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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선원 인도순례] “나만 생각해요, 그래야 43일 동안 원만히 순례 마칩니다”

순례대중 향한 자승 스님 당부 전문

나만 생각하라는 건 이기심이 아닌 자기 성찰
내가 불편하고 화가 나면 옆의 도반도 불편
100여명 이동엔 엄청난 인내와 배려심 필요
20년 후면 한국불교도 인도처럼 유적화 될 것
43일간 걸으면서 한국불교 중흥 불씨 심어야

대구 동화사에서 봉은사까지 21일을 걸으면서 입재와 회향식 때까지 제가 대중들한테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또 삼보사찰을 순례할 때 입재와 해제할 때까지 대중들을 위해서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평화 방생을 하면서도 우리 사부대중에게 단 한마디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인도순례는 좀 더 시작의 마음가짐이 더 필요하지 않나 이런 생각 때문에 마이크를 잡고 대중들에게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순례는 언제 시작된 것 같습니까? 순례가 시작됐습니까? 아니면 순례가 시작될 예정입니까? 우리 순례는 9일 새벽 6시에 종정스님을 증명으로 해서 고불문을 올릴 때 순례는 시작됐고, 순례 전에 우리 대변인인 종호 스님께서 청규에 대해서도 말씀을 이렇게 올렸습니다. 근데 그때 청규 이야기할 때 들었던 생각들이 비행기 타면서 다 잊은 듯해서 제가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고, 오늘은 시작 전에 몇 가지 인사를 좀 시키겠습니다.

우리 여기 빨간 옷 입은 수행복 이거 삼조 스님이 보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만행 가사도 삼조 스님이 보시를 했습니다. 불가는 대중공양으로 시작해서 대중공양으로 끝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이렇게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여기 오면서 어떤 여행보다 회비를 많이 내고 왔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기 위해서 여행사에다가 회비를 내면 우리는 가이드한테 과정 과정 불만과 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부족한 것들이 많고 이런 것들을 불만을 삼기 시작하면 우리가 순례의 길을 택한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음식이 마음에 드니, 숙소가 마음에 드니, 왜 이렇게 기다려야 되니, 이런 것들을 불만을 가지려고 했으면 순례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회비를 내고 순례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우리는 수행입니다. 비행기 타기 전에 장시간 기다려서 앉아 있는 것도 순례의 과정이고, 또 숙소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것을 이겨내는 것도 순례의 과정이고. 이런 어려운 과정 과정 하나들을 불만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이 43일의 순례를 절대 해 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순례란 한두 명이 아닌 100여명이 움직이는 데는 엄청난 인내와 배려심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만행을 혼자 하지 말라 했어요. 그리고 둘이도 하지 말라 했습니다. 혼자 가면 마음대로 해, 둘이 가면 의견일치가 잘 돼, 셋이 가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는 견제하는 사람이 생겨서 만행은 세 사람이 하라고 그랬어요. 또 세 사람 이상이 가면 무엇이 생겨? 파당이 생겨요. 끼리끼리 모여서 누구를 비방하고 험담해서 그 만행 자체가 순례 자체에 어려움을 주게 돼.

그래서 우리가 순례를 하려고 하는 순간은 다 내려놔야돼요. 우리가 여기 순례 오기 위해 3년을 부단히 노력했어요. 첫해에 오려고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서 그 대신 511km를 21일간 길에서 자고 걷고 먹고 하면서 아무 사고 없이. 삼보사찰 또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어려움을 잘 이겨냈고, 지난해에도 마음방생을 통해서 어려움을 잘 해왔어요.

그러나 이 43일의 인도 성지순례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있기 때문에 나만 생각해야 돼요. 나만 생각한다는 것이 내 이기심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불편하면 내 옆에 도반도 불편하고. 내가 화가 나면 내 옆에 사람도 화가 납니다. 이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화난다고 해서 그 화를 상대에게 푼다든가. 내가 짜증 난다고 해서 주위 사람에게 짜증을 낸다든가, 여기는 짜증 받아주려고 온 사람도 없고 누가 화내는 걸 받아주려고 온 사람도 없어요. 3년 동안 오로지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면서 본인들이 갖고자 원하고자 하는 것들을 순례하면서 성취하고자 이런 뜻으로 온 이 많은 대중이 누구 한 사람의 화풀이 대상이 돼서도 안 되고, 누구 한 사람의 웃음거리가 돼서도 안 되고, 그래서 이번 순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배려뿐입니다.

여기 스님네들이 법문할 때 많이 신도들한테 해준 얘기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 신도님들도 스님들한테 많이 들은 법문이 있을 거예요. ‘신심명’에 나오는 지도무난(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유혐간택(唯嫌揀擇), 다만 가려서 선택하지만 말라. 도를 이루는 것이 쉬운 일이야, 아주 지극히 쉬운 일이라 그랬어요. 우리가 도를 깨쳤다는 사람을 근래 들어보지 못했어요.

근데 그 도를 깨치는 게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유혐간택처럼 좋다 슬프다 나쁘다 이런 분별심만 내지 않으면 다 깨친다고 그래요, 우리 스님네들이 수없이 한 얘기들이야. 그리고 오래된 신도님들은 스님들 법문을 통해서 늘 들어왔던 이야기고.

우리가 도를 통하기 위해 수많은 납자들이 결제 때 2000명씩 앉아서 정진을 하지만, 도를 깨쳤다고 법문하고 나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그것은 뭐 때문이야 ‘신심명’에서 말하자면 유혐간택을 못해서 그래요. 늘 시시비비 가리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이런 걸 따지다 보니 도를 이룬 사람이 없어요.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5비구에게 법을 말하셨을 때 (5비구가) 깨달았어요.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은 것하고, 5비구가 깨달은 것하고는 전혀 같을 수가 없어요.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지혜를 깨달은 것이고,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이치를 깨달은 거야. 부처님의 수많은 제자들이 아라한이 됐어. 깨달음을 얻었어. 부처님의 똑같은 지혜를 깨달은 게 아니야. 이치를 깨달은 거예요. 아라한과.

근데 우리는 해방 이후 종단이 성립되고 하안거 동안거에 많은 수좌들이 2000명씩 앉아서 정진을 하고 하지만 깨달았다 하는 이들이 없어요. 그것도 단순한 부처님의 큰 지혜가 아닌 이치를 못 깨달았어요.

그러나 이치는 간단한 거 아니에요? 이치라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이란 자체를 어렵게 생각해서, 깨달아도 깨달았는지 모르고. 부처님처럼 깨달았다 하는 것은 신통방통 재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세상 이치를 아는 거예요. 세 살 어린이가 칼로 가지고 놀면 베일까 걱정하고, 물가에서는 물에 빠질까 걱정하고, 불 곁에 있으면 불에 델까 걱정하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치를 안 사람이야. 우리는 그 이치를 모르고 있는 거야. 세 살짜리 칼도 베일 위험이 있잖아. 그건 당연한 거야. 우리 수행자들이 다른 건 몰라도 그냥 세상 이치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야. 그것이 아라한과야.

그러나 그 이상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대지혜야. 부처님의 세계야. 부처님의 세계를 가려면 다생겁래로 수없이 나고 죽고 수없이 깨달음을 얻어서 대지혜를 얻을 때까지는 우리가 열심히 정진하면 이치는 알 수 있습니다.

근데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누구의 잘못이야? 그것은 우리들의 잘못이고, 또 우리가 이 자리에 와 있지만 이 자리가 마치 기독교 하나님의 자리라 했다면 이 자리가 유적지만 남아 있을까. 우리가 돌아볼 8대 성지 곳곳은 유적만 있어요 유적지.

그러면 17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는 20년 전후로 이와 같이 유적지화 될 수 있다. 왜? 출가자가 줄어들고 스님들이 점점 없잖아요. 신도가 줄어들고. 여기에 유적지만 왜 있겠어? 인도에 스님네들이 없었고 신도가 없어지고 힌두교가 되었어.

그리고 한국불교도 스님네들이 줄어들고 신도가 줄어들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문화재로 보기 좋게 보존만 되는 거예요. 여기는 보존 자체도 안 돼 있지만, 한국불교는 20년 이후에 문화재로서 보존 가치만 있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조계종 스님들 몇 명만 있으면 인간문화재로 지정 받아야 돼. 그것이 먼 훗날도 아니고 20년 전후에 올 우리들의 현 모습인 것을 우리들이 읽고, 이 순례를 통해서 20년 후를 우리가 극복하자는 취지로 순례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늘 공석 사석에서 “포교만이 우리 종단이 살길이다”, 이렇게 말씀드려왔고. 개개인이 일대일로 만나서 하는 포교도 있지만, 이 많은 대중이 43일을 걸으면서 BTN, BBS 매일 뉴스를 방송을 통해서 보내고 그거를 보는 불자들이 신심을 내고 신심 낸 불자가 내 이웃,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을 부처님께 인연 맺어주게 해주는 역할을 우리가 43일을 걸으면서 한국불교 중흥에 조금이나마 새로운 불씨를 심자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도님들, 스님들 개개인의 수행방법으로 43일 동안 세운 원을, 정진원력을 각자 방법으로 쉼 없이 진정한 마음으로 43일을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하나는 이 43일을 우리가 원만히 해결하는 데는 개인 생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순례팀에 대한 배려만이 우리 순례를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10년 전에 법주사 주지를 한 노현 스님도 와 있고, 은해사 주지 덕조 스님도 와 있고, 또 여기 동국대 부총장이신 종호 스님도 와 있고, 여기 또 종회의원 각 분과위원장 스님들, 각 큰 절 주지들 다 자기 세계에서 앉아서 편안하게 신도 대접받아가면서 살만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고, 또 신도님들도 나름의 분야에서 각자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이 함께해서 그것을 여기서도 똑같이 하려고 하면 갈등밖에 없습니다.

여기는 자승이도 없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순례하면서 똑같이 걸었었고, 똑같이 먹었었고, 똑같이 잤었고…. 우리 순례의 기본은 차별이 없어요. 조별로 먼저 들어가면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공양 배분했고, 내가 늦게 들어왔다 해서 빨리 온 사람이라도 앞당겨 줄 서서 밥 먹은 적 없고, 줄 서서 똑같이 가서 먹었고, 이 순례의 기본은 다 차별이 없어요.

청규와 질서를 지키고 그 다음에 배려심. 우리에게 배려심이 없으면 이 순례를 원만하기 힘듭니다. 양보하고, 신발 신을 때 신발이 멀리 있으면 갖다 이렇게 (건네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가 뭐 하나 힘들어 무거운 걸 들을 듯하면 옆에서 빨리 들어주고. 이 사소한 배려가 43일의 순례를 원만하게 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차별 없이 배려심으로 43일 동안 원만히 순례를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하겠습니다. 또 이러한 문제로 제가 대중을 앉혀놓고 잔소리를 두 번 다시 하지 않도록 배려심으로 서로 함께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1669호 / 2023년 2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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