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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불교사 산증인 태공당 월주 대종사 입적

  • 교계
  • 입력 2021.07.22 10:03
  • 수정 2021.07.22 16:38
  • 호수 1595
  • 댓글 5

7월22일 오전 9시45분 금산사서…세납 87·법랍 68년
17·28대 총무원장 역임…10·27법난 등 숱한 역경 겪어
‘나눔의집’‘지구촌공생회’ 설립…불교 대사회화 이끌어
MBC PD수첩 악의적 보도·경기도 편파행정에 큰 상심
조계종, 7월26일 김제 금산사서 ‘영결·다비식’ 종단장

태공당 월주 대종사. 조계종 총무원 제공.
태공당 월주 대종사. 조계종 총무원 제공.

조계종 17·28대 총무원장을 역임하는 등 현대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원로의원 태공당 월주 대종사가 7월22일 오전 9시45분 김제 금산사 만월당에서 입적했다. 세납 87세, 법랍 68년.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스님은 현대한국불교사의 산증인으로 꼽혔다. 불교정화운동을 비롯해 10·27법난, 94·98년 종단사태 등 현대조계종사의 큰 획을 긋는 사건 때마다 스님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탁월한 리더십과 종무경력, 개혁적인 이미지로 종단안정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찬사도 있었지만, 시련 또한 적지 않았다.

스님은 1953년 서울 조계사에서 초등학교 동창 혜정 스님(전 총무원장, 2011년 입적)의 모습에 큰 감화를 받아 출가를 결심했다. 이듬해 3월 법주사에서 금오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고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스님이 출가했을 무렵, 불교계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불교정화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사찰마다 비구․취처승 간의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다. 스님 역시 은사 금오 스님을 따라 불교정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찰에서 소임을 맡아 은사스님을 도왔다.

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임명된 1961년은 비구․취처승의 갈등이 정점에 달할 때였다. 금산사는 130여 말사를 관할하는 교구본사였지만, 당시 취처승 측이 장악하고 있었다. 비구 측 총무원은 월주 스님에게 금산사를 정화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스님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고, 법정공방이 이어지는 등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금산사를 정화하기까지는 3개월이 소요됐다. 금산사를 비구승 사찰로 만든 스님은 이때부터 13년간 주지를 맡아 교구본사로서의 사격을 키워나갔다. 말사들도 정화해 하나둘 제 모습을 찾도록 했다.

스님은 1966년 조계종 제2대 중앙종회원으로 피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종단의 전면에 나섰다. 행정에 밝은 데다 뛰어난 언변으로 은사뻘 되는 스님들이 즐비한 중앙종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런 능력은 30대의 나이에 총무원 교무부장과 총무부장에 발탁되는 배경이 됐다.

1970년대 후반 종정중심제 논란으로 조계종이 조계사·개운사 총무원으로 갈리는 분규사태가 발생하자, 1978년 5대 중앙종회의장을 맡아 양측의 갈등을 봉합하고 통합을 이끌어냈다. 이런 노력으로 스님은 1980년 4월26일 조계종 17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총무원장에 당선된 스님은 ‘불교자주화’를 외치며 전통사찰을 옥죄던 ‘불교재산관리법’을 비롯한 각종 불교규제법령의 철폐를 요구하면서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특히 스님은 총무원장 취임 이후 20여일 만에 ‘광주 5·18민주화 운동’이 발발하자 5월24일 ‘소요사태 진상조사선무단’을 현지로 급파한 데 이어 6월3일 직접 광주를 방문했다. 당시 종교계 대표가 광주지역을 찾은 것은 월주 스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파격적인 행보는 얼마되지 않아 큰 시련을 맞는 빌미가 됐다. 월주 스님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신군부는 그해 10월27일 작전명 ‘45계획’에 따라 군홧발로 전국 사찰을 난입해 스님과 일반인 등을 강제로 연행하는 ‘10·27법난’을 자행했다. 스님도 계엄군에 연행돼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23일여간 숱한 고문과 치욕스런 조사를 받았고, 총무원장 사직서를 내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신군부의 강압으로 7개월여 만에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스님은 이후 3여년 간 미국, 유럽, 인도, 스리랑카, 대만 등을 순례했다. 해외에서의 삶은 스님이 한국불교의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불교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행전통은 계승하되, 산중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아픔을 나눠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해외순례를 마치고 귀국한 스님은 이후 대사회활동에 집중했다. 1988년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0년 공명선거실천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 1992년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장을 맡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이는 스님의 사회적 인지도를 높였으며, 불교계의 사회참여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스님이 종단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94년이었다. 이 무렵 조계종은 의현 스님의 총무원장 3선 연임문제로 큰 논란이 일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비롯한 8개 승가단체가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원회(범종추)’를 구성해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여기에 종단 원로스님들을 비롯해 재가단체들까지 가세하면서 의현 스님은 4월13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면서 조계종 개혁회의가 출범했다. 월주 스님도 총무원과 중앙종회 기능을 대신한 개혁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 개혁회의는 종헌종법을 제개정하면서 종단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총무원장도 중앙종회의원과 24개 교구본사에서 선출된 선거인단을 합쳐 총 321명의 투표를 통해 선출하도록 했다.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월주 스님은 1994년 11월21일 총무원장 선거에서 28대 총무원장에 선출됐다. 1980년 10․27법난으로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지 14년만이었다.

총무원장에 당선된 스님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역점 과제로 내세우며 노동, 인권, 복지, 환경, 통일사업에 뛰어들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집’을 설립했고, 사회복지재단을 만들어 복지사업에도 앞장섰다. 1998년 ‘3선논란’으로 퇴임하기까지 월주 스님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의 대사회적 행보는 불교 이미지를 개선하는 토대가 됐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월주 스님은 이후에도 대사회적활동을 이어갔다. 나눔의집 이사장을 맡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아픔을 달랬으며, 2003년 해외구호 단체인 지구촌공생회를 설립해 동남아 극빈층 지원에 앞장섰다. 또 1998년 IMF 외환위기로 실업대란과 경제불황이 이어지자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과 더불어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를 설립해 공동위원장을 맡아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위로했고, 이 단체가 2003년 ‘함께일하는재단’으로 재출범한 뒤 이사장을 맡아우리 사회의 실업문제에 대해 적극 대응해 왔다. 이런 공로로 200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고, 2005년 조계종 포교대상, 2010년 캄보디아 국왕 훈장,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2년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7년 조계종 원로의원에 추대된 뒤 구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스님은 지난해 나눔의집을 둘러싼 MBC PD수첩의 잇따른 악의적 보도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중심으로 한 경기도의 편파행정에 크게 안타까워했고, 이로 인해 건강도 급격히 악화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스님은 MBC와 경기도 측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7월22일 오전 김제 금산사에서 “하늘과 땅이 본래 크게 비어있으니/일체가 또한 부처이구나./오직 내가 살아왔던 모든 생애가/바로 임종게가 아닌가./할! (天地本太空, 一切亦如來, 唯我全生涯, 卽是臨終偈, 喝!)”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홀연히 삶을 마감했다.

한편 태공당 월주대종사 빈소는 금산사 처영기념관에 마련됐으며 스님의 영결 및 다비식은 7월26일 오전 종단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분향소는 조계사, 봉은사, 보문사, 도선사, 영화사, 진관사,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 나눔의집 3층 법당에 마련됐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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