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대사의 행적비가 모셔진 대자사 조사정. 무상과 마조의 사천성 행적지 순례를 마쳤다. 홀로의 순례가 늘 그렇지만 계획 세우기, 차편과 숙소 알아보기, 목적하는 곳에 대한 사전조사 등 부단히 바빴다. 스스로 여러 일을 하다 보니, 마음이 차분히 정리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운서주굉이 쓴 『죽창수필』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종일토록 분주히 일에 시달리거나 혹은 이럴까 저럴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문득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고요히 앉았노라면 어제의 옳고 그른 일, 가부를 결정하지 못해 답답했던 일들이 분명하여 예전의 그릇되었던 일을 이때 깨닫곤 한다. 마음의 심성(心性)을 분명히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바쁘고 산란한 마음이 본체를 가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무상과 마조
장송향 마을에서 3~4km 장송산으로 오르면 큰 바위가 마을의 수호신인양 서 있다. 이 부근을 마조동(馬祖洞)이라 하는데, 현재 지명만 남아있을 뿐 동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느 지역을 벗어나든 오랜 친구와 늘 이별하는 심정이다. 내 살아서 언제 다시 이곳에 오려나 하는 객기어린 아쉬움이다. 특히 중국 시골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늘 헤어지는 감상에 젖곤 한다. 前不見古人 後不見來者 念天地之悠悠 獨愴然而涕下(전불견고인 후불견래자 념천지지유유 독창연이체하)앞으로는 옛사람 보지 못하고, 뒤로는 오는 사람 볼 수 없네.천지의 무궁함을 생각하니, 홀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네. 위 시는 당나라 측천무후 때 사천성이 배출한 문인 진자앙(陳子昻, 661~70
돈황 문서에 의해 티베트 불교에 선(禪)을 최초로 전한 사람이 무상선사임이 밝혀졌다. 사진은 티베트에 불교를 받아들인 송첸감포왕이 부인 문성공주를 위해 지은 조캉사원. 이전 중국여행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성가신 일이 하나 생겼다. 바로 숙소를 구하는 문제다. 사천성이 티베트 인접 지역이라 그런지 숙소에 들어서면 직원이 한번 훑어보고, 여권을 보자고 한다. 여권에 승려 사진을 보면 숙소 직원이 단번에 퇴짜를 놓는다. 아무튼 사천성을 여행에서는 한 번 만에 숙소를 구한 적이 없고, 2~3번을 옮겨 다닌 후에야 겨우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2008년 올림픽을 전후해 티베트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삼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사천성은 중국 내륙지방에 비해 이국적
자중현 덕순사 삼문패방. 현재 영국사로 불린다. 덕순사는 무상대사가 처적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법을 이은 곳이다. 아득한 과거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동자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디선가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이 무상한데 이는 생멸의 법이다.)”이라는 구절이 들렸다. 동자는 누가 이렇게 좋은 구절을 말하는가 싶어 둘러보니,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서있었다. 동자가 나찰에게 “다음 구절을 알려 달라”고 하자 나찰이 말했다.“나는 배가 너무 고파 말할 수가 없다.”“그러면 저의 이 육신을 보시할 것이니 다음 구절을 알려 주십시오”나찰이 그러겠다고 동의하자, 동자가 다음 구절을 먼저 듣고 높은 언덕에서 몸을 던지기로 하였다. 나찰이 다음 구절을 읊었다.
무상이 두타행을 했다는 고태안사. 2008년 지진으로 사찰은 완전히 폐허가 됐다. 먼지를 뒤집어 쓴 관세음보살상 뒤로 대웅전 조성 불사가 한창이다. 사천성은 차(茶)의 명산지요, 차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명산현의 몽정감로차, 아안 지방의 아미모봉차, 아미산의 죽엽청은 사천성의 대표적인 차이다. 이전 여행할 때도 시간 여유가 되면 꼭 찻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곤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도량 내에 찻집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 사천성의 몇 사찰들을 순례하면서 느꼈지만, 사찰마다 노천 찻집이 없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수십 석의 테이블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37·38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도 사천성 사람들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대담을 나누고 마작을 하였다. 일반적으
혜의정사(현 금천사) 도량의 모습. 혜의정사는 처음에 안창사라 불리다가 현재는 금천사라고 한다. 물이 흐르는데 마치 그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금천(琴泉)’이라고 하였다. 이전에 중국 시골 지역을 여행할 때도 교통편이 무척 불편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시골 지역을 다니는데 불편함은 마찬가지다. 중국은 대도시만 번화롭고 화려하지 시골 지역은 그리 부유하지 않다. 중국은 대도시 북경이나 상해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외국에서는 중국 경제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노동에 참여하고 평등하게 살자’는 사회주의 슬로건은 전혀 맞지 않는다. 시골 주민들 중 일부는 초라함에 극
나한사 대웅전. 사천성 시방시에 위치한 나한사는 마조 스님의 출가 사찰이다. 마조(馬祖, 709~788) 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고향인 사천성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서 일하고 있던 할머니가 마조를 보고 외쳤다.“어 마 씨네 키쟁이 코흘리개가 지나가네.”마조가 이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했다.“출가해 나이 들어서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 예수도 성인이 된 후, 고향에 갔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당한 곤욕이 있어 제자들에게 ‘절대 고향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나도 실감하는 바이다. 형제가 다섯인데 부모님 이외에는 형제들이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러니 형제들이 내게 예우를 갖추어야 하는 줄은 알지만 서로 주제 삼을 대화거리도 없으니 점차 멀어져가는 감이 있다. 이외
정중사지로 추정되는 곳. 무상대사는 정중사에서 20여 년을 머물며 수행하고, 제자를 지도하다가 762년 세속 나이 79세로 열반에 들었다. 대자사 도량 찻집에서 차(茶) 한 잔을 마시면서 잠시 앉아있다 보니, 내가 현재 딛고 있는 이곳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몇 년 전 장기간 중국을 여행할 때는 이 나라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적대감이 있었다. 외국인이라서 그런 것인지, 승려라는 점 때문인지 숙소에서 내쫓김을 당해보았고, 터무니없는 요금 때문에 택시기사와 참 많이도 싸웠다. 중국은 과일을 저울에 달아 파는데, 썩은 과일을 몰래 넣어 무게를 올리는 장사꾼과 다투기도 했다. 또 한 번은 터미널에서 원하는 목적지에 분명히 간다고 해서 버스를 탔었는데 나의 목적지
「법보신문」은 무상대사와 마조선사의 발자취를 찾아 중국 사천성(四川省)을 중심으로 성지를 순례한 정운 스님의 순례기를 격주로 연재한다.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시내 번화가에 위치한 대자사. 현장법사가 수계를 받은 곳으로 유명한 대자사는 위진시대에 창건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성쇠를 거듭했다. 무상대사는 755년 안사의 난으로 피난 온 현종이 ‘대성자사’라는 현판을 하사하고 사찰을 재건토록 부탁해 한동안 이곳에 머물며 수행했다. 떠남이 또 시작되었다.오래전 몇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해 미얀마, 티베트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다. 3년 전 중국에 있는 1년 반 동안 베이징에 잠깐 안주해 살면서도 몇 번을 이사했고, 중국 여행 중에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이동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