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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색한 변명 일관한 청와대·문화재청

기자명 법보
  • 사설
  • 입력 2022.04.08 21:13
  • 수정 2022.04.09 09:26
  • 호수 1628
  • 댓글 17

불사 기다리며 묵묵히 버텨 온
연화문 초석을 버려진 돌 취급
폐허의 성당 십자가에 앉는가?
진정 담은 사과 한마디 없어

문재인 대통령과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법흥사터의 연화문 초석을 깔고 앉았다. 서울 종로구 청와대 뒤편 북악산 전면 개방을 기념한 산행에서 이 같은 사달이 난 것이다. 그것도 김현모 문화재청장으로부터 법흥사터의 역사와 발굴 가치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자리였다.

“초석은 지정 또는 등록문화재가 아니다”라며 별문제 아니라는 식의 문화재청 답변은 궁색한 변명도 되지 못한다. ‘지정이냐? 비지정이냐?’는 단순 이분법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이 판가름 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청와대·문화재청의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꽃과 연꽃무늬(연화문)가 불교를 상징한다는 건 상식이다. 일주문을 비롯한 다양한 전각의 기둥이나 천정에 예외 없이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심지어 경내로 들어서는 교각이나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에서도 볼 수 있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지만 오염되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법흥사터는 아픔이 서린 사지이다. 신라 진평왕 시기 창건된 사찰로 알려진 법흥사는 세월의 무게에 점점 무너져 내렸다. 1965년 청오 스님이 한 차례 증축했으나 1968년 ‘김신조 침투’ 사건으로 일반인 출입이 전면 금지되며 폐허가 됐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초석 17기와 와편들이다. 

현장 조사에 나섰던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이후 사찰 복원을 위해 옮겨온 초석일 것”이라고 한다. 중창을 시도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면서 남겨진 유물이다. 처염상정의 뜻을 품은 채 어느 전각의 기둥을 떠받치려 기나긴 세월을 묵묵히 기다려온 초석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기 혹시 앉아도 되느냐?”고 김현모 문화재청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 스스로 내심 염려했었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앉아도 되는지’를 확인할 게 아니라 함부로 앉으려 했던 마음을 거둬들여야 했다. 

MBN 인터뷰에서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발언하고 있다. [MBN 뉴스와이드 캡처]
MBN 인터뷰에서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발언하고 있다. [MBN 뉴스와이드 캡처]

주지하다시피 문 대통령 부부는 로마 교황청에서의 미사 생중계를 허락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는 서울 근교 폐허 성당의 마당에 떨어진 십자가 위에 앉을 수 있는가? 전주 전동성당이나 서울 명동성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회의 십자가이니 괜찮은가 말이다. 불교중앙박물관장 탄탄 스님이 “대통령 부부도 독실한 신앙인으로 아는데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물이라도 이렇게 대했을까 싶다”고 토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해서도 청와대와 문화재청의 현명한 참회·사과가 있었다면 이 문제는 ‘찻잔 속 폭풍’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문 대통령 내외가 착석하신 법흥사터(추정) 초석은 지정 또는 등록문화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지정 문화재만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듯한 문화재청의 답변에 아연실색하다. 대통령의 부적절한 언행을 무조건 덮고 보려는 의도가 아닌가 말이다. 혹여라도 지정 문화재에만 얽매이는 문화재청이라면 영문 명칭도 2004년 이후 문화유산을 의미하는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에서 문화재를 뜻하는 ‘Cultural Property Administration’으로 다시 바꾸기를 권한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또한 “언론과 불교계에서는 오래된 종교·역사적 의미가 있는 초석에 앉으신 것으로 잘못 오해 하실 수가 있다”고 했다. 더욱이 박 수석은 “버려져 있던 그냥 그런 돌”이라고 했다. 성보와 문화재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전각 조성에 쓰이는 연화문과 길가의 돌도 구별 못한단 말인가. 아니면 문화재급의 유물은 아니니 ‘이젠 더 이상 토 달지 말라’는 것인가? 김현모 문화재청과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 없이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조계종의 “문화재청장과 국민소통수석 즉각 사퇴” 요구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54년 만의 북악산 시민 환원을 기념하며 오른 문 대통령의 산행은 청와대 측의 설명대로 “새로 개방된 남측 등산로 곳곳에 있는 문화유적들을 알리기 위한 행사”이기도 했다. 북악산 일대가 문화유산으로 가꿔지기를 희망한 것인데 그것은 비지정 문화재도 소중히 다루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1628호 / 2022년 4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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