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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마조 선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⑤천곡산(天谷山)

기자명 법보신문

두타행 펼친 무상의 기상이 가슴으로 전해지다

 
무상이 두타행을 했다는 고태안사. 2008년 지진으로 사찰은 완전히 폐허가 됐다. 먼지를 뒤집어 쓴 관세음보살상 뒤로 대웅전 조성 불사가 한창이다.

사천성은 차(茶)의 명산지요, 차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명산현의 몽정감로차, 아안 지방의 아미모봉차, 아미산의 죽엽청은 사천성의 대표적인 차이다. 이전 여행할 때도 시간 여유가 되면 꼭 찻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곤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도량 내에 찻집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번 사천성의 몇 사찰들을 순례하면서 느꼈지만, 사찰마다 노천 찻집이 없는 곳이 없었다. 게다가 수십 석의 테이블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37·38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도 사천성 사람들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대담을 나누고 마작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차는 중국의 남방지역에서 특히 발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천 사람들의 차 마시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나라 때 동산양개(807~869) 화상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느 선객이 동산 스님에게 물었다.

“매우 춥거나 너무 더우면,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겠느냐!”
“도대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이 어디입니까?”
“추우면 얼려 죽이고, 더우면 쪄서 죽이는 곳이다.”

寒暑到來如何回避(한서도래여하회피)
何不向無寒暑處(하불향무한서처)
如何是無寒暑處(여하시무한서처)
寒時寒殺黎(한시한살사려)
熱時熱殺黎(열시열살사려)

법거량의 선적(禪的) 의미보다는 단순히 보기로 하자. 말 그대로 ‘이열치열(以熱治熱) 이한치한(以寒治寒)’인 것이리라. 나는 이곳 사람들과 똑같이 35도 이상 되는 그 더운 날씨에 100도 이상 끓인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마셨다. 연거푸 뜨거운 차 몇 잔을 마시고 나자, 몸의 열기가 사라지고 몸 전체가 시원하며 가벼웠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왜 중국인들이 더운 날씨에 뜨거운 차를 마시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한 사천성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차 가운데 고정차(苦丁茶)가 있다. 이 고정차는 청나라 황실의 여인네들이 즐겨 마신 차로 알려져 있다. 고정차는 차의 효과도 있지만 약의 효능도 있다고 하는데, 차를 자칫 잘못 우려내면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쓰고 정성들여 알맞은 온도에 우려내면 제호 맛에 비교될 만큼 묘한 단맛이 나온다.

무상·무주 스님 상주하며 수행

 
청성산의 대표적 도교 사원인 복건궁. 모습이 불교 사찰과 유사하다.

고정차를 마실 때마다 인간의 이중성과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같은 원료의 차이지만, 쓴 맛과 단 맛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인간의 가능성이 내포된 사상이다. 쓴맛과 단맛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차를 어떻게 우려내었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인간도 어떻게 자신을 길들이고 교육시키느냐에 따라 부처도 될 수 있지만, 천하의 악인도 될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선한 쪽으로 길들이는 습관이 바로 선업(善業)의 길이요, 수행이다.

이 수행 가운데, 출가 수행자가 욕망을 떨쳐내고 열반을 얻기 위해 처절하게 고행하는 것을 두타행(頭陀行)이라고 한다. 두타행은 마을과 떨어진 고요한 곳에 머물며, 왕이나 신도들의 공양을 따로 받지 않고 늘 걸식한다. 또 빈부를 가리지 않고 일곱 집을 차례로 걸식하는데, 만일 음식을 얻지 못했을 경우 굶어야 한다. 하루 한 끼 식사에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만 먹고, 오후 불식하며 분소의를 걸치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자며, 무덤가에서 무상관(無常觀)을 닦는 등 수 십여 가지가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가운데 상수제자인 가섭존자는 ‘두타제일’로 알려져 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의 시자가 되면서 부처님께 한 가지 약조를 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왕이나 장자의 집에 공양 초대를 받더라도 자신은 함께 가지 않는다는 약조였다. 12세기 티베트의 밀라레빠는 동굴에서 수행할 때 먹을 것이 없어 풀을 삶아먹었고, 신라 지장보살의 화신 김교각 스님도 구화산에서 수행할 때 먹을 것이 없어 발우에 흰 모래와 소량의 쌀이 담겨 있을 정도로 정진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송대 이후 중국 스님들 가운데 두타행을 한 스님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중국 스님들 가운데 두타행자는 명·청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다. 중국 근대 대표적인 선승으로 알려진 허운(1840~1959)스님은 젊어서 수행할 때, 두타행으로 일관하셨던 청정승려였다.

또한 고래로 섬서성 서안 부근의 종남산(구마라집과 종밀이 머물렀던 중국불교의 발원지라고 불림)은 두타행을 하는 수행자가 많았으며, 중국에 사회주의가 들어선 이래로도 출가해 종남산에 머문 수행자가 있을 정도이다. 또 한 예로 복건성 태모산의 한 승려는 50여 년을 두타행으로 산속에서 홀로 살았는데, 이 스님은 마오쩌뚱이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아무리 수행자라고 하지만 말이 두타행이지 굳은 심지가 아니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앞서 무상대사의 행적에서 ‘무상은 사천성으로 와 당화상 처적에게 법을 받기 이전과 법을 받은 이후에 천곡산(天谷山)에서 두타행을 하였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다. 무상대사가 두타행을 하였던 천곡산은 현재 사천성 서쪽에 위치한 청성산(靑城山)을 말한다. 또한 무상의 제자 무주 스님이 상주하던 천창산(天蒼山)은 청성산 30여 봉우리를 합해 총칭한 것이다.

이 청성산은 성도(成都)에서 서쪽으로 65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며, 도강언(都江堰)에서 10km 떨어진 곳이다. 도교의 명산으로서 중국 도교협회 본부가 있다. 동한 말기, 도교의 창시자인 ‘장도릉’이라는 도인이 도를 얻은 이후 도교의 발상지이자 대표적인 도교 순례지가 됐다. ‘도를 얻으려면 청성산으로 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이며, 예전에는 청성산에 도교 사찰이 70여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8곳의 도교사찰이 있다. 게다가 사천성이 고대로부터 전쟁피해가 없어 자연 그대로 보존이 잘 된 곳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 수긍이 갈 정도로 그윽하고 유서 깊은 산이다.

도교 발상지이자 대표적 순례지

 
사천성의 사찰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경내에 찻집이 없는 곳이 없다.

청성산을 가기 위해 도강언(都江堰)에 숙소를 정했는데, 전날부터 비가 엄청 내린다. 비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행할 때는 제일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장사꾼의 말을 빌리자면, 하루 공치는 셈이며 홀로 하는 여행객에게는 가장 쓸쓸한 시간이다. 빗님 덕분에 전날 오후부터 숙소에서 쉬었다. 오전 10시경 비가 조금 그치자, 바로 청성산으로 향했다.
이 청성산은 전산과 후산으로 나뉘는데, 청성전산으로 갈 것인지 청성후산으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선택한 뒤 출발해야 한다. 필자는 도교 순례지를 가고자 한 것이 아니므로 무상이 두타행을 하였다는 고태안사와 그 윗 봉우리인 백운동이 위치한 청성후산을 가기로 했다.

청성후산 입구부터 계곡으로 거의 30분 정도를 달리는데 그 계곡의 깊이에 절로 감탄되었다. 이런 그윽한 곳에 수행자가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을 것처럼 기막힌 절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마침내 청성후산 중턱인 고태안사(古泰安寺)에 도착해보니, 태안사는 2008년 지진피해로 인해 사찰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대웅전에 새로 조성하는 부처님과 법당, 먼지를 뒤집어 쓴 포대화상, 폐허가 된 자리에 우두커니 위치한 관음상만이 있을 뿐이다.

무상이 천곡산(현 청성산 고태안사 지역) 기슭에서 선정을 닦을 때, 암차열매를 달여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바로 앞에서 언급한 고정차를 말한다. 무상이 철저한 두타행을 하였던 곳이 바로 오늘날 전하고 있는 백운동의 암벽동굴이다. 이 백운동은 청성후산 고태안사에서 구승동ㆍ와불동ㆍ지장동을 거쳐 관음동을 지나 정상에 위치한다. 무상대사는 두타행을 하던 중 처적선사에게 가서 가사를 받고 다시 청성산에 들어와 수행을 하였는데, 이 부분에 대해 『역대법보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김화상은 가사를 받고 천곡산 바위굴에 숨어 버렸다. 풀을 엮어 옷으로 삼고 음식을 줄였으며, 음식이 없어지면 흙을 먹으면서 맹수가 호위해주는 영험이 있었다.”
또 『송고승전』에는 “무상대사는 한번 선정에 들 때마다 5일간 삼매에 들었다…. 무상대사가 산속에서 수행한지가 오래되어 갈수록 옷이 다 헤지고 머리가 길어 사냥꾼들이 그를 이상한 짐승으로 여기고 활을 쏘려다가 그만두기도 하였다…. 무상은 마을 부근인 성에 들어와서도 낮에는 무덤사이에 머물렀고 밤이면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였다”고 전한다.

무상이 두타행을 하였던 백운동 부근은 이전에는 케이블카가 운영되었는데, 2008년 지진피해로 인해 운행이 되지 않아 무상대사가 두타행을 하였던 백운동은 그저 눈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자연재해가 무섭기는 무섭다. 청성산에 오는 내내 파괴된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청성산으로 오는 산길도 보수중인 곳이 많아 차가 지연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무상이 두타행을 하면서 머물렀던 도량을 고태안사라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청성산에 와보니 굳이 태안사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태안사 사찰 연혁에도 무상 스님은 등장하지 않으며, 두타행을 하는데 굳이 사찰에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청성후산 수십봉의 봉우리와 울창한 골짜기 어느 곳에서 무상대사는 두타행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눈에 들어오는 봉우리 어딘가에서 지금도 무상대사가 깊은 선정삼매에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무상대사의 덕은이 따스히 나를 비치인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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