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평상시 정치와 종교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지만, 결국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후 체포되어 1898년 6월 2일에 경성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1900년에 3대 교주가 된 손병희(孫秉熙)는 여건이 좋지 않자 10년을 기약하고 외유를 떠나면서 교무를 이용구와 김연국에게 위임했다. 1901년에 손병희는 먼저 청나라로 망명했고, 이름을 이상헌(李祥憲)으로 바꾼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이용구도 손병희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이용구는 귀국 후 동학을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하고 친일파와 함
초기 개신교는 학교, 병원, 교회라는 근대 시설을 기반으로 선교하며 성장을 가속화했다. 나는 1919년 통계를 기준으로 초기 개신교에서 학교, 병원, 헌금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이 통계는 초기 개신교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조선총독부 잡지인 1920년 5월호 ‘조선휘보’와 1920년 7월호 ‘조선’에 실린 학무국 종교과 소속 요시카와 분타로(吉川文太郞)의 “조선의 기독교 각파”라는 글을 참고했다.당시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2년 11월호 ‘조선'에는 “조선 기독교의 장래”라는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1907년 10월 1일에 설립된 평양조합교회의 목사인 다카하시 다카조가 쓴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기독교회, 일본조합교회, 일본메소디스트교회, 일본성공회가 전국 도회지에 교회를 세우고 있었다. 일본인 목사의 시선으로 본 조선 교회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당시에 도청 소재지가 있는 도회지에는 500명 이상 집회할 수 있는 교회당이 반드시 2개 이상 있었고, 경성과 평양에는 10여 개 교회당이 있었다. 많은 교회에 남
조선총독부는 1911년 9월에 시행된 사찰령이 일본불교로부터 조선불교를 보호하고 쇠퇴하는 조선불교를 갱생시킴으로써 조선문화사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근대 한국불교는 처음부터 일본불교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이 자유롭게 된 것도 결국 일본불교의 포교를 위한 것이었다. 1895년에 일련종(日蓮宗)의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요청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기 때문이다.1899년에 조선 정부는 조선 초기에 설립된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처럼 조선불교총무원 역할을 할 수 있
한일병합 후 1911년 6월 3일에 사찰령(寺刹令)이 공포되어 9월 1일부터 시행된다. 사찰령은 1915년 포교규칙보다 먼저 등장한 최초의 종교 관련 법규다. 사찰령 시행으로 종교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의 식민화가 추진되었고, 덤으로 불교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사찰령에 따르면 사찰을 병합, 이전, 폐지하거나 사찰의 위치나 명칭을 변경할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가 필요했다.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는 전법, 포교, 법요 집행, 승려 거주를 제외하고 다른 목적으로 사찰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사찰을 종교적 목적이 아닌 정치적 집회, 유흥, 요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최종 해답을 도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물음은 쉬이 ‘무엇이 종교인가?’라는 물음으로 전환되곤 한다. 이런 식으로 물음 전환이 이루어지고 사회적 해답이 제시되면 우리가 아는 ‘근대 종교’가 탄생한다.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된 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11월 17일에 ‘종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을 공포하고 12월 1일부터 시행하여 신도, 불교, 기타 종교 등 일본종교의 한국 포교에 관한 규정을 만든다.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이 규칙을 한국의 종교로 확대하여
조선총독부가 1927년 3월 31일에 발행한 조사자료 제20집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에는 조선인의 종교의식(宗敎意識)을 소개하는 짧은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불교 14만1000명, 기독교 32만1000명, 천도교 계통의 유사종교 19만9800여 명, 비천도교 계통 유사종교 7317명이라고 각 종교별 신도 수가 적시되어 있다. 이 기록은 1920년 경의 조사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천주교 신도는 8~9만 명 내외였고, 장로회와 감리회 등에 소속한 개신교 신도 수는 20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이
말은 내밀하게 의식에 스며들어 인식을 장악한다.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게다가 다수가 그런 말을 사실처럼 내뱉을 때, 그 말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포승이 되고 감옥이 되어 나를 묶고 감금한다. 나는 한국 근대종교사도 똑같이 말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역사적 사실로 행세하는 많은 언어와 개념이 인식의 전진을 방해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한국종교학계에서는 188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