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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1세기, 불교미학의 열린 지평 〈끝〉

기자명 법보신문

현실 거세한 예술에 미래는 없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200㎞에 달하는 길을 오체투지로 순례하며 사람과 생명, 평화의 길을 찾자고 호소했다. 21세기 인류가 맞닥뜨려 있는 생태·욕망·공멸의 위기는 그만큼이나 절박하다.

21세기, 우리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현재 세계 인류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 소외와 갈등의 심화와 보편화, 공동체의 파괴, 억압과 폭력의 구조화, 인간성의 상실과 이성의 도구화, 신자유주의식 세계화로 인한 양극화와 시장 전체주의의 내면화 등의 위기를 맞고 있다. 21세기에 인류가 맞은 위기에 대한 예술적 대안은 생태, 욕망의 자발적 절제와 마음 닦기, 공존공영으로 모아지고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2007년 연례보고서는 급박하게 지구 온난화 위기를 알리며 국제적인 연대를 제안한다. 이 보고서는 현재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65만 년 동안 지구 역사상 최고인 380ppm에 이르며, 21세기 중에 지구의 평균 온도는 섭씨 5도 이상 오를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금 상태에서 3~4℃만 기온이 상승해도 2080년까지 18억 명이 물부족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고, 해수면 상승 등으로 3억 3천 만 명이 홍수를 피해 이주를 해야 할 것이며, 2억 2천만 명에서 4억 명이 말라리아에 걸릴 것이며, 지구상의 생물 중 20~30%종이 멸종할 것이라고 한다.(Human Development Report 2007)

예술 통한 공존 지향 절실

이제 환경위기는 어느 지역이나 몇몇 종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이 모순 속에 던져진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이런 환경위기를 맞아 대안 가운데 하나는 예술을 통해 생태적이고 공존을 지향하는 상상력과 사고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생태시, 생태문학, 생태미술은 이런 표출이다.

생태예술에 대해 불교는 다른 철학과 다른 지평을 연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모든 생명이 부처처럼 존귀하니 살생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이 그물코처럼 얽혀있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조건이 되고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고 밝힌다. 한 송이의 들꽃을 피우기 위해 바람과 햇빛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온 우주 삼라만상이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됨을 알린다. 미생물과 같은 작은 생명에서도 부처를 발견하고 그것이 지구의 전체 대기의 균형과 우주의 질서에 영향을 미침을 알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기존의 생태론을 극복하고 나타난 심층생태론이나 사회생태론조차 세계를 인간과 자연으로 나누고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의도와 목적대로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한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한다. 반면에 불교의 연기론은 자신의 공함을 드러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우열이 아니라 차이로 바라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를 펼친다. 이런 불교의 사유들은 생태예술의 주제와 형식에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현대는 욕망 과잉의 시대

지금 21세기는 욕망의 과잉 발산과 욕망의 과잉 억압이 상존하는 시대다. 욕망을 너무도 발산하여 사회가 해체될 지경인데, 한 편으로는 욕망이 과도하게 억압되어 진정 자유로운 주체는 없고 개인은 늘 고독하고 불안하다. 한 사람으로 국한시켜 보더라도 수많은 이성들과 사랑이 없는 성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욕망의 과잉발산인데,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실은 자본주의 체제, 국가, 이데올로기, 대중문화 상품의 조작에 의해 욕망이 과도하게 억압되어 생긴 일탈행위다.

‘유교국가’라 자랑하던 한국 사회만 하더라도 ‘묻지마 관광’에 ‘원 나잇 스탠드’가 유행이고 저녁은 물론 아침 드라마까지 불륜 일색이다. 성욕만이 아니다. 모두가 더 너른 아파트, 더 높은 지위, 더 강한 권력, 더 많은 연봉을 열망한다. 이에 이르려 자신의 몸을 혹사하고 타인을 끌어내리고 음해하고 폭력을 가한다.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할 정도로 도처에 욕망이 들끓고 있고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그리 욕망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들은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다. 무엇엔가 주눅이 들고 억압된 불행한 자아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술은 저항의 형식이 아니라 타협의 양식으로 전락하였다. 예술은 상품이 되었고, 예술정신은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 대다수 예술가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주목을 받기 위해 언론계를 기웃거리고 평론가를 찾아다닌다. 신정아 사건은 이런 치부를 보여준 한 예에 불과하다. 예술은 외려 인간을 해방시키지 못하고 억압을 심화하고 있다. 약자보다 강자의 편에 서면서, 예술은 본래의 부정성을 상실하고 ‘길들여진 사냥개’가 되었다. 자본과 국가와 타협하면서,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지 못하면서 예술은 스스로 억압의 기제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일상의 욕망을 초월하여 더 거룩한 것을 지향하도록 이끈다. 남이라 생각한 사람이 실은 잃어버린 자기 자식이란 것을 알면 희생하듯, 연기는 모든 중생이 나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니 그를 위해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라는 지혜를 가져다준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선학은 자본과 국가는 물론 자신과 타협하는 것조차 거부하고 끊임없이 부정하는 길, 물질의 풍요를 거부하고 마음이 평안하고 자유로운 길을 펼친다. 진속불이(眞俗不二)는 설사 내가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고 깨달아 부처가 되었더라도 중생을 깨닫게 하지 않는 한 아직 부처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자연과 공존하고 모든 생명체와 타인을 부처처럼 섬기고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려는 선한 욕망을 예술로 꽃피우고, 그 꽃을 보는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도 이것이 꽃밭을 이루게 하여 그들을 부처로 만들고 그로 인해 내가 부처가 되는 길을 연다.

이 초록별에서 매일 8억 5,000만 명이 굶는다. 지금 65억 명의 인류 가운데 18억 명이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수입에 의존해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반면에 1%의 부자는 37억 명(57%)의 가난한 사람들이 한 해 동안 버는 수입을 모두 합한 것과 같은 액수의 돈을 번다. 5초마다 10살 미만 어린이 한 명이 굶어 죽고, 4분마다 한 명이 비타민A 결핍으로 시력을 잃는다.(장 지글러, 『탐욕의 시대』)

해마다 850억 달러를 10년 동안 투자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기초적인 교육과 의료와 위생시스템을 보장받고 적절한 영양섭취를 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다.(UNDP, Annual Report 2006) 해마다 군비로 7,800억 달러를 지출하고, 미국에서만 과체중자와 비만자에게 의료비용으로 사영보험에서 200∼280억 달러, 세금에서 250∼380억 달러를 소비한다.

 한 쪽에서는 수 억 명의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 가는데, 한 쪽에서는 수십 억 명을 모두 살리고도 남은 비용의 수십 배 이상을 사람을 죽이거나 너무 먹어서 생긴 병을 고치는 데 낭비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국적 기업과 제국은 그들을 더 약탈하기 위해 FTA와 같은 불평등 협정을 강요하고 집단학살과 전쟁도 불사한다. 이는 야만을 넘어 범죄이자 죄악이다.

‘불교’는 미학의 잃어버린 반쪽

이런 시대에 예술은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예술이 예술성을 잃고 인간 구원이나 세계 개조의 목표를 ‘직접’ 추구할 때 예술 스스로 이데올로기가 되고 권력이 됨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처럼 예술이 일상의 안온함에 젖어 현실을 거세한 탐미의 세계에 빠질 때 그 세계에 미래는 없다. 예술은 억압에 저항하고 세상과 나의 타락을 알리고 우리 안에 내재한 진선미(眞善美)를 향한 상상력과 무의식을 일깨워 나를, 나아가 타인과 세상을 참되고 아름답게 꾸미는 형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변동어이(辨同於異)론은 너와 나, 작가와 독자, 가난한 자와 부자, 인간과 자연의 구분이 사라진 눈부처의 미학을 편다. 성기(性起)론은 우리 마음 속에 내재한 부처를 깨워 세상의 타락에 대해 분노하고 진정한 세상을 추구하도록 추동한다. 화엄의 미학은 예술을 통해 세상을 참되고 아름답게 바꾸는 구조와 패러다임을 넌지시 알리며,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 그들 마음에 숨어있는 진여(眞如)와 유토피아를 향한 마음, 서로 공존하고 타자를 보듬으려는 마음, 나 아닌 타자를 자유롭게 하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서양의 예술가와 미학자들이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잃어버린 반쪽을 비로소 찾았다고 말하게 되리라.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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