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생이를 샀다. 제철에 듬뿍 사 손질 후 냉동실에 넣어 두면 싼 가격으로 한여름까지 먹을 수 있다. 추운 날 먹는 매생이국은 허기진 위장뿐만 아니라 얼어붙은 마음까지 확 풀어준다. 겨울철 별미다. 겨울철 별미를 봄과 여름까지 두고두고 맛보려면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찬물에 서너 번 씻어 매생이에 들러붙은 이물질을 제거해야 한다. 다 씻은 매생이는 물기를 꼭 짠 다음 먹기 좋을 만큼의 분량으로 나누어 각각의 비닐봉투에 담아 냉동실에 보관한다. 이렇게 보관한 매생이는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다시물을 붓고 끓이면 끝이다. 처치 곤란한
외출해서 돌아와 보니 대문 앞에 택배가 와 있다. 주소는 맞는데 받는 이가 누군지 모르겠다. 잘못 배달된 물건이었다. 돌려줘야 하는데 전화번호가 적혀 있지 않다. 택배회사로 전화를 하자니 8시가 넘어 업무가 끝났을 것 같았다. 내일 아침에 찾으러 오겠지, 싶어 현관에 놓아두었다. 저녁을 먹은 후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잠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인터폰이 울린다. 시계를 보니 12시 반이었다. 잠에 취해 인터폰을 받았는데 앞집 여자다. 혹시 택배 받은 것 없느냐고 묻는다. 받았다고 하니까 자기 아이한테 온 물건이란다. 지금
어. 이상하다. 목이 왜 이렇지. 새벽에 눈을 뜨는데 고개 들기가 힘들다. 죽창으로 찌르면 이렇게 아플까. 연자맷돌을 목에 걸면 이렇게 무거울까.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날카로운 통증이 뒷목을 치받는다. 새벽이라 병원에 가려면 서너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목을 돌릴 수도 숙일 수도 없다. 항상 내가 쓰는 몸이라 내가 주인인 줄 알았는데 결코 내 것이 아니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닦아주고 재워줬는데 이렇게 가차 없이 배신을 하다니. 당혹감도 들었다. 불안해진 남편은 응급실에 가자고 했다. 우선 통증에서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피가 흐르는
점심 무렵 산책을 나갔다. 햇볕을 쬐기 위해서였다. 노루꼬리만 한 햇볕이 스러지기 전에 서둘렀다. 옛날 사람들은 표현력도 참 대단하다. 겨울 햇볕이 얼마나 짧으면 개꼬리도 아니고 노루꼬리라 했을까. 사물에 대한 진지한 관찰에서만 나올 수 있는 비유다. 지금도 이 비유법을 대체할 만한 표현이 없는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가 사물을 건성건성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가능하면 하루에 한 번은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예전에는 이런 시간도 아까워 방안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발이 시리면 전기방석을 깔고, 등이 시리면 등에 전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우람한 나무들이 도로 양쪽으로 끝도 없이 늘어서있다. 나무들은 단순히 조경을 위해 심어놓은 것 같지 않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서 나고 자란 듯 수많은 가지가 사방팔방으로 거침없이 뻗어있다. 인공이 느껴지지 않는 생태는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인다. 거대한 고목들은 더부살이하는 식물에게도 넉넉한 어깨를 빌려 주어 고목 줄기에 고사리 같은 기생식물들이 곳곳에 붙어 있고 넝쿨식물들은 사다리처럼 늘어져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태고의 품에 안긴 느낌이다. 도로 폭이 결코 좁지 않음에도 넓은 나무들이 감싸 안으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흔한 풍경인데도 유난히 그 장면이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 이유가 그곳이 외국이었기 때문이다. 홍콩 센트럴역 부근의 맥도날드 매장은 무심코 잊고 지내던 나의 일상을 되돌아본 계기가 되었다. 지친 탓도 있었다. 쉼터를 발견하자마자 오전 내내 시내 관광을 하면서 쌓인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홍콩은 인도가 매우 좁다.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도 폭이 좁아 중심가에 있는 길이라도 한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홍콩 여행패스트푸드점 쓸쓸한 광경 목도‘혼밥’에 휴대폰만 보는 사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만나야 한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 한꺼번에 만나면 된다. 카페에서 잠깐 만나 얘기 몇 마디 나누는 것으로는 그동안 쌓인 그리움의 허기를 다 채울 수 없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잠을 자면서 얘기를 해야 갈증이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찾아간 곳이 쌍계사 템플스테이였다. 쌍계사를 선택한 이유는 그곳에 존경하는 스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전국에 흩어져 있던 그리운 얼굴들이 쌍계사로 몰려들었다. 서울에서, 부산에서, 안동에서, 전주에서…. 모두
2월에 대학을 졸업하는 큰아들이 취직에 성공했다. 대기업도 아닌 중소기업에 취직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큰아들의 ‘흑역사’를 들여다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온 식구 정성 다해 키운 큰아들기대 너무 크자 자퇴·가출 강행아들 입장서 생각하는 계기 돼대학입학과 취직…이제는 어른큰아들은 2대가 절에 가서 기도해 낳은 아들이다. 시어머니는 장손 집안에 시집와 1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는 며느리를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절에 가서 촛불을 밝혔다. 그다지 불심이 깊지 않던 며느리도 1년이
연말연시에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뵈러 갔다. 아주버님 내외가 내려가니 그 동네 사는 시동생도 왔다. 우리는 아이들이 다 커서 대학입시에 대한 부담을 잊은 지 오래지만 올해 고3 수험생이 있는 시동생은 얼굴빛부터 달랐다. 그 얼굴을 보니 예전 일이 생각났다. 5년 전 1월이었다. 둘째 아들이 고3이 되자마자 나는 수술날짜가 잡혔다. 수험생 뒷바라지는커녕 자칫하면 영영 아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죽음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아들에게 유언처럼 말했다. ‘엄마가 없어도 부처님법과
송년 모임에 갔을 때였습니다. 나이 지긋한 원로 선생님이, 당신은 10년 동안 한 번도 원고마감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10년은 고사하고 매번 마감 시간에 쫓겨 허둥거리던 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자부심이 담긴 말을 할 수 있을까.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앞좌석에 앉은 작가가 치명타를 날립니다. 새로 연재를 맡았는데 벌써 두 달분 원고를 미리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지런함이라니. 저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