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200㎞에 달하는 길을 오체투지로 순례하며 사람과 생명, 평화의 길을 찾자고 호소했다.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려 있는 생태·욕망·공멸의 위기는 그만큼이나 절박하다. 21세기, 우리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현재 세계 인류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 소외와 갈등의 심화와 보편화, 공동체의 파괴, 억압과 폭력의 구조화, 인간성의 상실과 이성의 도구화, 신자유주의식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와 시장 전체주의의 내면화 등의 위기를 맞고 있다. 21세기에 인류가 맞은 위기에 대한 예술적 대안은 생태, 욕망의 자발적 절제와 마음 닦기, 공존공영으로 모아지고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2007년 연례보고서는 급박하게 지구 온난
일상이 바로 도이듯 대중예술의 일상성과 통속성 속에도 진리는 숨어있다. 사진은 영화 ‘달마야놀자’의 한 장면. 불교 설화는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 주는 방편이고, 영화 『달마야 놀자』는 스님과 조폭을 소재로 한 저질 영상물인가. 선시는 깨달음의 경지를 시의 형식으로 압축한 예술작품이고, 김국환의 ‘타타타’는 저자거리에서 유행한 3류 대중가요인가. 대중예술과 문화가 일상이 된 시대이니 보수적인 불자들도 후자를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이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강원에서 경전 대신 『달마야 놀자』를 교재로 선택하고, 선정할 때 공안 대신 ‘타타타’를 떠올리라 한다면? 아마 진보적인 불자들도 주저하리라. 산업사회가 되어 대중이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면서, 중세 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국보 83호 미륵반가사유상. 법열이란 법을 듣거나 생각하거나 행하였을 때, 진리를 체득하는 그 순간에 누리는 위없는 기쁨을 뜻한다. 108배를 하다가, 기도하다가, 불상을 보다가, 경전을 읽다가, 화두에 몰입하다가, 선정을 하다가 삼매의 경지를 든 자는 안다. 법열의 순간 느끼는 환희심을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음을. 그때도 그랬다. ‘한국 미술 5천년전’으로 기억한다. 아마, 청년기에 미륵반가사유상과 석굴암 본존불을 대하였을 때 느꼈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필자를 불교미학의 길로 빠져들게 한 것 같다. 그때 거기 미륵반가사유상(국보 83호)이 있었다. 반가부좌를 한 채 깊은 사유에 잠겨 있었다. 오른 팔로 턱을 괸 채 오른 쪽 다리를 왼 무릎 위에 걸치
예술 작품의 가치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견해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생산된다. 우리는 흔히 예술작품의 감상을 작가의 의도를 찾는 작업으로 착각한다. 예술작품이란 남보다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감수성, 천재적인 창조력을 지닌 작가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특별한 형식에 담아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우리는 한 편의 시나 미술작품을 대하면, 먼저 그를 창조한 작가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그를 직접 들을 수 없으면, 그에 관한 전기나 그가 남긴 자료들을 뒤져 작가를 종합한다. 작가가 그 작품에 대해 직접 평하거나 남긴 메모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오랜 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물소리 퐁당(古池や蛙飛びむ水の音) 우리는 보통 위의 하이쿠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작가
‘천수대비가’는 눈 먼 자식을 위해 천수관세음 앞에 엎드린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 그 자체로 진정성을 낳고 있다. 사진은 여동완 작가의 작품집 ‘Into Tibet’중에서. 라깡의 말대로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우리는 남보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연봉, 더 강한 권력, 더 즐거운 향락을 꿈꾼다. 그럼에도 세상엔 왜 살 만한 틈이 보이고, 선한 인간이 빚어내는 선행으로 우리는 오랜 동안 감동에 젖을 수 있을까. 이기적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가. 혼자 사냥할 때 열흘에 한 마리의 사슴을 잡았던 몇몇 사람이 어느 날 열 명이 짝을 이루어 사냥하면 열흘에 스무 마리의 사슴을 포획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알고 나서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채집을
마르크스는 나 아닌 다른 이가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꿨다. “세상을 직시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진에서 속으로 나아가는 하화중생의 보살행과도 맞닿아 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이다. 영국군의 한 소대가 패잔병으로 사막을 방랑하고 있었다. 폭양은 뜨거운 모래 위로 이글거리는데 상처투성이 다리를 끌며 걷고 또 걸어도 오아시스도, 아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몇 날을 헤매다가 모두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소대장은 소대원을 향하여 말하였다. “여러분! 제군들은 그 동안 뜨거운 조국애와 전우애로 독일의 대전차군단도, 사막의 폭양도 잘 견뎌주었다. 그러나 이제 양식도, 약도 모두 떨어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란 고작 이 수통의 물뿐이다. 여러분이 짐작하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모두 고독하고 불안해한다. 매일의 끼니를 탁발로 이어가는 승가의 경제 활동은 현대인들에게 아득한 옛 이야기일 뿐이다. 이 가을, 저 단풍에 자주 눈이 가는 것은 나무가 곱게 물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물든 탓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록에 단풍이 불탈수록, 시린 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수록, 더욱 고독해지고 그리움은 깊어간다. 왜? 고독한 것은 소외 때문이다. 외로울수록 사무치게 님을 그리워하는데, 그 님은 바로 공동체이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다. 당신은 과연 행복합니까? 왜 행복하지 않죠? 양극화 시대에서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도 작용을 했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소외 때문이다. 설사 20만 불을 번다 하더라도 우리는 불
조주의 공안 ‘차 한잔 들게나’를 풀이하기 시작하면 끝이 보이지 않지만 이 역시 언어의 테두리 안에 있을 뿐이다. 사진은 조주 선사가 머물렀던 중국 백림선사. 법보신문 자료사진 지난 주에 제시한 하이데거의 인용문에서 ‘세계’를 ‘돈(頓)’으로, ‘대지’를 ‘점(漸)’으로 대체하여 읽어보자.“돈(頓)의 세움과 점(漸)의 펼침은 예술작품 존재에서 두 가지 본질적 성격이다. 돈과 점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돈은 점 위에 근거하고 있고 점은 돈을 관통하고 있다. 돈은 점 위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점을 넘어서고자 한다. 돈은 스스로 열어 보이는 것으로서 어떠한 닫힘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은 숨고 은폐하는 것으로서 항상 돈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그
현대 철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 예술에서 작품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과 파사현정의 관계에 대해 논해보자. 낯설게하기는 낡은 형식의 해체와 새로운 형식과 만남으로부터 비롯되는 미적 감동을 안겨주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좋은 예술작품으로부터 많은 의미를 떠올리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고 그 속에서 진리를 체득하였듯, 그것의 궁극적 본령은 예술작품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 그 속에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려는 데 있다. 선(禪)의 목적 또한 파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삿된 것을 부수고 그 안의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려는 데[顯正]있다. 있다면, 시간의 선후나 방향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론(中論)이 모든 희론을 적멸하는 파사(破邪)를 통하여 현정(顯正)에 이르려 한다면
예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부정을 한다. 기존의 코드를 해체하는가 하면, 익숙한 세계를 깨고 전혀 생경한 세계를 보여준다. 사진은 백남준 作 ‘108번뇌’. 가을이 자못 가까이 왔다. 한가위까지도 무더워 올해는 안 오시는가 했더니, 시베리아 기단이 내려오던 날 갑자기 어깨를 툭 치고는 홀연히 내빼버렸다. 마음은 덥석 안아주고프지만 속내를 감추고 있었더니, 그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눈을 감은 새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시나브로 다가온 모양이다. 어느덧 하늘은 투명하게 푸르고 들판은 금빛으로 출렁이고 산록엔 쑥부쟁이와 벌개미취가 눈부시다. 지리산 자락 삼정산 산꼭대기엔 여름 내내 동색이던 초록이 쑥스러운 듯 발그레 물들기 시작한다. 이런 날이면 우리는
시인의 눈에 비춰진 바다 아래 세계는 삶과 죽음이 갈등하고 욕망이 들끓는 속제다. 시인 바쇼는 바다 속 문어와 그를 잡기 위한 문어단지 사이에서 무상을 읽었다. 화엄의 미학은 그림이든 문학작품이든, 소설처럼 긴 텍스트든 선시처럼 짧은 텍스트든 모두 적용이 가능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으로 5/7/5, 단지 17자에 시상을 압축한 하이쿠에 응용해보자. 이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장르나 텍스트에는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으리라. 마츠오 바쇼(松尾芭焦)의 하이쿠를 한 수 골라 화엄의 미학으로 해석하여,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곧 부분이 되면서 주와 객이 하나로 원융(圓融)되는 경지를 느껴보자. 문어단지여, 그리 덧없는 꿈을/여름의 달밤(壺や, はかなき夢を/夏の月)
좋은 텍스트란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 모순을 읽어낼 수 있는 반영상과, 현실의 굴레를 넘어 다양한 읽기를 통해 상상을 가능케하는 굴절상이 함께 담겨있는 작품이다. 화엄의 총체성의 사유를 미학으로 전환해보자. 내가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컴컴한 밤으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그 어둠 속에서 광복의 희망을 꿈꾸면서 ‘별’을 노래할 수도 있다. 전자가 식민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 후자는 그를 굴절시키고 있다. 이처럼 예술 텍스트는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기도 하지만, 프리즘을 지난 빛이 무지개로 빛나듯 굴절하기도 한다. 현실의 모방과 반영이 예술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 현실을 의식을 통하여 반영시키는 동시에 지향의식(지향의식이란 주체가 세계와 마주쳤을 때, 그 세계를
온 우주의 삼라만상은 각각 떨어져 있으면서도 끝없이 관계를 맺는다. 보이지 않지만 불고 있는 바람 한 줌도 온 우주와 관계를 맺고 조건이 된다. 사진은 사진작가 여동와 씬의 작품진 ‘Into Tibet’에 수록된 중앙티베트. 서양 사람들은 나뭇잎을 따서 관찰을 하고 분석을 하여 나뭇잎에서 엽록체를 찾아내고 광합성작용과 탄소동화작용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뭇잎의 본질과 식물의 생장원리에 다가갈 수 있다. 서양의 과학자들은 지구와 달 사이의 중력을 계산해낸다. 이로 우리는 우주의 본질에 다가가고 천체의 운행원리를 깨닫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분석적 사유와 자연과학을 발달시켰고 이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사회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현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를 사는
극단이나 이분법을 지양하고 중도를 추구하는 ‘사수’는 불교에만 있는 미학이다.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피어오른 연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런 불교 미학의 산물이다. 그럼 이분법의 분별심을 없애고 무유호추론도 넘어서서 진정 불교적으로 올바르게 읽을 수 있는 퍼지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미와 추를 구분하는 것은 분별심이기에 망상이며, 미와 추는 각각 부처와 중생의 관계에 대응하기에 이를 분별하면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원리 - 곧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여서 모든 중생 속에 불성이 있어 중생이 수행과 정진을 하여 부처가 되고, 부처는 다시 중생이 되어 중생을 깨닫게 해야 진정 부처가 되는 - 와 맞선다. 미추는 분별이기에 망상심 가을 들판에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막사발에서 천하 명기가 갖는 미학을 해석해 냈지만 그는 ‘미추’와 ‘아속’을 동일시 하는 오류를 범했다. 사진은 도예가 천한봉 선생의 ‘조선 다완’. 필자의 독서량에 한계가 있지만, 지금까지는 서양이든, 동양이든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이야기했다. 이것이 수준이 어느 정도는 되는지 그에 미치지 않은지, 타당한 논리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독창적이었다는 점은 자부한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 말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진술한 자가 있어 이를 인용하면서 글을 풀어보련다. ‘미와 추’ 둘로 나누는 습관 이런 가을날 숲길을 걷다가 보랏빛 벌개미취 꽃을 만나면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낀다. 하지만
가을의 단풍을 무슨 색이라 해야 할까? 하나와 다른 하나만이 존재하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본다면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 마저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날은 아직 덥지만 볼을 스치는 바람엔 가을 기운이 스며있다. 가을이 되면 이제 푸르던 잎들은 울긋불긋 다양한 빛으로 치장을 할 것이다. 우리 산야에 가장 흔한 참나무 나뭇잎을 두고, 어떤 이들은 노랗다 하고 어떤 이들은 갈색이라 한다. 같은 갈색이라도 짙은 갈색, 흐린 갈색, 노랑 빛이 도는 갈색, 흙색, 황토색 등으로 제각각이다. 갈색을 만 가지, 억 가지로 구분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참나무의 낙엽의 빛깔을 제대로 지시하는 것일까? 인류 문명이 시작될 때 선인들은 같은 의문에 휩싸였다. 일군의 사람들은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이론의 응용과 실제로, 다음 두 미술작품을 눈부처의 미학으로 읽어보자. 불교나 기독교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양자를 관용과 차이로 읽는 것은 1차적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눈부처의 읽기는 이성과 의식을 넘어 감성으로 타자의 얼굴에서 신이나 부처를 발견하는 경지다. 예수 속 투영된 고해의 삶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오른쪽 그림은 독일의 궁정화가, 마티에스 그뤼네발트(Mattias Gru¨ newald: 1460?/1475?-1528)가 그린 ‘이젠하임(Isenheim) 제단화’이다. 이것은 독일 알자스 남부 이젠하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교단 수도원의 예배실에 놓여있던 제단화이다. 필자가 사진으로라도 대한 작품 가운데 예수의
앞에 있는 사람과 마주보며 눈을 맞추어 보라. 상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들뢰즈 이전에, 아니 8세기의 원효보다도 먼저 ‘차이 그 자체’, 혹은 변동어이의 차이를 알고 실천하였다. 이를 적은 책들은 사라졌지만, 21세기 대안의 사상이 고대 한국의 전통사상에 있었으며, 이는 5,000여년을 거슬러 ‘눈부처’라는 낱말과 타자를 ‘우리’로 섬기고 사귀고 나누는 전통에 ‘흔적의 텍스트’로 남아 있다. 굶주림 속에서도 개다리소반을 대문 가까이에 걸어놓고 걸인이 오면 한 상을 차려주고, 쪼들리는 삶이지만 온 생명들도 우리로 여겨 과일을 딸 때도 까치밥을 남기고 따며, 산업화가 가장 첨단으로 진행된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인공 폴포트는 ‘지적이며 따스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도시적인 것과 부르조아지적인 것’을 ‘타자’로 설정한 그의 실수는 ‘학살’이라는 비극을 불렀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일러 ‘나’라고 하는가. 학생들에게 너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대개 자기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성격과 능력에 대해 말한다. 동료, 아니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자신만의 무엇을 내세운다. 남을 말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눈은 작지만 코가 오뚝하고요. 키는 175센티고요, 수학은 못하는데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불의를 보면 못 참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한국인에 대해 물으면 대개, “피부는 다소 노란 빛이 도는 살색이고, 눈은 작은 편이고
석남사 비로자나여래좌상. 현존 비로자나불 석상 가운데 최고(最古)로 손꼽히지만 무엇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평가와 이해는 현저하게 달라진다. 불상이든, 불탑이든, 선시든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저 텍스트는 실체가 아니다. 눈 앞에 보이고 존재하는 현전(現前, pre′sence)과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부재(不在)의 관계 또한 대립적이 아니라 차이적이다. 누구인가가 몹시 그리운 것을 두고 한국인은 “눈에 밟힌다.”라고 표현한다. ‘눈에 밟힘’은 어떤 대상이 없어서 몹시도 그리워 환상으로 만들어진 대상이 구체성을 띠고 나타났다가 눈에 밟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반복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눈에 밟힘’은, 일심(一心)이 있는 것이면서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