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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동일성의 미학에서 눈부처의 미학으로 [중]

기자명 법보신문

그대 눈 속 내 모습 우리는 둘이 아니다

 
앞에 있는 사람과 마주보며 눈을 맞추어 보라. 상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들뢰즈 이전에, 아니 8세기의 원효보다도 먼저 ‘차이 그 자체’, 혹은 변동어이의 차이를 알고 실천하였다. 이를 적은 책들은 사라졌지만, 21세기 대안의 사상이 고대 한국의 전통사상에 있었으며, 이는 5,000여년을 거슬러 ‘눈부처’라는 낱말과 타자를 ‘우리’로 섬기고 사귀고 나누는 전통에 ‘흔적의 텍스트’로 남아 있다. 굶주림 속에서도 개다리소반을 대문 가까이에 걸어놓고 걸인이 오면 한 상을 차려주고, 쪼들리는 삶이지만 온 생명들도 우리로 여겨 과일을 딸 때도 까치밥을 남기고 따며, 산업화가 가장 첨단으로 진행된 서울 한 복판에서도 도시형 공동체인 골목문화를 유지하고, 이름도 모르는 이웃을 위하여 공중전화에 낙전을 남겨둔다. 이런 사상에 원효의 화쟁철학과 같은 것이 더해져 우리 민족 고유의 철학과 윤리로 굳어진 것이라 본다.

필자는 이런 경지의 삶과 윤리를 ‘눈부처의 차이’라 명명한다. 지금 이 순간 글을 읽는 여러분께 한 가지 제안한다. 당장 옆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면서 눈을 맞추라.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필자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낱말이다. 그 모습이 부처의 형상이기에 그런 명칭이 붙은 것만은 아니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약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마음이 체(體)라면 부처의 이미지가 상(相)이고 이런 반사작용이 용(用)인 셈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그 눈부처는 분명 뚜렷한 내 모습이니 나이지만, 상대방의 세포로 이루어진 몸에 비추어진 영상이니 타자이다. 필자는 이제 막 결혼하는 친한 후배나 제자들에게 백년해로를 할 수 있는 묘약으로 매일 아침이나 저녁에 차를 마시며 서로 단 1분만이라도 눈부처를 바라볼 것을 권한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마다 “오늘 당신의 눈에서 눈부처를 발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어떨까. 그 마을이, 그 아파트 단지가 행복동이 되지 않을까. 설사 상대방을 살해하려 간 자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발견하는 그 순간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할 수는 없으리라.

이처럼 눈부처의 차이는 두 사상(事象)이 서로 차이를 긍정하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부시가 눈부처의 차이를 깨닫는다면, 자신이 바로 그리 저주를 퍼붓고 죽이려고 애쓰던 오사마 빈 라덴임을 발견할 것이다. 이어서 라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이슬람인에게서 미국인스러움을, 꾸란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고 이슬람인과 어울려 이슬람 전통 춤을 추리라. 이처럼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나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다. 눈부처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자와 내가 깊은 연관관계 속에 있음을 깨닫고 타자를 보듬고 그를 자신의 안에 품는 길이 바로 자신이 완성되는 길임을 깨닫는다.

나를 버리고 타자가 되는 길

사랑이 깊고도 깊으면 얼굴마저 닮는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금실이 좋은 부부를 보면 부부라기보다 오누이 같다. 과학적으로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닮으려 하고 기쁠 때 같이 웃고 슬플 때 같이 울고 고통스러울 때 같이 찡그리다 보니 얼굴에 있는 약 이십만 개의 근육이 수십 년 동안 같이 변이하여 그리 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등어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던 이가 사랑하는 이가 맛있다고 하니 그 비린내가 생선의 독특한 맛으로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풋사랑하는 이들은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만, 참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그리로 물처럼 흘러 그를 이루려 한다. 내 방식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함께 바라보려 한다. 차이와 타자성의 철학에서 금자탑을 이룬 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진정으로 타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는 그 얼굴에서 신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였다.(E. Levinas, Thinking-of-the-Other) 그러니 왜 얼굴인들 닮지 않겠는가? 그리 나를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하는 것이 눈부처의 차이에서 비롯된 윤리다.

이런 눈부처의 차이를 예술에 적용하여 눈부처의 미학을 펼쳐보자. 작가와 독자의 관계 또한 나와 타자처럼 눈부처의 관계에 있다. 작가와 독자 모두 서로의 관련 속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동시에 서로의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작가와 독자의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작가와 독자는 텍스트를 창조하는 자나 읽는 자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작가 안에 이미 독자가 들어와 있고 독자 또한 작가이다. 작가는 독자와 분별하여 작가스러움을 드러내고 독자 또한 작가와 분별하여 독자스러움을 드러낸다. 작가와 독자 모두 텍스트를 읽고 쓰니 하나다. 작가는 텍스트를 주로 쓰는 자고 독자는 텍스트를 주로 읽는 자니 하나도 아니다.

작가와 독자는 본래 하나

눈부처처럼, 작가는 독자이다.(이를 ‘눈부처-작가’로 명명한다.) 작가는 텍스트를 창조하기 이전에 다른 텍스트의 독자이다. 작가는 다른 텍스트의 구조, 코드, 전통, 문체 등을 바탕으로 새로운 텍스트를 구성한다. 작가는 독자로서 자신이 읽은 기존의 텍스트의 문체, 인물, 구성, 이데올로기, 내적 구조, 이미지와 상징 등을 의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방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든다. 때문에 작가가 구성한 새로운 텍스트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텍스트가 겹쳐있다. 그들은 그가 완성하여 자신의 작품이라고 내놓은 텍스트에 수많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작가 안에 독자가 들어와 있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 독자를 상정하고 독자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코드, 취향 등을 고려하며 글을 쓴다. 일기와 같은 고백적인 글마저 독자를 상정하고 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대화적이기에 고백조차도 타인을 의식하고 행해진다. 한 개인이 발화를 하고자 할 때,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 이미 타인은 이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타인이 없는 발화, 타인이 없는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술은 누군가를 향한 것이며, 담론은 대화자를 향해 있고, 이 대화자의 존재를 향해 있다.”(V. N. Volosinov/M. Bakhtin, Marxism and the Philosophy of Language) 이런 의미에서 언술은 단지 발화자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청취자와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그러나 청취자, 타인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발화자의 의식 속에 내재적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대로 글을 쓴다기보다 작가가 마음속으로 구성한 독자, 곧 ‘눈부처-독자’와 대화를 하며 글을 쓴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눈부처처럼, 독자 안에 이미 작가가 들어와 있다.(이를 눈부처-독자로 명명한다.) 독자는 작가의 의도, 세계관, 예술관, 이데올로기 등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혹은 역사주의 비평가식으로 작가가 작품에 남긴 글을 비롯하여 작가에 대한 비평 등 그에 대한 모든 자료와 정보를 종합하여 작가를 구성한 다음 그 입장에서 텍스트를 해석하고자 한다. 독자는 자신의 의도대로 읽는다기보다 독자가 마음속으로 구성한 작가, 곧 ‘눈부처 작가’와 대화하며, 때로 역사주의 비평가의 입장에 설 경우 눈부처-작가의 의도대로 텍스트를 읽는다.

물론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텍스트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자신이 의도한 모든 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없으며, 적극적 독자일수록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서 ‘기대의 지평’을 무너뜨리고 작품을 해독한다. 연주되지 않는 악보가 음악이 아니라 단순한 노트에 지나지 않으며 관객들이 연주를 듣고서야 감동을 하고 미적 평가를 내리는 것처럼, 문학 텍스트는 읽기 과정을 통하여 미학적 가치를 지니며 사회적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작가의 사물에 대한 번득이는 감수성, 천재적인 영감, 현실을 통찰하는 의식과 또 이 모든 것을 언어기호를 빌어 텍스트로 짜내는 기법 등이 종합하여 빚어진 완결체가 아니다. 책이란 흰 종이 위에 찍혀진 검은 기호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활자 사이사이에 수많은 빈 공간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완벽하게 쓴 작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수많은 틈이 있다. 이 틈을 메우고 연관관계를 찾으며 해석을 하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문학은 독백적으로 텍스트의 초시간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기념물이 아니라 독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복합체인 것이다.”(H. R. Jauss, Toward an Aesthetic Reception) 이보다 더 적극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롤랑 바르트가 『S/Z』에서 행한 것처럼 텍스트를 다시 쓴다. 그는 작가가 되어 텍스트에 뛰어들어 구성을 다시 하고 서사구조를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이데올로기, 세계관, 취향, 미학관이나 예술관에 맞게 문체, 구성, 상징, 인물들을 교체하여 다시 쓴다.

상호작용 속 무한의 파노라마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바람직한 관계는 작가와 독자가 불일불이(不一不二)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낼수록 글은 문학성을 상실하고 이념, 의도 등의 축자적 집합체로 전락한다. 작가의 의도에 치우친 해석은 하나의 단일한 목소리만을 듣는다. 독자가 자신의 이데올로기, 코드, 읽기방식을 고집하면 할수록 닫힌 해석이 되고 텍스트의 의미는 축소한다. 표면에 드러난 텍스트만 볼 때 수없이 중첩된 텍스트들을 놓치게 된다. 반면에 작가와 독자가 서로 자신을 버리고 상대방을 닮고자 할 때, 드러난 텍스트만 보지 않고 흔적을 바탕으로 부재한 텍스트들을 찾아낼 때,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할 때 소통과 상호작용이 활발해지고 수많은 부재 텍스트들이 재현하면서 그들 텍스트 사이에서 의미의 황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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