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8000장…“聖句가 최고 인사” “올해엔 전단지 필요한 곳 많기를…” 지금이야 많이 줄었지만 불과 4~5년 전만해도 해가 바뀔 때면 어김없이 연하장이 오고 갔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라는 멋들어진 글씨체의 한문 한 구절과 ‘새해에도 가정에 화목과 만복이 깃드시길 어쩌구~’하는 내용들. 간혹 보내는 이가 몇 구절 육필을 남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구누구 배상’이라며 보내는 이 이름까지 일괄 인쇄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쯤되니 뻔한 내용의 연하장은 누가 보냈는지만 확인하고 한번 쓱 열어본 후 서랍 속으로 직행하는 그저 그런 우편물이 된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올해 68세를 맞은 최종화 거사가 보내는 연하장은 전혀 다른 경우다. 새해 받은 첫 우편물 속에서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
란저우를 벗어나면 삭막한 대자연과 마주하게 된다. 이 길은 4세기 초 법현 스님이 구법의 길을 걸으며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다. 오직 죽은 사람의 오래된 뼈만이 길 가는 이의 표지가 될 뿐이구나."라고 토로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늘도 날은 어김없이 밝아온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겁다. 어제 15시간의 강행군 끝에 우리가 란저우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가까워서였다. 불과 몇 시간 전이지만 마치 꿈결처럼 아련하다. 찬물을 머리에 쏟아부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란저우가 어둠을 밀어내고 거대한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란저우(蘭州)는 서북부 최대의 공업도시로 300여 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대도시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인구 수십만의 변방도시였으
경전 등서 가려 뽑은 주옥같은 처세 조언 많은 사람이 나를 따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을 보살피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며 덕이 있는 사람의 태도는 어찌해야 할까. 처세와 성공에 관한 조언을 다룬 책들이 홍수를 이루며 베스트 셀러의 자리를 장악해 버린 것이 요즘 출판계의 형국이다보니 이런 고민에 대한 답서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너도나도 앞다퉈 처세와 성공 비법을 탐독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성공보다는 옳은 일인가를 먼저 살펴라”는 만해 스님의 가르침을 당당히 앞세우고 있는 그 당돌(?)함 때문이다. ‘지도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사람을 길러내는 이치’ ‘사람을 다스리는 법’ ‘최후의 5분간’ 등
천수천안 원력으로 자비심 소록소록 마음자세-호흡법 살리면 선정에 부처님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깨달은 자의 형상인 32상 80종호의 원만상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불 수행은 관상법을 통하여 보다 선명하게 부처를 확인하고 그 부처와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이르게 된다. 관상법에 대한 선법은 인도불교의 탄트라 수행에서 이미 7세기 경부터 발전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탁월한 수행 방법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관상법의 시작은 나의 몸과 내면이 관상하고자 하는 대상과 완전한 일치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러므로 불보살을 관상할 때는 내 주변도 정토가 된다. 이미 내 안에 부처의 씨앗인 불성이 잠재하고 있으니 그 부처의 깨달음이 밖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멀리 치롄산맥 아래 긴 굉음을 울리며 사막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화물열차가 보인다. 자위관을 뒤로 하고 차는 둔황을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누런 사막 위에 길게 뻗은 도로가 마치 검고 굵은 한 마리 뱀 같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 있는 구름은 어린 시절 고향 산천에서 보았던 하얀 눈마냥 뽀송뽀송해 보인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아득한 길, 이 길은 둔황으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 때다. 멀리 긴 굉음과 함께 아스팔트보다 짙은 육중한 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량, 두량, 세량…. 끝이 안 보이는 게 족히 오십량은 됨직하다. 땅 덩어리가 크다보니 화물열차도 저렇게 긴 걸까
불황의 탓인가, 아니면 불연 듯 떠오른 그리움 때문일까. 베스트 셀러를 기록했던 책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재개정판으로 간행되고 있다. 1999년 단행권으로 출판돼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거지성자』와 이듬해 출간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를 한데 엮은 『거지성자 상·하』가 출간됐다. 현실의 고통을 피해 도망치듯 숨어든 독일 유학에서 만난 수행자 페터 노이야르를 통해 저자, 그리고 독자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삶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 지에 관해 배울 수 있게 된다. 이전에 비해 깔끔해진 디자인과 편안한 느낌의 편집이 열독률을 더욱 높여준다. 안그라픽스 刊. 각 권 8,500원. 만해 한용운 스님 입적 60주년을 맞아 고은 시인의 『한용운 평전』도 새롭게 단장됐다. 1975년 처음
1940년 2월 24일 입적 용성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격동기 속에서 불교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명성을 날린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스님은 대각 운동을 펼쳐 침체된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작업에 주력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또 3·1운동 당시 만해 스님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 강점기 속에서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도 최일선에 섰던 인물이다. 스님은 열여섯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수도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다시 해인사에서 출가를 한다. 해인사에서 승려로서 기본 소양을 배운 용성 스님은 이후 의령 고운사를 찾아 수월 스
무문관 6년 수행후 매년 서너달씩 도보로 전국 순례 “삼독심 없애는 게 수행…걸으면 그런건 절로 사라져” 편리와 빠름이 미덕인 사회다. 산과 강의 속살을 헤집은 도로망들이 마치 얽힌 실타래 같고, 그 길마저 각질 같은 콘크리트로 뒤덮여 있다. 그 옛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족히 이삼십일은 걸렸겠지만 요즘은 자동차나 기차를 타면 반나절이면 갈 수 있다. 이제 그것도 느린지 오는 4월 1일이면 서울서 부산까지 2시간 40분만에 주파하는 놀라운 속도전의 세상이 시작된다. 이런 ‘빨리 빨리’ 문화 속에서 느림은 곧 게으름이며 무능력으로 취급받기 싶다. 도봉산 선각원(蟬覺院) 원공 스님. 그는 현대사회 속에서 기인(奇人)아니면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평가 받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26년의 세월을
도는 가까이 있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우주의 진실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이란 어디인가? 바로 코앞에 있다. 콧구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숨 속에 있다. 들고나는 숨 속에 생사가 그대로 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항상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또 있다. 마음이다. 마음의 움직임은 그대로 우주만유의 움직임이다. 마음의 실체를 보고, 마음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마음을 부릴 수 있으면 우주를 내 것으로 하고 우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불교의 수행은 가장 확실한 사실을 통해서 가장 확실한 세계를 실증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이다. 호흡의 들고남은 가장 확실하지 않은가. 마음의 움직임은 일체만유의 주인이 아닌가.불교의 수행은 가장 가까이 있는 진실을 통해서 내가 주인이 되는
13개 불교 NGO ‘맑은정치 불교연대’ 발족 ‘행동 지침-선택 기준’ 홍보…설문 조사도 2004 총선을 앞두고 불교시민단체들이 깨끗한 선거와 정치 개혁을 위한 불자들의 행동지침을 제시했다. 교계 13개 단체 지도자들이 2월 19일 '2004 맑은정치 불교연대' 발족식을 갖고 총선 클린운동을 다짐하고 있다. 참여불교재가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조계종 중앙신도회, 대한불교청년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13개 불교단체들은 2월 19일 대한불청 만해교육관에서 2004 맑은 정치 불교연대 발족식을 갖고 ‘2004 총선 불자 행동 지침 및 선택 기준’과 ‘불자 클린 선언 운동’을 제시했다. 총선을 앞두고 불교계 시민·NGO단체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것은 지난 2000년. 당
2월 25일(수) △조계사 ‘생전 예수재’=오전 10시, 조계사 대웅전, 4월 9일까지. 02)732-2187 △호수문화대학교 ‘제2회 호수문화대학교 졸업식’=오전 11시, 일산노인종합복지관 대강당. 031)919-8677 △부산 혜원정사 ‘화엄산림 대법회’ =오후 2시, 혜원정사 대웅전. 051)866-7771 2월 26일(목) △조계종 교육원 ‘제26기 행자교육’=오후 1시, 제 21교구본사 송광사, 3월 19일까지. 02)732-4923 △능인선원 ‘춘계 합동 천도재’=오전 10시, 능인선원 대법당. 02)577-5800 △불교사회복지회 ‘특별순례-정초안택기도 및 방생법회’=오전 6시 30분, 경남 연화도 연화사. 053)476-6631 △오대산 월정사 ‘정념 스님 취임법회’=오
실상관 중심으로 호흡법-참회정진-기공 병행 禪 일상화-대중화-세계화 프로그램 개발 역점 서울 서초동 우곡선원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여기저기 좌복을 깔고 참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법회 시간이 아직 1시간 정도 남았지만 이들의 모습에서는 작은 흔들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깊은 산중에서 선정에 든 눈밝은 수좌들을 보는 듯했다. 깨달음에 출-재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우곡선원을 찾는 사람들은 지극한 깨달음은 오히려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곡선원, 지난 98년 우곡 장명화 선사가 문을 열면서 한국불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곳이다. 짧은 연혁에도 우곡선원은 한국불교 처음으로 정부초청 외국인 국비 장학생들에게 참선교육을 실시해 큰 관심을 불러일으
1948년 2월 29일 입적 석전 박한영 스님은 선암사 금봉 스님, 화엄사 진응 스님과 함께 태고 보우 국사의 선맥을 잇는 태고 선종의 3대 강백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삼장 강설을 주로 하면서 경사사집과 노장학설을 모두 섭렵하고 일제 강점기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 유신운동을 펼쳤는가 하면 올바르게 시대를 이끌 수 있는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근현대 대표적인 선지식이었다. 1870년 8월 전북 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석전 스님은 17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 금산 스님에게 들은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전해주자 크게 발심해 출가를 결심했다. 19세 되던 해 금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정호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이후 백양사 운문암에서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백담사 만해마을(사진)이 한국건축가협회가 수여하는 올해의 건축상을 받았다. 건축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한국건축가협회상 BEST 7은 전년도 1년간에 완성된 작품을 대상으로 가장 우수하고 건축적 성취도가 높은 7점의 작품을 선정, 건축가와 건축주, 시공자에게 매년 시상하는 상이다. 만해마을 건축가는 김개천 국민대 교수이며 건축주는 (재)만해사상실천선양회, 시공사는 (주)다짐이다. 백담사 만해마을을 이루고 있는 건축물들은 주변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주지도 않으며 따라서 건축물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생기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니며 방송작가로 인정받던 저자는 문득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 농부가 됐다. ‘남들에겐 이색적인 농사일이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던’ 시골 생활 6년. 그러나 6년 삶의 이면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토록 삶을 풍요롭게 해 주던 농사일은 지겨워졌고, 아침에 눈을 뜨면 뭔지 모를 불안감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에 떨어야했다. 농사꾼이 될 때 그랬던 것처럼 저자는 어느 겨울 날, 삼천 배를 결심했다. 스스로는 ‘겨울잠’을 자겠다 결심했지만 그것은 몸과 영혼을 덜어내는 처절한 감량의 시간이 되었다. 처음 삼천 배를 시작할 땐 무사히 마칠 계획으로 머릿속이 바빴고 조금 지나자 ‘참회합니다’가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이천 배에 다다르자 관세음보살 님께
64년 3월 14일 사망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범어사에 모인 1만여 불자들은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이 한마디로 토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렬 선두에 그가 있었다. 억눌려 있던 그의 가슴은 결의에 찬 용기로 뜨겁게 차올랐다. 일평생을 불교와 나라, 후학양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김법린 선생은 승려일 때는 선지식, 이후 학자로는 동서양의 깊은 천리를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양휘허(揚揮虛)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한 이래 1917년 범어사 강원에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고, 20세가 되던 기미년에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하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경으로 도피했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사회조사통계조사결과를 보면 한국불교계에는 그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조사결과에 의하면 종교인구는 늘어나고 있는데 불교인구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언필칭 “2천만 불교도…” 운운하면서 한국 최대 최고의 종교가 바로 불교라고 큰소리를 치며 자만해 왔다. 그러나 이번 통계청의 조사결과로 불교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구겨지게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동안 수차의 통계청 조사에서 늘 부동의 1위를 자랑하던 불교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왜 타종교에 비해 교세확장은커녕 신도수가 줄어들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스스로 밝혀내고 이에 대한 대응책 수립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불교는 국민에게 과연 무엇이며 종교로서의
스님의 손녀들 “할아버지 나라 구하려 중 돼” 자손 30명 평양 거주…김일성 “만해사상 발굴” 선포 3·1 독립만세운동은 올해로 85주년을 맞이했고 개인과 가족의 안위보다는 2000만 조선인과 님(조선)의 독립만을 등으로, 마음으로 짊어지려 했던 만해 스님이 입적한 지는 올 6월 29일이면 꼭 60년을 맞이하게 된다. 만해의 자손들은 현재 분단 남북을 상징이라도 하듯 만해의 독자 한보국의 자녀들은 북에서, 만해의 딸 한영숙은 남에서 각기 살아가고 있다.은 비록 이념과 체재는 달라도 남북 공통의 스승으로 추앙 받는 ‘만해’가 남북에서 어떻게 존경받고 있는지 집중 조명한다. 북한- “最後(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히 발표하라.” 1919년 3
진보적 사상가이자 근현대 불교 개혁의 선봉에 섰던 대선사로 추앙 받던 만해 스님이었지만 남한에서는 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사업에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이었지만 조계종에서조차 대처승이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갖지 않거나 그나마 50∼60년대 태고종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만해 스님을 기리는 사업도 그 이후 맥을 잇지 못하고 퇴색되기도 했다. 그러나 70∼80년대 재야 학자 등을 중심으로 학술적 연구가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만해 스님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운동이 비로소 시작된다. 이후 만해 스님에 관한 논문, 저술 등의 연구 성과물이 800여 편이 출간되는가하면 80년 만해사상연구회가 결성돼 스님의 불교, 문학, 독립운동에 대한 사상과 업적이 새롭게 부각되기 시
신화화된 만해 스님 사료 근거로 복원 “이해하기 어렵지만 용광로 같은 인물” ‘독립투사’ 혹은 ‘근대 시문학의 개척자’ 정도의 쉬운 수식어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해 한용운 스님에게 지금까지 붙여진 60여 개의 온갖 화려한 수식어로도 만해 스님을 다 그릴 수 없었다. 수백 여권에 달하는 만해 관련 서적과 기록들을 살필수록 더욱 그러했다. 만해 스님을 다룬 책은 이미 적지 않다. 스님의 시와 문학, 생애는 물론 사상까지 만해 스님에 관련한 각종 성과물이 700여 건에 달할 정도라니 ‘만해 한용운 평전’이라는 부제가 차라리 새삼스러울지 모른다. ‘작가의 변을 들어보자. “일반적으로 평전은 신비화로 포장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해에 대한 접근, 이해, 연구는 만해에 대한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