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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서의 선교

기자명 이병두

가톨릭·개신교 군종장교만 수용소 허용…선교 독점

미군·이승만 정권, 불교·천도교 인사 포로수용소 접근 봉쇄
배타적 접근권 가진 가톨릭·개신교에만 유리한 선교 정책 
한국전쟁 당시 16만명 포로, 전쟁 이후 대부분 기독교 택해

거제도 포로수용소.
거제도 포로수용소.

어릴 적 고향 마을의 작은 감리교회에 달린 작은 방에 고○○씨(앞으로 ‘그’로 칭함) 가족이 옮겨왔다. 그 뒤 그의 처가 쪽에서 두 가족이 이주해와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데 힘이 세고 입이 무거웠던 그가 ‘당시 마을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어린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내 둘째 형님(1948년생)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아버님께 “해방 전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학교 선생을 하다 징집당해 인민군 장교로 복무 중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풀려났다. 그곳에서 알게 된 목사님 주선으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한다. 1960년대 초반 시골 마을에서는 ‘반공’과 ‘북쪽 사람들에 대한 무시와 경시’ 분위기가 짙었다. 그래서 그의 입이 더욱 무거웠고, 내 부모님 말고는 그가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나이 들어 역사와 현실에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되면서 ‘평양사범을 나온 엘리트인 그가 어떻게 교회와 인연을 맺어 내 고향 마을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져갔다.

대형 이승만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이른바 반공포로들.
대형 이승만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이른바 반공포로들.

1953년 6월18일 새벽 거제도를 비롯해 전국 수용소에 있던 이른바 ‘반공포로’ 2만7000명은 한국군 헌병들이 쏘는 카빈 총소리를 신호로 철조망을 뚫고 탈출했다. 포로들은 순식간에 빠져나와 경찰들이 안내하는 민가에 숨었다. 휴전(정전) 협상이 마무리되어가던 상황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승만이 미군의 작전지휘에서 벗어나 있던 헌병사령관 원용덕과 내무부에 내린 비밀지시에 따라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한국 공무원과 경찰은 민간인 복장을 준비해두었다가 제공했고, 미군의 수색을 피해 민가에 숨을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 일이 일어난 다음날 이승만은 자신이 ‘포로석방을 단행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나 자신의 책임 하에 1953년 6월18일 한국인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하였다. 내가 유엔군사령부 및 관계 당국과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고 이렇게 한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여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각 도의 지사나 경찰관서에 최선을 다하여 이 석방 포로들을 돌보도록 지시하였다. 우리는 우리 국민과 친구들이 이 조치에 협력할 것이며, 어디에서나 불필요한 오해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

이승만이 미군과의 마찰·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릅쓰고 포로 석방을 밀고 간 배경에 정치 승부사의 기질이 보이고, 이 부분만을 집중부각하며 이승만을 영웅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 뒤에는 이승만의 기독교적 세계관 및 한국전쟁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하며 반공 전선에 앞장서고 있던 가톨릭과 개신교를 망라한 범기독교계의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가톨릭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는 1950년 11월 한국전쟁이 “선악의 싸움인 사상전”이라고 선언하였고, 1952년 12월 방한한 스펠만 추기경(미국 뉴욕대교구장과 미군 군종교구장 겸직)이 미군을 상대로 연설하면서 한국전쟁을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 자유 수호의 십자군 전쟁”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이효상 등 평신도 지도자들도 가톨릭교도가 “사상전의 최선봉에 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개신교 지도자들도 전쟁 발발 직후 다양한 조직을 구성하여 전쟁 지원 활동을 펼치고 북진하는 연합군을 따라 북한으로 들어가 선무·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휴전 논의가 시작되자 ‘구국신도대회’ 등을 열어 휴전 반대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는 등 이승만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6월16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군 포로들에게 선교하는 장면.(출처: 국가기록원).
1951년 6월16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군 포로들에게 선교하는 장면.(출처: 국가기록원).

“군종제도의 창설에 따라 한국전쟁 중 신부 마흔다섯 명이 입대하였고 그 중 이북 출신 한국인 신부 혹은 신학생들 여섯 명이 메리놀회 신부들을 보조하여 포로수용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전쟁기간 중에 포로수용소에서 선교할 수 있는 특권도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들만이 누릴 수 있었다.”(강인철, ‘전쟁과 종교’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 당시 거제도 수용소의 경우 미군이 포로들에게 ‘불교·개신교·가톨릭 중 한 곳에 신자 등록을 하도록’ 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으니 배타적 접근권을 가진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이 정책이 유리했던 것이다. 

최근 발견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국인 신부가 북한군 포로들에게 가톨릭을 선교하는 장면’이 찍힌 사진, 2018년 국내에 번역·소개된 미국인 선교사 감부열(아치볼드 캠벨·1890~1977)의 저서 ‘한국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아바서원)에 실린 ‘중국군 포로를 상대로 미군 군목 우드베리 목사와 한국인 한병혁 목사가 찬송을 가르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을 통해서도 당시 가톨릭과 개신교 등 범기독교계가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선교에 기울인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
 

중공군 포로를 상대로 미군 군목 우드베리와 한국인 목사가 찬송을 가르치는 모습.
중공군 포로를 상대로 미군 군목 우드베리와 한국인 목사가 찬송을 가르치는 모습.

개신교계 매체 ‘기독공보’에 따르면, “1952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미국인 옥호열 선교사(Harold Voelkel)가 ‘만일 석방되면 은혜와 소명감에서 주의 종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라고 하니 641명이 거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실제로 신학교에 진학한 사람이 240명, 졸업 후 목사가 된 사람이 150명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에 군목으로 참전한 옥호열 목사는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가 평양·재령·함흥·원산·흥남 등에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동시에 배와 열차를 동원해 많은 북한 기독교인에게 월남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한 옥 목사는 600여명의 수용소 단체세례로도 유명하다.”

한국전쟁 발발에서 정전협정 체결에 이르는 3년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에만 허용된 군종장교들이 포로수용소와 군병원 선교를 독점하였다. 특히 개신교는 포로수용소 선교를 통해 약 16만4000명의 포로 가운데 14만명의 ‘등록자’를 얻었고, 세례를 받은 사람만도 6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은 범기독교에만 포로수용소 접근과 선교 기회를 준 미군과 이승만 정권의 특혜이고 불교와 천도교 등에는 접근 자체를 봉쇄한 차별이었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89호 / 2021년 6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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