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해를 더할수록 안락과 평화보다는 갈등과 고통의 그늘이 짙어지고 있다. 20세기의 1·2차 세계대전처럼 대량살상은 멈추었을지 몰라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 여전히 전쟁은 일상화되고, 전선에서의 숱한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달된다. 이렇게 무감각해도 되는 것인가. 과학을 필두로 한 학문의 세계는 인간의 지식을 축적하고, 사고파는 시장경제 주도자인 기업은 지구의 경계를 허물며, 국가 간의 숱한 우호 협약들이 매스미디어를 장식함에도 왜 우리는 이토록 불안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가.존재 자체가 불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가끔 종교란 아무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책, 아니 아무도 읽을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책 같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종교는 완전한 독서를 거부하기 위해 쓴 기묘한 책, 즉 책 너머의 책 같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나의 독해는 항상 미완이나 실패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종교만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종교로 인해 그만큼 나도 세상도 두꺼워지기 때문이다.사람은 나이가 들면 과거를 먹고 산다. 더 이상 미래가 맛있는 시간의 먹이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 속에서 발걸음은 더뎌지고
김진욱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이 시무식에서 예수를 찬양하는 시를 낭송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고위공직자의 준법여부를 감시하는 공수처장이 자신의 종교색을 직원들 앞에서 서슴없이 드러내며 스스로 공무원의 종교 중립 의무를 훼손했다니 아연실색할 뿐이다. 공수처장을 맡으면서 직면해 온 어려움 때문인지, 신앙심이 높아서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찬송가를 부르며 울었다고 한다.불교계의 비판에 “공직자이자 수사기관장으로서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더욱 유의하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한치의 치우침 없는 자세를 견지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세계문화유산이자 화엄종찰 영주 부석사의 전성기 사역은 어디까지였을까. 현재의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남쪽 산기슭에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선상에 이어져 있다.그래서 부석사와 관련된 연구나 조사는 주로 현재의 사역에 국한에 이루어져 왔지만 구전에는 무량수전 동서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동쪽 보물 제220호 석조여래좌상이 있었던 북지리 179번지 일대는 한때 동방사지(東方寺址)로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방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에 있는 절터라는 뜻이 와전돼 그렇게 불렸다
정치권력에 너무 가깝게 다가가서 혜택을 많이 보거나 종속되어 권력이 던져주는 당근 맛에 취해 있다가 그 권력의 몰락과 함께 큰 피해를 입거나 아예 역사에서 사라진 종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종교계를 향해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게도 멀게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쩌면 상식이라고 할 당연한 말이지만 이 당연한 일이 잘 안 되는 게 현실 세계이다.중국 동진시대의 혜원 스님은 여산 동림사에 은거할 때,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도연명과 육수정을 배웅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이 세속과의 경계
사나운 호랑이가 물러나고 모두가 좋아하는 귀여운 토끼해가 돌아왔다. 토끼는 실물도 귀엽고 정겹지만, 우리에게는 더 정겨운 전설 속 주인공으로 다가온다. 아쉽게도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달나라 계수나무 아래 방아를 찧는 토끼의 이야기보다 달을 정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토끼의 신비감을 잃어버렸을지 모를 일이다.토끼해를 맞아 되돌아보면 문명 발달이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이 보름달에서 방아 찧는 토끼만이 아니다. 전기의 발견은 우리에게 엄청난 문명을 선사했다고 하지만 그 대가로 잃어버린 것들 또한 적지
‘검은 토끼띠’의 해 계묘년(癸卯年)이 밝았다. 부처님의 전생을 담은 ‘본생경(本生經, jataka)이 전했듯이 토끼는 지혜와 헌신, 보시를 상징한다. 수행자에게 자신의 몸을 기꺼이 공양하는 토기의 희생을 보며 우리는 부처님 법을 올곧이 전하고 실천하는 전법의 의지를 더욱더 강건하게 다져야 하겠다. 조계종을 필두로 한 각 종단도 올 한 해 전법 활로 확대에 더 매진해야 한다. 지난해 새로운 집행부가 출범한 조계종과 천태종, 관음종에 거는 기대가 크다.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은 취임식에서 “진심으로 소통하고 신심으로 포교하며 공심
종교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의 큰 축을 법보신문 한 호에서 나란히 보게 되었다. 조계종이 종교간 화합·평화로운 사회 기원 트리등에 불을 밝혔다는 기사와, 조계종 중앙종회 특위가 종교편향 담당 전담조직 구성을 요구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종교평화를 실현하는 길에 있어서의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향과 수동적이고 수비적인 방향을 잘 드러내주기에, 주마가편의 마음으로 한 마디를 더 보태고자 한다.우선 적극적으로 다른 종교에 화합과 협력의 손길을 내미는데 불교처럼 큰 강점을 가진 종교는 없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종교의 교단을 떠나 당신에게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있다.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연속해서 더 큰 일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엎친 데 덮친다”는 말로 주로 사용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어쩌면 작거나 크게 이런 현상을 가끔 마주치고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외국에서 이민자로 25년 넘게 살아온 어느 한 가정에서 생긴 거익태산(去益泰山)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 가족은 코로나19로 인하여 4년이 넘도록 여행 한 번 못한 채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최근 두 달 동안의 한국과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이렇게 전 가족이 여행의 기쁨으
이태원 참사 희생자 49재를 맞은 12월16일 조계종은 위령재를 봉행해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희생자 합동 위패와 위령재 참여를 희망한 영정 67위, 위패 78위가 안치됐다. ‘이태원 희생영가 49재 영가 법문’의 한 줄이 아프지만 또렷하게 들렸다. ‘영가와 유족들이 느끼는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아들과 딸, 친구를 잃은 슬픔도 억누를 길 없는데 여당 시의원으로부터 ‘나라 구하다 죽었냐’는 막말까지 들었다. 격식을 제대로 갖춘 분향소는 참사 발생 47일이 지난 후에야 설치됐다.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는 위
언론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사건 보도와 정보 제공, 각종 사회적 의제를 제시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도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다. 불교 언론도 다르지 않다. 다만 포교와 교육, 불교를 외호하는 호법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12월6일 법보신문 임직원과 필진 등 구성원들이 올 한해를 성찰하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원로학자이자 ‘한국역사와 불교’를 주제로 2017년 1월부터 5년째 연재를 이어오고 있는 최병헌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가 필진을 대표해 축사했다. 최 명예교수는 법보신문의 발
주고받는 것이 좋을까, 안 주고 안 받는 것이 좋을까, 받고 안 주는 것이 좋을까, 주고 안 받는 것이 좋을까. 경조사비 이야기다. 주기만 했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알리지도 않았으니 받을 일도 없었다고 해야겠다.한동안 뜸하던 사람이 갑자기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 오면 아니나 다를까, 경조사 공지가 뜬다. 기분은 별로지만 애써 외면할 만큼 강심장도 못된다. 다들 엇비슷한 감정이겠지만 한국적인 정서상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어렵다. 마음속으로는 투덜대면서도 마지못해 봉투를 건넨다. 아까운 마음으로 줬으니
올해 내게 화두는 ‘죽음’이었다. 첫 시작은 이랬다. “참 희한합니다. 의학적으로 볼때 선생님은 벌써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참 운이 좋네요.” 올해가 막 시작하자마자 의사에게 들은 말이다. 당시 심장 혈관 곳곳이 막혀 심장의 기능이 10%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한 해가 어느새 저물어간다. 11월 달력을 뜯어낼 때면 올 한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우리 사회도, 국제사회도 참 다사다난했다. 그 가운데 죽음의 기운이 세계를 뒤덮은 우울한 해였다.우선 우리나라의 다사다난한 일부터 꼽으면 대
한국리서치 ‘2022 종교인식조사-주요 종교 호감도 및 종교 효능감’에서 불교가 1위(호감도, 47.1점)를 기록했다. 가톨릭(45.2), 개신교(31.4), 원불교(27.5)가 뒤를 이었고, 이슬람교(15.5)에 대한 호감도가 가장 낮게 조사됐다. 2020년에도 불교는 1위(50.9)였고 가톨릭이 2위(50.3)였다. 2021년에는 가톨릭이 1위(50.7), 불교가 2위(50.4)였지만 0.3점의 근소한 차이였다. 늘 3위에 머물러 있는 개신교는 28(2020), 31.6(2021), 31.4(2022)을 기록하며 불교‧가톨릭과는
우리 수행자를 부르는 명칭은 참 다양하다. 나는 그 중에 ‘걸사(乞士)’라는 말을 좋아한다. 저자거리의 거룩한 수행자들이 불자의 공양을 받을 수 있는 고귀한 선비라는 의미다. 사실 수행자를 무노동으로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도 있지만, 걸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우리 수행자들은 평생을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숙명이다. 조석으로 예불을 통해서 법을 내려주신 부처님께, 그 법을 대대로 이어오신 역대조사님들께, 그리고 그 대를 잇도록 뒷받침 해주신 불자들에게 늘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의식이다.한편으로는 동사섭의 실천행으로 사회복지 현장에 있는
북극 한파가 심술을 부린다. 입동과 소설이 지난 날씨가 너무 따스하다고 생각할 즈음, 갑자기 한파가 찾아왔다. 일기예보가 너무나 세세히 지구본을 돌리면서 알려주는 덕분에 짐작으로도 훤히 기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예전에는 정말 갑자기 찾아오는 북풍한설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정확한 예측을 전해 듣고 나름 준비를 하고 나니 추위로 고생스럽지는 않지만 한켠에서는 뭔가 허전한 기분도 든다. 삶의 여운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인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본능적 공포심이 있다. 유사 이래로
얼마 전 법보신문사 앞으로 두툼한 서류봉투 하나가 등기로 전달됐다.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한 재소자가 보낸 서류봉투에는 편지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교정노트가 담겨 있었다.재소자는 동봉한 편지에서 스님과 불자들의 법보시로 매주 법보신문을 받아보고 있다면서 “보내주신 법보신문으로 올 한해도 부처님의 크신 가피를 입었다”며 “15년의 길고 긴 담 안의 삶을 좋은 마음으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줘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어 한 달 전 발생한 이태원 참사를 언급하며 “재앙에 가까운 참사에 옥중에 갇혀 있는 죄인이지만 이렇게라
정토회가 ‘제1차 만일결사’ 대장정을 마쳤다. 그 여정에 7만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1시간 정진하고, 하루에 1000원 이상 보시하며, 하루 한 가지 이상의 선행을 실천해 온 만일이다. 주목해야 할 건 수행뿐 아니라 환경, 인권, 국제구호, 평화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함께 펼친 결사라는 점이다. 전문가들의 평가 그대로 ‘재가불자 신행의 새 모델’을 제시하고 스스로 입증했다.정토회가 창립된 건 민주화의 물결이 우리 사회에 도도하게 흐르던 1988년 3월이다. 군사 독재정부의 강압적 탄압이 있었고, 그에 대한 저항이 거세었
2020년부터 우리 사회를 덮친 코로나19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줄줄이 문을 닫는 사업체들과 밤 10시가 지나면 깜깜해지는 거리, 마스크가 필수인 외출…. 이젠 엔데믹이 가까워지며 많은 규제가 풀렸음에도 코로나 이전의 삶이 오히려 어색하다.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비대면’이다. 대면으로 진행해온 모든 일들, 회의를 비롯해 면접, 스터디, 영업, 심지어 각종 공연까지 비대면으로 이뤄졌다. 이젠 키오스크(무인 판매기)로 주문하는 게 익숙하다.이는 수행 패러다임도 전환시켰다. 기존의 수행자들은 선방과 같은 수행처에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화택유(火宅喩)를 통해 이 세상이 불난 집이라고 설하신다. 한 장자의 집이 “모두 낡아서 벽과 담은 무너졌고, 기둥뿌리는 썩었으며, 대들보는 기울어져 위태롭게 생겼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 나 한창 타고 있었느니라”라고 설하신다. 지금 이 사회와 세계는 불난 집과 다름이 없다. 각종 이념과 사상들은 서로 자신의 것이 옳다며 담장을 치고, 지성과 덕행에서 나오는 권위의 뿌리는 썩어가고 있으며, 정의와 평화의 대들보는 무너지기 직전이다. 욕망의 불길이 이들을 재료 삼아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불법의 위대한 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