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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 떠나보내는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

  • 교계
  • 입력 2021.07.26 19:39
  • 수정 2021.07.27 14:31
  • 호수 1596
  • 댓글 2

“스승 보내드리는 이 비통함, 가눌 길이 없습니다”

분향소서 조문객들 맞아…눈시울 자주 젖기도
은사스님 가르침 좇아 사회활동도 적극 참여

“오늘 저의 은사이자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신 태공당 월주 대종사를 적요의 세계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50여 성상을 넘게 보아온 모악산의 산자락은 오늘 왜 이리도 처연하고 적막할 뿐입니까? 출가사문으로 생리와 별리의 경계는 마땅히 넘어서야 하겠지만 스승을 보내드려야 하는 이 비통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7월26일 김제 금산사 처영당에서 열린 태공당 월주 대종사 영결식.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상황이었기에 모두들 거리두기와 마스크까지 착용했지만 비통함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도 며칠 새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현 총무원장이기에 그동안 여러 차례 종단의 어른스님들 영결식에 참석했지만 은사인 월주 스님의 영결식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총무원장으로서 상좌로서 영결사를 읽어나가는 스님의 목소리에는 깊은 회한과 아픔이 묻어났다.

월주 스님은 상좌들에게 엄격하고도 자비로운 스승이었다. 어떻게 출가자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출가자의 사표이기도 했다. 1953년생으로 전북 김제 만경읍 대동리가 고향인 원행 스님은 만경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21세 때인 1973년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50여년간 곁에서 지켜본 월주 스님은 자비로우면서도 원칙에 어긋나는 일에 있어서는 결코 물러섬이 없었다. 그 기개와 꼿꼿함으로 금산사의 정화와 중창불사를 이끌었으며, 종단의 대소 소임을 맡을 때도 예외가 없었다.

월주 스님은 1980년 4월 제17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취임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그해 10·27법난이 일어나면서 총무원장에서 강제로 물러났다. 당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지지한다는 선언을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5·18광주민주항쟁 때 종교인으로서 가장 먼저 광주를 찾아 피해자를 위로했던 것도 익히 알려져 있다. 10·27법난 때 보안사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풀려난 뒤 부득이 한국을 떠나야 했었다. 원행 스님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가슴 아파한 상좌 중 한 명이었다.

2011년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 금산사초등학교 준공식에 참석한 월주 스님과 원행 스님. 지구촌공생회 제공.
2011년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 금산사초등학교 준공식에 참석한 월주 스님과 원행 스님. 지구촌공생회 제공.
2014년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 금산사초등학교 증축 준공식에서 월주 스님과 원행 스님.
2014년 캄보디아 뜨라빼양 뜨라우 금산사초등학교 증축 준공식에서 월주 스님과 원행 스님. 지구촌공생회 제공.

1994년 11월 제28대 총무원장에 선출돼 종단의 기틀을 새롭게 정립한 스님은 퇴임 후 ‘깨달음의 사회화’에 더욱 주력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월주 스님은 고통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월주 스님이 그토록 열정을 쏟았던 나눔의집과 지구촌공생회가 그것이었다.

원행 스님은 “항상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월주 스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 원행 스님이 2005년 나눔의집 원장과 지구촌공생회 상임이사 등을 맡고 스님의 뜻을 좇아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돕고자 노력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원행 스님에게나 불자들에게, 그리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월주 스님은 이 시대의 진정한 보현보살이었다.

지난해 5월 나눔의집을 둘러싼 MBC PD수첩의 악의적인 보도를 기점으로 근거 없는 언론들의 비난 기사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원행 스님은 이를 막아보고자 무던히 애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행 스님은 당시 한 일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간곡히 당부했다.

“정부 지원 하나 없던 1992년에 월주 스님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터전을 서울 마포 서교동에 마련했어요. 이후 명륜동, 혜화동을 거쳐서 현재 자리에 자리를 잡고 29년 동안 헌신했어요.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잡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경기도가 PD수첩과 일부 제보자들의 입장만 옹호하는 편파행정을 이어가면서 나눔의집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칙과 명예를 중시하던 월주 스님의 건강도 하루가 다르게 크게 악화됐고, 이를 지켜보는 원행 스님 등 상좌들의 마음도 시꺼멓게 타들어갔다. 원행 스님은 월주 스님의 상태가 극히 악화되자 모든 종단 업무를 중단한 채 곧바로 금산사로 내려왔다. 그리고 월주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비통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원행 스님은 5일간의 장례기간 내내 분향소를 지키며 장례 절차를 살피고 조문객들을 정성껏 맞았다. 불교계 중진스님들뿐 아니라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을 맞이하는 것도 원행 스님의 몫이었다. 특히 이재명 경기지사의 조문을 두고 상좌들과 신도들 사이에서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국 조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때 원행 스님은 분향소 참배를 마친 이 지사와 30여 분간 대화를 나눴다. “월주 대종사께서 살아계실 때 찾아뵙고 사과를 드릴 시기를 찾고 있었는데 입적하셔서 안타깝다” “나눔의집도 최대한 빨리 매듭을 지어서 큰스님의 유지를 잘 받들겠다” 등 이 지사의 뜻을 알려 대중들의 아픔과 분노를 달래려 했다.

원행 스님은 장례기간 중 눈시울이 자주 젖었다. 일평생 종단의 혁신과 발전을 위해 정진했던 ‘종문의 사표’였던 은사스님이 갑작스레 떠났기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더욱 깊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원행 스님은 다비식에 앞서 과거에도 앞으로도 잊지 못할 은사 월주 스님을 향해 이렇게 절절히 사뢰었다.

“홍대(鴻大)한 스승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위대한 스승의 자취를 기어코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사무치게 그리운 존사(尊師)의 존호(尊號)를 다시 불러봅니다. 태공당 월주 대종사이시여! 속환사바(速還娑婆)하소서!”

신용훈 호남주재기자 boori13@beopbo.com

[1595호 / 2021년 7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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