문제를 쓰려고 한다”고 했더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그것이 왜 탄압이냐? …”며 의아해 하였다. 물론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자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지만, 그들이 흔쾌히 동의했을 것 같지 않다. 왜? ‘국립공원’에 대해 정부가 만들어 수십 년 동안 퍼뜨려온 왜곡된 정보에 우리 국민 대다수가 익숙해있기 때문이
지난 3월19일 법보신문에 ‘전통사찰도 종부세 부과대상…세금폭탄 우려 확산’에 이어 24일에는 ‘정부, 종부세 부과하려 불교계 기만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번 종합부동산세 파동을 지켜보면서, “근현대불교 탄압사 다음 원고는 이승만 정권 당시의 농지개혁 문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 불교계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상황에 이를 때까지 대처 방식이나 문제가 공론화된 뒤의 대책 등이 수십 년 전의 농지개혁 당시와 거의 닮았다는 아쉬운 마음을 놓기 어려웠기 때문이다.이승만 정권이 출범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1949
지난 2015년 인구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원불교와 천도교는 그 교세가 비슷하다. 그런데 원불교는 ‘불교-개신교-가톨릭’에 이은 제4대 종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정부에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며, 천도교 쪽에서도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있어서 특별한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이 상태가 앞으로 오랜 동안 굳어질 것 같다.그런데 원불교가 언제, 어떻게 해서 ‘4대 종교’의 틀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여러 차례 국장·국민장이 치러졌는데, 2006년 10월 최규하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 이르기까지
“1990년 5월1일, ‘깨치는 소리 나누는 기쁨’을 기치로 내세운 라디오 불교방송(BBS)이 첫 방송을 시작했을 때 수많은 불자들이 감격하였다. 방송국 임직원들의 원력과 의지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외부 출연진들도 정성을 다하였다. 아마 그때 진행자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청취자들이 많을 정도로 방송 개국이 불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고 큰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이병두의 사진으로 보는 불교 82. ‘깨치는 소리 나누는 기쁨’ 불교방송 개국)불교방송(BBS)은 그 뒤로 부산·광주(
한국이 속해 있는 아시아든 유럽·아프리카 등 다른 대륙이든 가릴 것 없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가 특정종교에 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특혜는 ‘국가종교[國敎]’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지위를 얻어낸 종교가 휘둘렀던 권위와 힘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무서운 것은 근대 이전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역사를 돌아보거나 최근 일부 이슬람 국가가 신정(神政)일치 체제를 도입하면서 보여준 모습에서 생생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이웃 중국에서도 2000여년 전부터 ‘유교만을 존중한다’는 독존유술(獨尊儒術)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