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게 되어 내려갔다. 장소는 전주시 평생학습관으로 매주 화요일마다 세 차례 강의를 하는 일정이었다. 마지막 강의를 하던 날이었다. 관장님과 함께 사무실에서 차를 한 잔 마시는데 탁자 옆에 세워 둔 액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글씨가 삐뚤빼뚤하는 것으로 봐서 초등학생 시화전을 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시 제목 아래 적은 글 쓴 사람의 이름 곁에 숫자가 특이했다. 학년과 반을 뜻하는 2-3이나 5-2가 아니라 73 또는 82와 같은 숫자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스치는 느낌이 있어 관장님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그 자체가 법문이고 가르침이다. 특히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작가와의 만남은 더욱 그렇다. 특별히 나를 위해 법문을 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는데 그분들은 마치 나의 심중을 꿰뚫는 듯 그때그때 나에게 꼭 필요한 법문을 들려준다. 어떤 작가는 그림으로, 어떤 작가는 인생이야기로, 어떤 무명의 작가는 숲속의 비석으로 누워 법문을 펼쳐준다. 굳이 법문이란 형식도 취하지 않으면서 진짜 법문을 들려주었으니 고수들이 따로 없다. 이런 고수들을 만날 수 있는 나는 진짜 운이 좋은 사람이다.유난히 글쓰기 힘들어진 최근타고난
언니 집에서 지낸 열흘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산책할 때였다. 언니 집 옆에는 낮은 산이 있었는데 나처럼 등산 싫어하는 사람도 새벽마다 발걸음을 할 정도로 만만했다. 산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낮은 야산이었다. 산자락에는 곳곳에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어디서든 쉽게 산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계단은 마치, 산이라고 부담 갖지 말고 들어와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마다 산으로 향했다. 비 오는 날에도 갔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갔다. 늦잠 자는 날에도 갔고 저녁밥을 먹은 후에도 갔다. 35도가 넘는 더위
“옛날에 살던 우리 집 그대로 남아 있을까? 흔적도 없겠지? 한 번만 다시 가봤으면 좋겠는데.”언니들과 함께 찾아간 고향집재개발 지정으로 4년째 빈집폐허가 되어 쓰레기 나뒹굴어생주이멸 가르침 절실히 느껴광주 언니 집에 온 지 열흘이 다 되어 갈 무렵이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언니들이랑 함께 누워 뒹굴뒹굴하던 내가 말했다. 뜬금없다 싶었는지 셋째 언니가 나를 쳐다봤다.“가면 되지.”뭐가 문제냐는 듯 넷째 언니가 자신 있게 얘기한다.“주소를 알아야 가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광주 떠난 지 벌써 30년이잖아.”어리바리한 내가 풀이
세 자매가 만났다. 전화통화도 자주 하고 일이 있을 때마다 만나지만 세 자매가 한 장소에서 열흘을 보낸 것은 결혼 이후 처음이다. 각자 사는 곳이 다르고 가정이 있다 보니 시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자매는 모두 여섯이다. 그 중 둘째 언니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다섯 자매만 남았다. 이번 모임에는 셋째언니와 넷째언니 그리고 막내인 내가 참석했다. 광주에 있는 셋째언니 집으로 넷째언니와 내가 갔다. 넷째언니는 천안에서, 나는 용인에서 출발했다. 오랜만에 피붙이를 만나니 그저 좋다. 형제자매는 어린 시절에 같은 시
모든 일이 다 끝났다. 강의도 끝나고 원고도 끝났다. 심지어는 사람들과의 약속도 다 끝마쳤다. 이제 마음껏 쉬어도 된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가 한없이 좋다. 몇 달 동안 계속 긴장하면서 살아온 탓인지 놀면서도 노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혹시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데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달력을 확인한다. 아무 일정도 적혀 있지 않다. 앞으로 2주 동안은 판판이 놀아도 된다. 심지어는 연재하는 글도 휴가에 들어간다. 넘치는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앉
방을 정리하다가 대학교 때 샀던 책을 발견했다. 불문과를 다니면서 한국미술사로 전공을 바꾸기 위해 공부하려고 처음으로 산 책이었다. 색채를 생생하게 느끼며 공부해야 할 한국회화사 책인데 그림이 모두 흑백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아, 내가 이 책으로 공부했지. 감회가 새로웠다. 책을 펼쳤다. 첫 장을 넘기자 맨 앞부분에 내가 써 놓은 글이 있었다. 글은 짧았는데 행갈이까지 된 시구절이 두 줄로 적혀 있었다.기관 수장 욕심내는 스승에서만족할 줄 모르는 노욕 목격환호성의 껍데기에 쌓인 결과마음 수시로 점검하고 챙겨야‘그리하여, 다시/ 껍
장마철이다. 비가 내린다. 비는 조용히 내릴 때도 있고, 사정없이 쏟아질 때도 있다. 어떻게 내리든 상관없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비라 그저 반갑기만 하다. 무조건 많이 내려 메마른 땅을 적셔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비가 좋은 것은 집에 있을 때의 일일 뿐이다. 집을 나와서까지 좋은 것은 아니다. 빗길을 걸어가려면 우산을 들어야 하고 옷과 신발이 젖는 것을 감수해야 하니 귀찮고 성가신 일이다. 무거운 가방이라도 들고 있다면 더욱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빗길에 운전을 해야 하는 위험성도 만만치 않다. 특강 차 거창으로 남편과 함
여러 지역에 강의를 하러 다니면 좋은 점이 참 많다. 강의가 아니라면 평생 갈 일이 없었을 곳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지역을 벗어나 낯선 곳에 가면 우리 동네에서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밀려온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산세도 다르고 건물도 다르고 도로와 정류장의 교통안내판도 다르다. 사람들의 말투와 생활습관과 인심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언어와 생활방식을 지닌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분모 때문에 낯설다는 느낌보다는 친근함이 더 강하다. 우리 동네와 낯선 동네의
‘아직도 이런 풍경이 남아 있다니….’아련한 향수 일으키는 정겨운 풍경들선뜻 자기 우산 건네주는 친절한 사람예기치 않았던 선물 받고는 큰 감동타인 바라보는 시각 수정하게 만들어강의를 하러 목포에 갔다. 목포대 평생교육원 요청이라 강의 장소가 목포인 줄 알았는데 무안이었다. 목포와 무안은 붙어 있는 도시였다. 목포든 무안이든 낯설기는 마찬가지여서 두 도시의 차이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갔다. 지방 강의를 자주 다니는 만큼 아무리 낯선 장소라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부르는 측에서는 그게 아닌가보다. 기차를 타고
“지난번 조국 교수 강의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어요.”매끈한 미모·몸매 동경하나육신의 쇠퇴는 막을 수 없어우리는 불성이라는 미모 가져젊거나 늙거나 모두 아름다워서울에 있는 어떤 절에 강의하러 갈 때였다. 그 절의 신도 보살님 한 분이 그런 말을 했다. 조국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민정수석으로 임명된 사람이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강의도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강의 많이 다니던데 소문과 다르게 별로였나 봐요?”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출 수는 없지. 너무 완벽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줄 테니까. 조국
오늘이 인천 송도에서의 마지막 강의다. 5주 동안 인천 연수구에 있는 해돋이도서관에서 불교미술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런데 다섯 번을 왔으면서도 강의하느라 바빠 한 번도 정원을 산책하지 못했다. 드디어 오늘 그 다섯 번째 강의를 마치는 날이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다는 기약도 없으니 그 멋진 정원을 꼭 걸어봐야겠다. 걷다 시원한 그늘이 나오면 벤치에 앉아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어야겠다. 1시에 강의가 끝나면 점심 먹으러 가기에 바쁠 것이다. 강의 전에 걷는 게 좋겠다.보행에 불편주는 통유리 건물쉼 제공하는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