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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진정성과 보살행의 미학[중]

기자명 법보신문

현실의 연기-공 직시한 불교 진정성의 미학과도 일맥상통

 
마르크스는 나 아닌 다른 이가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꿨다. “세상을 직시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진에서 속으로 나아가는 하화중생의 보살행과도 맞닿아 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이다. 영국군의 한 소대가 패잔병으로 사막을 방랑하고 있었다. 폭양은 뜨거운 모래 위로 이글거리는데 상처투성이 다리를 끌며 걷고 또 걸어도 오아시스도, 아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몇 날을 헤매다가 모두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소대장은 소대원을 향하여 말하였다. “여러분! 제군들은 그 동안 뜨거운 조국애와 전우애로 독일의 대전차군단도, 사막의 폭양도 잘 견뎌주었다. 그러나 이제 양식도, 약도 모두 떨어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란 고작 이 수통의 물뿐이다. 여러분이 짐작하다시피 우리는 살아남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제군들을 만나서 나는 행복한 군인이었다. 감사한다. 이제 우리 수통의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마지막으로 전우애를 나누자.”

타인이 더  행복한 세상

수통은 소대원을 돌아 다시 소대장에게로 왔다. 그 순간 소대장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수통의 물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나도 마시고 싶지만 옆의 ○○일병은 다리의 출혈이 심하니 더 갈증이 심할 거야.” “아니야, ○○병장은 노모가 계시다는데 그가 살아남아야 해.”라며 이들은 죽음의 전선에서 서로 양보하였다. 그들은 자신보다 전우의 갈증을 더욱 안쓰러워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살아남았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그룬트리쎄』를 보면, 마르크스가 꿈을 꾼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이 소대원처럼 나 아닌 다른 이를 좀 더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려고 서로 서로 갖은 실천을 다하는 사회였다. 바로 이 때문에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영광과 명예와 환락의 길을 버리고 나보다 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삶을 구원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이들의 희생과 열정이 바탕이 되어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열렸다. 새 세상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은 나의 노동이 자기를 실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더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며 혼신을 다해 망치질을 하고 쟁기질을 하여 기적적인 생산증대를 이루어 내었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이 같은 마음이 밀물지도록 하려는 것이 마르크스 예술론이 추구하는 진정성이다.

성인들이 꿈꾼 인간의 최고 덕목은 대동소이하다. 예수님이 “네가 원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라.”라고 하셨다면, 공자님은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말씀하셨다. 부와 명예와 권력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다가 마음의 평안함과 깨달음의 길이 더 나은 삶이라며 방향을 트는 것이 제1회향이라면, 나 아닌 다른 이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더 진정한 길이라며 삶의 좌표를 돌리는 것이 제2회향이다.(이상 졸저, 『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 받을까』)

앞 장(종교의 일상의 합일-진속불이론)에서 상세하게 설명하였듯, 화쟁의 목표는 한 마디로 말하여 일심(一心)의 본원(本源)으로 돌아가 중생을 풍요롭고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歸一心之源 饒益衆生]. 원효는 이를 위하여 진과 속,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진속불이(眞俗不二)를 외친다. 속에서 진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자리(自利)라면, 진에서 속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이다. 내가 위없는 지혜를 깨달아 중생들의 불성을 드러내 그들을 부처로 이끌고 그로 나도 부처가 되는 것이 진속일여(眞俗一如)이다. “일심은 하나이나 스스로 움직여 육도(六道)의 물결을 일으키기 때문에 널리 구제하는 서원을 발하며,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않기에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킬 수 있다.(원효, 『대승기신론소』)”

“중생과 깨달은 자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불각(不覺)과 각(覺)이 둘이 아니니, 먼저 깨달은 자는 항상 큰 자비로서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며 생사의 바다에 빠져 있는 중생들의 의혹을 제거하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중생들이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그럴 때 그 또한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졸저,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맑시즘은 당위, 불교는 인과로 해석

마르크스에 젖줄을 대고 있는 예술론이나 비평론이 나 아닌 다른 타자의 해방을 위한 진정성을 추구한다면, 불교는 아직 삿됨과 미혹함과 어리석음 속에 있는 중생의 구제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맑시즘과 다르다면, 불교는 이를 당위적인 윤리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인과의 논리로서 설명한다. 인간을 넘어서서 나와 깊은 연관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보듬고 그들에게 동체대비의 자비심을 베풀라고 말한다.

진정성의 미학의 동력은 구체적인 현실이다. 존재론적으로 누구나 이상과 완성을 향하지만 누구도 이에 다다르지 못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진동해야 하는 인간존재의 부조리한 삶을 그린다. 사회적으로는 선한 사람이 더 고통 받고 가난한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 수 없는 사회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작가가 굳이 개입하여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거나 대안의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현실만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독자들은 이런 작품을 감상하며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고 그에 희생되는 이들의 삶에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머리를 들어 별을 바라며 참된 세상을 꿈꾼다.

오로지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 것으로 보는 불교는 현실, 혹은 현실의 모순을 그려내는 것, 더 나아가 진정으로 존재해야 할 당위의 세계를 꿈꾸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처님은 늘 실상을 직시하라 말씀하신다. 대상이 모두 허상이라 하더라도 그 대상이 서로 연기되고 공(空)한 양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데서 깨달음은 출발한다. 인간 존재의 속성,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며 고통을 겪는 양상에 대해 올바로 성찰할 때 불법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리가 된다. “붓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하는 행위의 문제는 인간 존재의 실상(현실, 사실)의 분석에 근거한다. 예컨대 사성제의 전반부가 우리의 존재 실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후반부는 어떻게 행위해야 한다는 당위이다. 즉 윤회하는 고통의 실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실천해야 할 당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안옥선, 『불교와 인권』)

다음으로 진정성의 미학은 세계를 철저히 둘로 가르고 양자의 대립과 갈등, 모순에 대해 첨예하게 다룬다. 현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자본가와 노동자, 제국과 제3세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데 당위적인 화해와 조화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역대 군사정권은 호남을 개발에서 소외시키고 전라도 사람들을 차별하였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입으로는 지역의 화합을 말하면서도 지역의 분열을 조장하는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권력을 유지하였다. 이런 모순을 거론하지 않은 채 전라도 여성과 경상도 남성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는 작품은 지역차별의 현실과 지역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

얼핏 보면, 이분법을 분별심 내지 망상으로 치부하고 일심을 주장하는 불교와 진정성의 미학은 만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궁극적인 진리가 말을 떠난 곳에 있지만 말을 방편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진여문에서 세계는 하나이지만 생멸문에서는 세계는 둘이다. “진제와 속제는 둘이 아닌 동시에 하나를 지키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곧 일심이요,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기에 체를 들어 둘로 삼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한다. 이상이 그 대의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하나지만, 중생들의 일상에서 보면 낮과 밤, 진실과 거짓, 이데아와 그림자, 주와 객 식으로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으니 하나에 머무르면 일상의 삶을 영위할 수 없거니와 현실을 분석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깨달음의 세계, 더러운 세계에서 청정한 세계, 허위에서 참을 지향하고자 하면, 진여 실체는 하나이다. 분별심을 떠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 하지만, 이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여,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깨우치고자 하면 세계를 둘로 분석하고 표현해주어야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니, 진여실체가 하나이지만 둘로 가르는 것은 용(用)이요, 둘이 허상임을 깨닫고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체(體)이다.

함께 깨닫기 위해 둘로 표현

예를 들어, 생멸문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어 갈등하고 대립하는 실상을 직시하되, 진여문에서는 양자가 삿된 집착과 미혹함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추구한다. 앞의 연재에서 말하였듯, 최치원은 상림을 조성하여 1,000여 년 동안 위천이 범람하지 않으면서도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하는 한편, 그 전에 둑을 쌓아 그 해에 당장 일어날 홍수 또한 막았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둑 - 가진 자의 착취와 억압, 계급갈등, 노동과 인간의 소외 등 둘에서 빚어진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해선 마르크시즘적으로 비판을 하고 대안의 실천을 행하는 일 - 을 행한 뒤에 숲 - 네덜란드의 노사정위원회처럼 불일불이의 패러다임에 따라 양자가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다산(茶山)의 여전제(閭田制)처럼 능력에 따라 공동 생산하고 공동 분배하는 공동체를 건립하는 일 - 을 조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자본가가 다 같이 평등하고 존엄하며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고자 갖은 실천을 하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과 부처, 깨닫지 못함[不覺]과 깨달음[覺]이 하나가 되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의 화쟁이요, 둘의 실상을 직시하여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불교식 진정성이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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