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고전소설 ‘토끼전’은 용왕을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는 거북이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거북이가 아니라 자라가 주인공이다. 자라를 뜻하는 한자가 별(鼈)이므로 ‘별주부전(鼈主簿傳)’, 토끼가 주인공일 때는 ‘토생원전(兎生員傳)’이라고 한다. 꾀 많은 토끼가 자신의 간이 육지에 있다고 속여 위기를 모면한다는 우화인데, 이는 불전설화인 용원(龍猿)설화에 근거한다. 용(龍)은 용왕이고 원(猿)은 원숭이로 보지만, 인도문화권에서 용은 악어를 뜻하기 때문에 ‘악어와 원숭이’ 이야기로 풀이한다. 인도의 용원설화는 부처
승이 정주 문수화상에게 물었다. “고인이 다리 하나를 의자에서 아래로 드리운 의지(意旨)는 무엇입니까.” 문수가 말했다. “오랫동안 앉아있으려니 피곤하구나.”문수는 운문종 선사로서 정주(鼎州) 문수산(文殊山) 응진(應眞)이다. 그 법계는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덕산연밀(德山緣密)-문수응진이다. 소위 조사선(祖師禪)의 전개와 전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기관(機關) 가운데 하나가 선문답이었다. 선문답이 보편적으로 발전하고 번영을 구가하던 선의 황금시대 곧 만당(晩唐) 및 오대(五代)의 시대에는 조사선이 납자들의 일
예나 지금이나 자기 이익이나 원한을 갚기 위해 행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저주’가 있다. 힘 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에게 하는 일종의 심리적 복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대의 나약한 심리상태를 이용한 전술이기도 하다. 권력이나 재산이 있다고 해도, 강력한 저주를 받게 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저주’라는 것이 실제 힘을 갖고 있는 것일까. 저주는 말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말에는 힘이 있기에 우리는 말로 상대방을 위로하기도 하고, 분노하게도 만들 수 있다. 그런 만큼 저주라는 행위
앞서 목탁의 유래와 목탁이 지닌 일반적인 의미에 대해 기술해 보았다. 이번호에서는 목탁이 지닌 보다 넓고 깊은 불교적 의미에 대해 얘기해보자. 목탁은 목어의 변용으로 물고기 모양의 성물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불교와 물고기와는 인연이 매우 깊다.절에 가면 물고기와 관련한 성물들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목탁을 비롯해 목어, 풍경 등이 그렇다. 물고기는 부처님이 모셔진 기단이나 벽화에도 등장한다. 절 이름 중에는 범어사(梵魚寺), 오어사(吾魚寺), 만어사(萬魚寺) 등 물고기를 사찰 명칭으로 삼은 경우도 있다. 사찰에서 불화나 단
안성 석남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영화 ‘소울’이 떠올랐다. 영화 ‘소울’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영화로 주인공인 조 가드너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던 재즈연주회를 앞두고 맨홀에 빠져 죽음을 맞이하면서 시작한다. 조 가드너가 사후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수 없다”고 도망친 곳은 태어나기 전 세상이다. 석남사에 가면 마치 그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보고 또 본 ‘소울’과 석남사에서 촬영한 드라마 ‘도깨비’의 주인공 김신이 풍등 날리는 장면이 내 머리 속에서 오버랩된 까닭이다. 잠재해 있던 생각들이
반려동물을 운송하는 업체와 어르신 일자리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요즘은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4분의 1인 약 591만 가구에서 반려동물을 키운다고 한다. 약 1500만명이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렇게 숫자로 이야기하면 와닿지 않지만 내 주위에 10명이 모이면 그 가운데 2~3명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들이 아프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 자동차가 없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렇게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급속히 늘다 보니 이것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펫택시’가 생겨나고 그 ‘펫택
동양화가 김선두 화백은 2002년 가나아트에서 열렸던 근현대불교미술전에도 참여했고, 2020년 불교미술인협회 창립전에도 출품하는 등 불교예술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곧바로 불교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보통 ‘불교미술’이라면 부처나 보살, 아니면 나한 등이 묘사되기 마련이지만, 그의 그림 속에는 이런 불교회화의 전통적인 주제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본인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깨달음’ 등 불교적 개념을 표현한 것임을 적극적으로 언급한다. 실제로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작품 안에서
오온설은 경험(혹은 존재)을 해체·분석한 것으로 ‘경험’의 구성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지 지각(知覺)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계기적 순서에 따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시간적·계기적 순서에 따른 지각의 과정에 대한 불교적 이해는 십이연기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그렇다면 하나의 경험을 예로 이 오온설에 따른 지각의 과정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나무를 보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1) 눈이 앞의 어떤 물질[색]을 감지한다: 색온2) 지각된 ‘색/물질’의 ‘형태’와 ‘색깔’ 등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
종교와 음악은 아주 밀접하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그리고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음악의 경우는 대부분 기록된 악보가 남아있지 않아 그 원형을 짐작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점은 공통이다. 우리는 이런 특징을 ‘시경’의 ‘송(頌)’에서 읽을 수 있다. ‘송’은 주나라 노나라 상나라 등의 종묘에 모셔진 조상신에게 올리는 제사 때에 사용되던 가사이다. 엄숙하고 신비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성경’의 ‘시편’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종교 음악의 특징이 많이 있지만, 가장 두드
어릴 적 고향 마을의 작은 감리교회에 달린 작은 방에 고○○씨(앞으로 ‘그’로 칭함) 가족이 옮겨왔다. 그 뒤 그의 처가 쪽에서 두 가족이 이주해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힘이 세고 입이 무거웠던 그가 ‘당시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내 둘째 형님(1948년생)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버님께 “해방 전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학교 선생을 하다 징집당해 인민군 장교로 복무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그곳에서 알게 된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은 성공의 지름길이면서 버려야할 폐습이었다. 유난히 강한 ‘우리’라는 의식은 공정한 경쟁보다 인연을 따지게 했고, 불합리한 결과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글로벌한 세상이 되면서 핏줄의 끈기는 묽어졌고 고향 없는 세대에 지연은 잊혀졌다. 학연 또한 ‘동문’이라는 의미 이상을 갖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그럼에도 같은 핏줄에 정이 가고, 신토불이(身土不二)가 역시 경쟁력이다. 같은 배움의 인연이 서로를 한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끌림 또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당전쟁을 거쳐 삼국통일을 완성한 문무왕대(661~681) 국가정책기조는 통합과 포용이었다. 삼국통일 원훈인 김유신이 문무왕 13년(673) 병상에서 왕에게 최후로 당부한 말은 당시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전략) 지금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적이 편안하여졌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大統)을 잇는 임금이 초기를 초기답게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나중을 잘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