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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⑥ 자중현 덕순사

기자명 법보신문

인성염불〈引聲念佛〉 강조한 무상의 선기〈禪氣〉 어린 곳

 
자중현 덕순사 삼문패방. 현재 영국사로 불린다. 덕순사는 무상대사가 처적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법을 이은 곳이다.

아득한 과거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동자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디선가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이 무상한데 이는 생멸의 법이다.)”이라는 구절이 들렸다. 동자는 누가 이렇게 좋은 구절을 말하는가 싶어 둘러보니,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서있었다. 동자가 나찰에게 “다음 구절을 알려 달라”고 하자 나찰이 말했다.
“나는 배가 너무 고파 말할 수가 없다.”
“그러면 저의 이 육신을 보시할 것이니 다음 구절을 알려 주십시오”
나찰이 그러겠다고 동의하자, 동자가 다음 구절을 먼저 듣고 높은 언덕에서 몸을 던지기로 하였다. 나찰이 다음 구절을 읊었다.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 생멸이 멸해 마치면 바로 열반의 즐거움이다.)”
이 말을 듣고 동자가 높은 언덕에서 몸을 던지려는 찰나에 나찰이 동자의 몸을 받으면서 말했다.
“동자가 법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이 어떠한지를 실험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법을 구하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투철한 구법정신인 위법망구(爲法亡軀)의 본보기이다. 몸을 함부로 훼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자신의 육신까지도 버릴 수 있을 만큼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뜻한다.

무상대사도 스승에게서 법을 받기 이전, 이런 구도 정신이 있었다. 무상대사가 현종을 알현하고 선정사에 머물다 사천성으로 들어가 법을 구하고자 찾아간 선사가 자주(資州)의 당화상(唐和尙)이라고 불리우는 처적(處寂)선사이다.

무상이 덕순사로 찾아가 처적선사 뵙기를 간곡히 청했으나 처적은 무상을 만나주지 않았다. 무상은 손가락을 태우는 소지공양을 함으로서 구법 의지를 보였다. 이런 무상의 행동을 보고 당화상은 그의 굳은 의지에 감동을 받아 덕순사에 머물도록 하였다.

무상은 2년간 덕순사에 머물며 처적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상은 가르침을 받는 와중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천곡산(天谷山)으로 들어가 두타행을 하다가 다시 덕순사로 돌아와 처적선사로부터 가사와 법을 받고 무상(無相)이라는 호를 받았다. 이에 신라 무상대사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법을 받은 곳이 자주 덕순사(現 영국사)라는 곳이다.

무상을 연구한 중국인 철파락(鐵波樂) 씨에 의하면 무상이 중국에 머문 34년 중 성도에서 20년을 머물렀고 14년을 자주에서 지냈다. 무상이 스승에게 법을 받고 머물렀던 자주 지방은 무상의 행적 중 중요한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무상의 스승인 처적(665~732)선사에 관해서는 어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5조 홍인의 제자인 지선(智詵) 스님의 제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고승전』에서는 마조가 처적에게 삭발한 점이나 무상이 처적선사를 참문한 것에는 일치한다. 법맥을 정리해보면 4조 도신-5조 홍인-자주 지선-처적-무상-무주선사라고 할 수 있다.

청성산과 가까운 도강언(都江堰) 버스터미널에서 무상이 처적에게 법을 받은 덕순사를 찾아가기 위해 행선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도강언에서 자중현(資中縣)까지는 하루 2번 운행되는 시골 버스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중현에 내려야 할지, 자양시(資陽市)로 가야할지가 문제였다. 어록에 언급된 옛 지명으로 치면 자주(資州)라고 하지만 현재 지명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전에 광동성 소관 6조 혜능의 사찰인 남화사에서 그 지역 지도를 꼼꼼히 보니, 남화사에서 하루거리에 단하산(丹霞山)이 있었다. 마조와 석두의 법을 받은 당나라 때의 단하천연(739~824)이 머물렀을 것으로 단정하고 무조건 출발했다. 대체로 중국승려 이름은 선사가 머물던 산(山) 지명을 붙이기 때문이다. 계획에 없었지만 그 유명한 당나라 때 단하선사 도량을 찾아간다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고생고생 찾아갔더니, 단하천연이 머물던 도량이 아니었다. 이때 받은 충격과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후 이런 일을 두어 번 또 겪었다.

 
보리도량 안에는 처적선사를 중심으로 왼쪽에 지선 스님, 오른쪽에 무상의 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앉아서 답을 구할 수는 없다. 실패할지언정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것이 실패요, 실수일지언정 그 실수로 인해 값진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나에 대한 평가가 상반되는 점이 있다. 완벽주의 성격 때문에 무모하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그러나 나는 대략 계획을 세웠다면 일부터 벌인다. 그런 다음에 다음 해결책을 찾는 것이 내 삶에 대한 관점이다. 어쩌면 그런 무모함이 있기 때문에 혼자 여행하는지 모른다.

가끔 질문 받는다. “어떻게 혼자 다닐 수 있냐?”, “중국 사람이 나쁘다고 들었는데…” 등등. 그런데 첫째는 혼자 다녔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여행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철저한 계획이 있었다면 장시간 여행은 못했을 거다. 그리고 중국에 나쁜 사람이 있으면 좋은 사람도 있는 법, 어디나 사람 사는 세상은 같은 것이라고.

소지공양으로 구법의지 다져

어쨌든 다행히도 자중현에 내리니 덕순사가 지척거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고 덕순사 도량 앞에 내리니 택시기사가 20원(한국돈 4000원)을 달라고 한다. “10여분 정도밖에 오지 않았는데, 무슨 20원이냐”고 끝까지 우겨서 10원을 냈다. 나중에 사찰에 들어가서 물어보니 원래 20원이라고 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자국인보다 적게 냈으니 보통 민망한 일이 아니다.

오랜 중국 여행에서 제일 힘들었던 점은 택시기사의 부당한 요금이었는데 그들과 참 많이 싸웠다. 중국여행에서 얻은 스스로의 별명이 있다면 싸움닭인 것 같다. 지나친 과민반응을 보였는데 그 택시기사를 만날 기약은 없을 것 같고 그 차액과 참회하는 요금까지 쳐서 불전함에 보시금을 넣었다.

덕순사는 현재 영국사(寧國寺)라고 불리운다. 자중현 중용진(重龍鎭)에 위치한 도량은 이 지역의 유일한 사찰이다. 이곳은 몇 년 전부터 불사를 했는데 내가 찾아갔을 때는 불사가 끝나고 어엿한 사찰로서 손색이 없었다. 도량은 산문으로부터 시작해 대웅보전, 보리도량(菩提道場), 관음전, 옥불전으로 배치되어 있다. 옥불전은 승려들의 요사채와 사무실을 겸하는 곳으로 보인다. 옥불전에 노스님(방장)이 주무신다며 기다리라고 한다. 기약할 수 없어 고개만 끄떡였다. 중국인들은 정오부터 2시까지 낮잠을 자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관공서까지도 12시에서 2시까지는 휴식시간이다.

보리도량 당우 안에는 처적선사를 중심으로 왼쪽에 지선 스님, 오른쪽에 무상의 상이 모셔져 있다. 한편 당우 양쪽 벽에는 무상의 활동 행적이 담긴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는 무상이 당나라에 입국한 장면, 처적에게 법을 구하고자 단비하는 장면, 천곡산에서의 두타행, 사람들을 교화하는 장면 등 여러 모습이 담겨 있는데 카메라에 담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데 뒤편 관음전에서 염불소리가 들렸다. 관음전을 관리하는 거사님이 염불을 하고 있었다. 당우 안에 있던 거사님은 ‘무상은 신라 승려로서 3태자(三太子)’라고 강조하면서 매우 훌륭한 스님이라며 엄지손가락까지 들어보였다. 내 조국의 스승이 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다니 기분 좋은 일이다.

중화주의 사상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존경받는 무상대사의 선사상은 인성염불(引聲念佛)과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妄)인 3구(三句) 설법이다. 3구를 수행차원에서 계·정·혜 3학에 배대하였다.

“잡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계율문이며, 번뇌로운 생각이 없는 것이 선정의 문이며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지혜의 문이다. 무념(無念)은 계율과 선정, 지혜를 모두 구족한다. 과거·미래·현재의 수많은 부처님들도 이 문(門)으로부터 깨달았으며 달리 다른 문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무상은 매년 12월과 정월에 사부대중 백천만인에게 계를 주었다. 엄숙하게 도량을 시설하여 스스로 단상에 올라가 설법하고, 먼저 소리를 내어 염불하게 하여 한 목소리의 숨이 끊어지고 상념이 다할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며 망념을 내지 말라.”

즉 무상은 먼저 소리를 내어 염불하도록 하고, 마음을 다하여 생각하며 소리를 끊고 생각을 멈추어 무념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을 취하였다. 또한 법문을 할 때도 대중들이 일제히 염불하여 산란한 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청정해질 때 법좌에 앉아 법을 설하였다. 무상은 염불을 중시하는 관념이나 칭명염불하는 염불행자가 아니라, 단지 중생을 교화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염불(인성염불·引聲念佛)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5조 홍인의 제자 가운데 선집(宣什, 지선과는 도반)에 의해서 ‘남산염불문선종’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염불선은 무상의 스승들인 지선과 처적에게서도 드러난다. 한국선과는 달리 중국선에서는 염불과 선의 선정일치(禪淨一致)가 주류를 이루었다.

중생교화 방편으로 염불 강조

 
보리도량 벽에 그려진 무상의 행적이 담긴 벽화.

실은 중국의 수많은 여러 종파가 당나라 말기부터는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고, 정토종과 선종만이 번성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영명연수를 필두로 시작해 명나라 때로 접어들어 선과 정토를 하나로 보는 선정일치가 점차 선사들에게 확대되어졌고 현재까지 그 사상은 이어지고 있다. 대표되는 선사가 바로 명나라 때의 운서주굉이며 근대의 선승이신 허운 스님에게서도 드러난다. 허운 스님의 법문 중에도 염불시수(念佛是誰·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공안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더워도 너무 덥다. 36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햇볕이 강하다 못해 시뻘건 불을 토해 내는 것 같다. 평소에 한국에서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강의하러 가는 일 이외에는 방구석에 처박혀 논문 쓰는 일로 2년을 보내면서 멀리 떠나고픈 마음이 불쑥 불쑥 일어나곤 했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와 있는 이 자리에서 나의 마음 상태는 어떤지에 대해 내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인간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요, 그 자체가 둑카(苦)이다. 어디서나 문제의식은 있게 마련이다. 벌써 한국을 떠나온 지 보름이 다 되어가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는 새로운 문제(苦)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니 인간은 어디에 살아도 발생하기 마련인 고통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지는 법이다. 스승들의 행적을 찾아가는 이 순간에 행복해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다면 어디에 유토피아가 있을 것인가. 이 순간의 내 마음을 관(觀)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평온이 있을 것인가.
 
정묵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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