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수관(慈悲手觀)은 재가자를 위한 수행법으로써, 몸과 마음의 관찰을 통해 존재의 본질인 연기적 삶을 회복해나가는 불교수행으로 언제 어디서나 수행할 수 있습니다. 자비수관은 자비손의 자비심과 정렴(正念)의 알아차림이라는 관찰수단을 통하여 몸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깨쳐가는 수행입니다. 이 수행은 자비손의 자비심으로 5대(흙·물·불·바람·허공)의 생명 에너지를 활성화하고 활성화되는 5대의 현상을 정념으로 관찰하여 삼법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을 체득하게 되며 그 지혜로써 조작하는 의식의 활동이 사라지면서 무상(無相), 무원(無願), 공(空)의 삼해탈문에 들어서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비심입니다, 연기의 다른 표현인 자비심을 마음의 손에 가득 담아 내 몸에 전달함으로써 분노
3년 동안 매일 새벽에 염불수행 정진모든 장애의 실체가 ‘나’임을 깨달아 문사수법회에서 스님과 법사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나’라는 생각에 갇혀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을 하면서 선지식을 만나 눈을 뜬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가 시작된 것은 내 삶의 변화 자체였다. 그렇게 법문을 듣고 염불수행을 하면서 “산은 산이로되 옛 산이 아니오, 물은 물이로되 옛 물이 아니로다”라고 한 옛 선지식의 말씀이 비로소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변하면서 온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염불수행을 시작하면서 3년 동안 새벽정진을 이어갔다. 목요일 새벽에 경전을 공부하는 날과 회사 일로 지방에 출장을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정진을 했다.
‘변화하자’ 수 없이 다짐해도 작심삼일염불수행 후 ‘나’를 놓으면서 변화시작 누구에게나 부처님 법을 만나는 것은 가장 큰 사건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일대사 인연이라는 명확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을 게다. 따라서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의 정법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펼친다는 것이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말해 어떤 사람이 불교가 무엇인지, 염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다가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고 염불을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표현으로 답변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현은 바로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것도 아주 혁명적인 변화라는
참선 수행의 목적이 견성성불에 있다고들 합니다. 견성이 곧 성불이라는 분도 있고, 견성했다고 해서 성불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견성이 성불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우선 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아마 오로지 참선에만 몰두하시는 분들이 들으면 견성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저를 크게 힐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견성의 경지는 말할 수 없어도 견성에 대한 견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우선 견성이라는 용어는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 가운데는 없고 중국에서 파생된 선종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견성이라는 말은 불교 교리에 나오는 용어가 아니라 선가에서 쓰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견성이란 글자 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말입니다.
Q :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염불하고 절해야 가장 잘 하는 것이 됩니까? A : 부처님과 나를 둘로 보지 않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곧 부처라는 생각에 철저해야 하고 오로지 부처님 밖에 없다는 생각 뿐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중생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는 한 부처님과 나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된 존재, 성불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면 자꾸만 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구하는 마음은 그대로 탐심이 되어 욕구불만이 되거나 자만심이 들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며 절해야 제대로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는 염불이 최상승 염불이고
“박제화된 문화재, 관람을 위한 전시는 살아숨쉬는 문화가 아닙니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연결시켜 오늘날의 문화로 재탄생시키는 일이 바로 민속박물관의 역할입니다. 불교는 우리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가장 대표적인 영역입니다.” 지난 달 25일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임명된 신광섭〈사진〉 관장은 9월 1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불교 민속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아내가 독실한 불자라 사찰을 즐겨 찾지만 스스로 불자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는 신 관장은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향로를 세상에 드러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으로 능산리 고분군 발굴을 총지휘했던 신 관장은 백제 향로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리던 그 순간을 ‘무아지경’으로 설명했다. “그 순간을 어떻게 말로
본래 선은 언어와 문자로 나타내거나 가르칠 수 없고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써만 알 수 있고 전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법사님은 왜 말로 설명 하려 하십니까? 그렇게 저를 향해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불교, 그 가운데에서도 선가에서는 선에 대해 입을 열어 설명 하려는 행위 자체가 이미 선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행위라고 여겨 왔습니다. 선은 불립문자며 언어도단이며 교외별전이기 때문에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고 다만 묵묵히 참구하여 마음의 본성을 밝히는데 힘써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께서는 선에 대해 정작 저와 같은 입장을 취하시지 않았다는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선가에서 내려온 선이 같은 불교 속에서도 그 해석이 다르다는 사실에 한번쯤은
『부처와 꽃을 보러가다』스센제 지음 / 비채 잎이 모두 떨어진 후에야 꽃을 피우는 매화는 번뇌의 잎이 모두 떨어져야 열반의 꽃이 핀다는 이치를 일깨우며 담쟁이덩굴의 유장함을 보면서 우리는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도 유장하고 원대해야 한다고 느낀다. 척박한 땅에서 고난을 견디며 피어나는 라벤더를 보며 인욕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온 세상을 공양하듯 탐스럽게 피어있는 목련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도 한 송이 목련처럼 이 세상을 공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행의 참된 길을 돌아보게 해주는 꽃은 이렇게 우리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대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 『부처와 꽃을 보러가다』는 대만의 선승이자 문필가로 잘 알려진 스센제 스님이 꽃이 피고 지는 현상을 부처님의 가르침과 연결지어 법을 풀어낸 불
저는 강단에서 강의를 하는 강사인데 어떻게 수행에 대해 이야기 하는가 하며 여러분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수행법은 자비수관이라는 명상법입니다. 불교의 수행법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자비수관만이 결코 유일한, 최고의 수행법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자비수관이라는 수행을 통해 다른 모든 수행의 원리를 알고 각 개인이 현재 하고 있는 수행에 대해서도 그 원리를 명확히 알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자비수관은 재가자들을 위한 수행법입니다. 자비수관은 깨달음으로 가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이며 모든 수행을 할 수 있는 기초 수행법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자비수관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자비손과 정념이 두 방편 자비수관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수행법입니다.
문사수법회 경전학당 유마경 수강생들은 유마거사가 본래면목임을 깨달을 것을 발원했다. “지혜는 어머니요 방편은 아버지라, 일체 모든 스승들이 이로부터 나시었네, 법희로는 아내 삼고 자비심은 딸이 되며, 진실한맘 아들이요 공적함은 내 집 되어, 번뇌티끌 제자들을 뜻에 따라 가르치고 선지식은 길잡이니 이로부터 성불하리.(중략) 번뇌마와 음마사마 천마 등을 항복 받아, 승리의 깃발로써 도량을 세우리라.” 9월 5일 오전 10시 30분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위치한 문사수법회(聞思修法會) 법당. 문사수법회 경전학당에서 개설한 유마경(維摩經) 강좌에 참여한 불자들은 예불을 마치고 유마경 불도품(佛道品)을 발원문으로 삼아 ‘유마거사가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깨닫기 위해 정진할
유부에 씌운 구사론의 안경을 벗기다동국대 인도철학과 황 정 일 박사 역사에는 악역이 있기 마련이다. 악역은 주인공을 빛내는 가장 멋진 치장이지만, 역사적으로 선인이 악역으로 둔갑하는 예도 적지 않다. 이른바 글에 의한 왜곡인데, 불교사에 있어 설일체유부(이하 유부)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동국대 인도철학과 황정일〈사진〉 박사의 논문「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론 연구」는 대승불교의 악역으로 숱한 매도의 대상이 됐던 비극적 주인공 유부의 신원복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부는 삼세실유(三世實有)와 법체항유(法體恒有)를 주장했던 부파불교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학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한다는 삼세실유와 삼세에는 무수한 법들이 고유한 자성을 가진 채로 존재한다는 법체항유의
경에 일체유심조 또는 삼계유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방금 질문하신 내용은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안목에서 보실 때 자아와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서 그려진 허상에 불과합니다. 일체유심조 또는 삼계유심이라고 할 때, 일체와 삼계는 마음에 비춰진 대상으로서의 온갖 모습들을 말하는데 이것들은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서 나타난 현상일 뿐 결코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심이라는 말 중에 ‘심’은 참되고 한결같은 깨달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짓되고 변화하는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다는데 있습니다. 중생들은 마음과 객관세계는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마음 밖에 세계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염불 밖에 안 나오네요. 이렇게 부담스러운 자리는 처음이라서요” 9월 3일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첫 명예전문포교사 품수를 받은 김창엽 포교사(월주, 54)는 나지막한 염불로 말문을 열었다. 충남 천안의 쌍용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재직중에 있는 김 포교사는 “부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천리 길도 마다 않는 신행제일”로 포교사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하다. 김 포교사는 1987년 포교사 품수를 받은 이후 봉선사에서 경전 공부를 했으며, 천불사에서 철야정진에 참여하는 불자들을 대상으로 염불, 교리, 참선 등을 지도하고 있으며 매년 여름·겨울 방학때마다 한 차례씩 봉행하고 있는 3·7일 기도가 올해로 9년째를 맞이하는 등 남다른 신행 활동으로 평판이 높다. “기도할 때는 항
무려 3시간이 넘는 공연에도 전혀 지친 기색을 찾아 볼 수 없는 신유진 씨. 불교와 국악을 향한 그의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장마 끝에 찾아온 폭염이 전국의 산하를 용광로처럼 달구고 있을 때 즈음 대북의 힘찬 울림도 경주 불국사 경내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 “둥둥두~둥…. 둥둥두~둥….” 우렁찬 대북의 독려에 맞춰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는 300여 염불행자들의 함성은 대북의 외침을 타고 토함산 골골마다 스며들고 있었다. 벌써 3시간째. 북채를 잡은 신유진 씨는 이미 물에 빠진 듯 온몸이 푹 젖어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북채를 잡은 그의 손은 더욱 힘이 들어갔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는 오히려 생기가 넘쳐흘렀다. 지쳐가는 염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고전 맛보기 老子 道德經 道經 第2章 無爲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天下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추해지고,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선을 선한 것으로 알기 때문에 不善이 된다.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그래서 유와 무가 상대적으로 생기고, 쉬운 일과 어려운 일이 상대적으로 이루어지며, 길고 짧은 것이 상대적으로 비교되고, 높고 낮은 것이 상대적으로 기울게 되며, 音과 聲이 상대적으로 어울리고, 앞과 뒤가 상대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무위로 살림하며, 말이 끊어진 당처(當處)의
최근 한국 불교계가 안고 있는 최고의 화두는 바로 세계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계종은 수년째 종책의 하나로 해외포교를 제시하고 세계를 향한 발판 마련에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NGO단체들은 국제 NGO단체들과, 국내 불교학자들은 해외학자들과 인적·물적 교류확대에 전력하고 있다. 국제포교사들이 해외로 진출하고 조계종이 종단 차원에서 해외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학자들의 세계종교 판도분석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자 교수들이 나섰다. 한국교수불자연합회는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강원도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한국불교와 세계불교와의 대화’를 주제로 2006년 한국교수불자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는 「세계불교와의 성공적인 대화를 위하여」를 주제로
공부하는 도량 봉은사(주지 원혜 스님)에서 불자들과 일반 직장인들을 위한 경전 강좌를 개설한다. 봉은사는 9월 6일부터 11월 29일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법왕루에서 제5차 수요야간 법회를 통해 동화사 강주 지운 스님과 함께 ‘자비수관 강의 및 실참’을 진행할 예정이다. 봉은사는 그동안 ‘제4차 수요야간법회’까지 주지 원혜 스님의 천수경 강좌를 시작으로, 박인성 교수의 반야심경찬, 각묵 스님의 대념처경, 혜거 스님의 유식30송 강좌 등을 진행해왔다. 이번에 공부하게 되는 자비수관은 몸의 관찰을 통해 잠자고 있는 자비심을 발현시켜 구체화하는 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자비손으로 5대(지, 수, 화, 풍, 공)의 생명에너지를 활성화하고, 5대의 현상을 정념으로 관찰하여 삼법인(무상, 고, 무아)을
요즈음 미얀마나 태국 같은 나라에서 실천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싸나 수행법이 널리 보급되고 있습니다. 왜 대승불교의 가르침 속에서는 위빠싸나가 실천되고 있지 않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대승불교 용어 가운데 ‘관’이니 ‘견’이니 ‘조견’ 이니 하는 말들이 위빠싸나를 뜻하는 용어들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도’ 할 때의 조견이나 금강경의 ‘약견지성비상’ 할 때의 견이나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할 때의 관 등이 그 예입니다. 위빠싸나의 뜻은 ‘존재의 특성을 본다’입니다. 이때 말하는 존재는 나라고 여기고 있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가리키고 특성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 성질로서의 무상, 무아, 고를 가리킵니다. 즉 나라는 것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칙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생멸을 거듭하는
경주 불국사 자하문. 是惡非惡 從善非善 將逐符行 兵隨印轉 有時獨立妙高峰 却來端坐閻羅殿 見盡人間點頭 大悲手眼多方便 악이라 해도 악이 아니요, 선을 쫓아도 선이 아니로다. 장군은 임금의 부적(신표) 따라 행군하고 병졸은 장군의 도장 따라 진군하도다. 홀로 묘하고 높은 봉우리에 서 있다가도 문득 단정하게 염라왕의 궁전에 앉았도다. 모든 인간사를 달관하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니, 관세음보살의 방편은 무궁하도다. 〈보충설명1〉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선악은 모두 자신이 때때로 짓는 마음입니다. 장군이 받아서 지니는 임금의 명령이나 병졸이 따르는 장군의 명령이 다 똑같은 임금의 명령인 것처럼 어떠한 마음도 다 내가 지은 내 마음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마음은 변화가 너무 많아
Q : 염불하고 절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참회가 됩니까? A : 당연히 됩니다. 염불하고 절하면 업장이 소멸되고 참회가 되는 정도를 넘어 한량없는 지혜와 복덕이 갖추어 집니다. 염불절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가치와 공덕을 입으로는 다 설명 불가능 합니다. 염불절수행은 가히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아가다(阿伽陀, agada)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약은 어떤 병이든 다 치료가 되고, 어떤 독이든 다 해독이 되며, 먹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약입니다. 모든 나쁜 것을 다 거두어 가버리며, 그 가치가 한량없어 값으로는 도저히 매길 수가 없다고 해서 불사(不死)약, 무가(無價)약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저 감기 몸살 소화불량 정도를 다스리는 약이 아니라 요즘 같으면 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