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왜 이들이 소를 먹지 않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표면적, 혹은 교리상으로는 소가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신인 시바의 탈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들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힌두교 사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시바가 타고 다니는 소인 ‘난디’를 봉안한 사당을 거의 만날 수 있다. 그만큼 소를 존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다른 문화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식량자원인 소를
지난 글에서는 부처님 재세 시절 무렵, 스님들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있었으며, 다만 그 돈의 관리와 지출을 재가자에게 맡겼다고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맡은 재가자는 스님들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을까? 이것을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율장에 보인다.우리말 경전에서 주로 녹자모(鹿子母)로 등장하는 므리가라마따(Mrgaramata)의 원래 이름은 위사카(Visakha)이다. 마가다국 사람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예류과를 얻을 정도로 현명한 여인이었으며, 이후에 ‘녹자모강당’이라고 불린 정사를 교단에 기증한 부자이기도 했다. 그녀
우리는 부처님 시절 승려들이 단지 발우와 가사, 물병, 지팡이 등 생활과 수행에 필요한 필수품만 소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율장인 ‘설일체유부비나야’ 등을 살펴보면 사실상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설일체유부비나야’는 부처님 입멸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의 교단 상황을 반영한 것이므로, 부처님 당시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본개념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예를 들어 부처님은 누군가 승려에게 많은 것을 기부할 때 그것이 너무 많다고 굳이 거절하라고 가르치지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회사가 파는 물건의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복음을 전파하고 그에 대해 일종의 보상을 받는 것인데 그 기준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교회는 수익의 10%를 헌금으로 내는 십일조를 권장하고 있다. 불교도 보시를 권장하지만 그 금액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지식을 파는 자들이라며 비판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셀 에나프의 ‘진리의 가격’(눌민, 2018)에 의하면 그
스님들의 발우(鉢盂, pātra)는 단순한 밥그릇이 아니라 수행의 상징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렇게까지 밥그릇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불교는 유독 밥그릇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우선 발우에는 공양받은 음식을 담는데, 공양에는 크게 세 가지 경우가 있었다. 하나는 걸식이다. 마을에 가서 구걸하는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다. 두 번째는 초대를 받아서 가는 경우이다. 초대하는 주체가 정해져 있고, 약속시간에 그 사람의 집에 가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스님 입장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다. 초청자는 공덕을 쌓기 위한 목적
지난 2018년부터는 종교인도 과세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에 대해 찬반양론이 만만찮게 거론됐었다. 과거에 종교인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다른 종교는 모르겠으나 불교의 경우는 원칙적으로 스님은 무소유였기 때문에 낼 세금이 없다는 논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교단에서는 승려들의 가사와 발우가 유일한 소유물이었다. 비록 현대사회에서는 스님들이 아무리 무소유라 해도 이렇게 살 수는 없기에 사유재산을 어느 정도 가질 수밖에 없지만,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종교인으로서 세속과 단절되어 최소한만을 가지고 산다는 것에 대한 상징성
경제의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의식주의 문제이며, 과거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먹는 것의 문제가 가장 핵심이었다. 불교교단의 경영에 있어서도 우선 중요한 문제는 먹는 문제였다. 불교경영의 이해도 이 먹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몸을 그저 빨리 벗어버려야 하는 짐처럼 인식하면서도, 애써 탁발하며 유지해야 하는 당위성을 여러모로 설명하고 있다.불교에서는 밥을 먹는 것을 ‘공양한다’고 하는데, 공양하기 전에는 공양게를 읊는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에 불교에서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인식이 잘 압축되어 있다. 공양
동양의 종교 중에서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있어서 불교가 단연 선구적이었다. 불교도 처음에는 스투파(불탑) 외에는 별다른 물질문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점차 불상 같은 시각물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물질문화의 생산에는 많은 돈이 들기 마련이니, 자연스레 그 바탕에는 불교 특유의 경영관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참선을 중시하고 무소유를 강조하는 불교가 왜 이렇게 물질문화 생산에 적극적이었을까? 불교경영에 대한 물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선 ‘불교경영’이라고 하면 불교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