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배워야 할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져 버린 한가한 도인을. (그는) 망상을 없애지 않고 진리를 구하는 일도 없다. 무명의 본래 성품이 그대로 불성이고 허깨비인 빈 몸이 그대로 법신이다.” ‘증도가’의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구절에 용해되어 있다. 수행자를 여기서는 도인으로 표명한다. ‘증도가’는 도인의 깨침에 대한 경계, 공부의 과정, 수행자의 정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삼학의 수행도 이제 끊어지고 해야 할 일도 없어져 버린 이 도인은 ‘자연’으로 돌아 간 것이다. 그는 망상과 진리에 대해 이제 관심이 없다. 그것은 무명의 본체가 불성이고 육신이 그대로 공신(空身)이며 법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백장광록』에서 ‘부처는 무사인(無事人)이고 무구인(無求人)’이라고 한 것처럼
‘증도가’는 ‘신심명’과 함께 선종초기의 대표적인 운문작품이다. 8세기말, 황벽, 임제, 조주, 동산, 등 많은 선어록에 그 인용이 빈번함을 볼 수 있다. ‘증도가’를 ‘선문비요결’, ‘불성가’, ‘도성(道性)가’라고도 했는데 ‘증도가’라고 정해진 것은 『전등록』 이후 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인도승에 의해 범어로 번역되어 ‘동방의 대승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증도가’는 이름그대로 ‘증도의 노래’다 증도가 현성(現成)된 도인에 대한 노래이며 도인은 증도를 향한 길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 노래는 명확한 의미를 모르더라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강의실에서 읽는 선전(禪典)가운데 증도가 만큼, 흡입력을 가지고 교수와 학생이 하나가 되어 읽는 선전은 없다. 이는 그만큼 단도직입
지난 세월 윤회의 업을 되돌아보면 몇 천겁을 두고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모르는 새에 긴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방종하여 그전 같은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닦는 길을 잃지 않게 하였는고. 실로 눈먼 거북이 망망한 바다에서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남이고 겨자씨가 바늘 끝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스스로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
깨달은 뒤 닦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성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이다. 불꽃처럼 사나운 태양이 머리위로 지나가고 있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다. 분명하게 지금 덥다고 괴로워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더운 줄 아는 것을 바로 돌이켜 이 속으로 들어가면 일체의 시비가 끊어지고 더위가 본래 없는 청량한 세계이다. 이것을 마음, 불성, 본래면목, 한 물건, 화두라고 이름 하지만 스스로는 일체의 이름과 모양을 벗어나 있으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는 원만한 성품이다. 또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법칙이며 공이고 일심중도의 세계이다. 조주스님은 이것을 무라고 바로 가리켜 보였으니
선정은 본체이며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의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선정이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 자성의 선정이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지혜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제 먼 바다에서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도착하는 배들은 저마다 마음의 등불을 치켜들고 항구는 어느덧 불야성을 이루었다. 법회를 마치고 서둘러 먼 길을 출발했으나 항구에 도착하니 섬으로 가는 마지막 배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굳은 비 내리는 늦은 뱃길에 오르니 선상에서 바라보는 밤바다는 멀리 이국의 정취를 대하는 듯 본분 납자의 살림살이를 더 없이 조촐하게 하고 있다. 수행의 길이 수없이 많으나 결국에는 선
대혜종고 선사께서 말씀하시길 ‘가끔 영리한 사람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법을 깨치고서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닦으려고 하지 않고 세월이 흐르다보면 예전 버릇에 빠져서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 번 깨쳤다고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려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펴서 갑자기 망념이 일어나면 아예 따라가지 말고 덜고 덜어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의 자리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달은 뒤에 소먹이는 행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은 안개처럼 빈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온갖 번뇌망상을 일으킨다. 처음 발심하여 마음을 닦는 사람들은 아직 공부길을 모르기 때문에 생각생각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누르는 것처럼 하고 몸을 조복 받는다고 하여 가지가지 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은 많으나 그대에게 한 가지 문을 가리켜서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대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예 듣습니다. 그럼 그대의 성품 가운데에도 많은 소리가 있음을 듣느냐. 이 속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소리와 분별을 얻을 수 없습니다. 중생의 고통이 한량없어서 끝없이 생사에 유전하는 것은 소리로 인하여 마음에 덮임을 입어서 물들어 버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소리로 가득하고 허공에는 소리의 그물로 빈틈이 없다. 보통 범부들은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따라가서 분별을 하고 번뇌를 일으켜 고통을 당하지만 수행하는 사람은 일체의 소리를 들을 때 소리가 소리가 아니고 그 이름이 소리인 줄 알아서 소리의 성품이 본래 공함을 살펴서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듣는 성품을 곧바로
어떤 방편을 지어야 한생각 기틀을 돌이켜 문득 자성을 깨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대의 마음일 뿐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리오.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앎을 구할진데 문득 얻지 못할 줄 알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적멸의 바다에 보름달 떠오르니 천 개의 섬마다 달 하나씩 머금고 연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달빛을 따라 관음상 앞에 나섰더니 초여름 밤은 풀벌레 울음소리로 밝아오고 소리마다 영롱한 달그림자 마치 관음의 교향곡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의 천진한 성품은 보름달처럼 홀로 외로이 밝아 경계를 따라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경계를 보면 곧 마음을 볼 뿐 달리 특별한 방편을 짓지 않는다. 며칠 전 장마 준비를 하려
돈오란 본래 성품에는 번뇌가 없고 한량없는 지혜가 스스로 갖추고 있어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차별이 없음을 말하며 점수란 본 성품이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습기는 갑자기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서 성인의 태를 기르는 것을 오래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잔칫날 같이 걸고 푸짐했던 장날이 파하고 나니 항구는 다시 북적 거린다. 하루의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붉은 해는 뱃머리에 걸려 있고 저 건너 피안의 섬으로 귀향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반야의 배에 오르고 있다. 섬으로 통하는 길은 금진과 신평 두 개의 배터가 있고 반야의 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것도 차별함이 없이 모든 것을 실어 나른다. 여기에는 돈오와 점수도 없고 더디고 빠름은 다만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큰스님께서 말한 견성이 참으로 견성이라면 이는 곧 성인으로써 마땅히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사람과는 다름이 있어야 할텐데 무엇 때문에 요즘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나투는 사람이 없습니까. 바람은 급하게 안개를 몰고 산꼭대기로 달음박질 쳐 오르고 마른하늘엔 천둥소리와 함께 번갯불이 지나간다. 숲속에 새들은 놀라 울음을 그치고 연밭에서는 청개구리가 일제히 합창을 시작한다. 연잎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저 건너 용두봉엔 벌써 소나기가 쏟아진다. 범부들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인 신통변화를 부리는 것으로 공부를 삼고 또한 일념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는 학인들도 무시이래로 익혀온 습기인 밖으로 향하여 구하는 생각과 아는 마음이 일어나 화두를 놓치게 되면 마치 태양을 구름이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부처가 무엇 입니까?” “내가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어도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큰스님의 간절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바로 묻는 그대가 부처니라.” “어떻게 보림공부를 해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이 말끝에 몰록 깨달았다. 입정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는 밑 없는 배를 삼매의 바다에 띄우고 금당으로 서서히 침몰하는 장엄한 낙조의 후광에, 천리를 달려왔던 생각의 길이 문득 끊어지고 거금도는 어느덧 부처로 좌정하고 있다. 선지식의 간절한 한마디는 광겁장도(曠劫障道)의 치렁치렁한 무명을 걷어내고 본래 청정한 마음을 보게 한다. 다만 천년을 하루 같이 새벽을 알리는 닭처럼 진실한 믿음을 요구할 뿐이
만약 불성이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몸 안에 있어서 범부를 떠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분명하게 해석하여 깨닫게 해 주소서. 그대 몸에 있건만 그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네가 하루 동안에도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혹은 성내고 기뻐하는 것이 어떤 물건인가? 세상의 욕망과 부모 형제를 버리고 출가한 수행자는 연밭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이 허허롭게 길을 떠나야 한다. 그러면 처처에서 깨달음의 기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순백의 향기를 해풍에 실어 멀리 육지로 보내는 찔레꽃에서 그를 만나고 산모퉁이 돌아서면 티 없는 동심으로 빨갛게 익은 산딸기에 빙그레 미소 짓는 너를 만난다.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에 더 이상 의혹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