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쯤 유럽을 한 달 정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자연환경과 건축물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우리나라 곳곳에 오래된 사찰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듯 유럽의 곳곳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성당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성당을 구경하기 위해 길게 줄지어 기다려 입장권을 구입해 내부에 들어가 보면,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마침 미사시간이라 신부님과 신도들이 미사를 드리
2001년 3월6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는 바미얀에 있는 큰 석불을 파괴했다.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인 뮬라 모하마드 오마르는 “이것은 알라신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높이 38m로 세계 최대의 이 불상을 부수기 위해 탈레반은 처음 대공포를 쏘아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자 석굴 벽에 조성된 감실에 일일이 대전차지뢰를 넣고 다시 얼굴부분으로 대포를 발사해 한꺼번에 잇달아 터지도록 해서 결국 거대한 불상을 돌 부스러기로 만들었다.바미얀의 이 석불은 서기 400년 경 중국의 법현 스님이, 630년에는 현장 스님이 이곳을 지나며
병신년의 마지막 달력을 떼어낼 날이 코앞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모두들 지난날들을 뒤돌아보고 새해 설계를 하기 마련이다. 내 경우 올해는 본업인 시와 수필쓰기에 전념하고 후학을 길러내기 위한 수필문학교실을 열어 초보자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 것으로 자족하고 있다. 새해에는 더욱 성심성의껏 지도하여 시대조류의 화두이기도한 힐링의 한 방편인 ‘치유’의 방법 중 하나로 문학, 특히‘수필쓰기를 통한 자기 위안과 치유’보급에 힘쓸 것을 다짐해본다. 이렇듯 개인에서부터 크고 작은 집단, 특히 우리 불교집안 구성원 모두가 차분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한 국회의 가결로 헌법재판소가 바빠졌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고, 그에 반대하는 시위도 잇따르고 있다. 어수선한 정국이다. 그러나 슬기로운 우리 국민은 이 또한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할 아픔이라고 여기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는 생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대통령 탄핵안이 있기까지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로 불리며
조계종 총무원과 동국대 불교대학이 종무행정 인재양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그동안 불교계에서는 종무행정 전문인력 양성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총무원장 선거 때마다 제시되는 종책이기도 하였지만 아쉽게도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불교계 특히 상당수 일선 사찰의 종무행정은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종무행정의 전문성을 갖춘 종무원을 영입하여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사례들도 적지는 않다. 하지만 사찰의 업무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과거 부목, 불목하니 내지 처사가 하는 수준의
그 발전 속도가 너무나 빨라 눈비비고 다시 본다는 괄목상대(刮目相待)라는 한자성어는 대만의 불교계를 두고 한 말 같다. 지난 11월, 꽉찬 1주일 일정으로 그런 대만을 다녀왔다. 중화불교비구니협진회(中華佛敎比丘尼協進會)가 창회(創會) 20주년 특별행사로 ‘세계불교걸출비구니상[世界佛敎傑出比丘尼貢獻表揚獎]’을 처음 제정하고 한국 수상자로 전국비구니회 스님 네 분을 초청하였는데, 필자에게 동행의 기회가 주어진 덕분이었다.일반적으로 대만불교의 역사와 발전 현황을 소개할 때 대만불교계를 움직이고 있는 강력한 4대 종문(宗門)의
지난 주말에 불교산악회원들과 충북 괴산에 있는 ‘산막이 옛길’을 걷고 왔다. 올 가을엔 두 번이나 갈만큼 주변 운치가 좋아서였다. 댐을 막아 만들어진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둘레길은 누구라도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부근에 있는 천년고찰 G사찰을 참배하였다. 관광사찰화한 다른 절과는 달리 휴일인데도 참배객이 눈에 뜨이지 않아 적막감마저 감도는 아주 조용한 분위기였다.그런데 건축분야의 문외한인 내 눈에도 가람배치가 좀 거슬려보였다. 상단에 위치한 대웅전이 아래 마당 가운데 세워진 높은 탑신에 가렸고 그 좌우로 선방과
최근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과 박근혜 대통령 ‘헌정 유린’이라는 이슈로 온 국민이 분노와 허탈로 연일 시위에 나서는 가운데 대통령도 여당도 야당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생들의 안녕과 행복을 오로지 염원하는 우리 불자들의 시각으로 지금의 이 사태를 보면 나라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가 잘 돌아가면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없겠지만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어리석었던 우리 국민들의 공업(共業)을 어찌 비켜갈 수 있겠는가? 이참에 우리
포교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한국불교의 도처에서 들려온다. 한결같이 한국불교의 교세를 걱정한다. 불교의 교세가 약화되고 있으며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의 성장과 불자인구의 고령화를 고려하면 매우 일리 있는 고민이다. 하지만 포교의 목적을 교세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흔히 사람들은 포교를 교세 확장 즉 신도 수를 늘리는 것으로 간주하고는 한다. 물론 신도가 줄어들면 종교조직도 쇠퇴하기 때문에 불교 신도 수의 증가, 즉 교세 확장을 고민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교의 포교 목적을 교세의 확장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이 역설의 싯구는, 아무리 힘든 절망 속에 있더라도 ‘날개가 있기 때문에 다시 날 수 있다’는 오스트리아 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의 간절한 소망일 뿐, 현실에선 추락하는 모든 것은 이미 날개를 상실했다. 이제 더 이상 날아오르지 못한다.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식물정부, 무정부 상태로 표현되는 총체적 위기의 현 정치상황과 거국내각, 조기대선 등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갖가지 제안들로 온 나라가 요동치고 있다. 정치 현안에 대체로 무관한 영역의 필자
지난주에 불교 산악회원들과 설악산에 다녀왔다. 한창 단풍철이고 46년 만에 개방했다는 만경대를 탐방하러 가는 사람들이 몰려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온통 북새통이었다. 우리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 다른 계곡으로 발길을 돌려 산행을 하고 돌아왔다.그런데 주차장 한쪽에서 승복을 입은 두 분이 복사한 관음도(觀音圖)를 붙여 놓은 흰 상자를 앞에 놓고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특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흔치 않게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분들 신분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그것을 보는
요즘 우리나라가 많이 어렵고 시끄럽다.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이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사적인 이익과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급급해서 정책을 펴다보니 나라의 체질이 허약해져서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와 우리 국민들은 원칙을 지키고 근본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부처님께서는 나라를 바르게 이끄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남기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밧지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가다의 아자타사투왕이 밧지국을 쳐들어가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밧지국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지키는지를 먼저
법보신문이 신도들을 대상으로 ‘불자답게’라는 신행 캠페인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불자답게 산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법(佛法)을 지키고 살자는 의미이다. ‘불자답게’ 캠페인은 그 동안 한국의 불자들이 불교를 불교답게 신행하지 못했음을 되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향후 한국의 불자들이 불자답게 삶으로써 불자로서의 자긍심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하게 해준다.그런데 한국불교에 있어서 불자는 흔히 스님과 구별되어 신도로 이해되기는 하지만 그 본래 뜻이 불제자이기에 불자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스님들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비구니계 부패집단으로 매도전법·복지·사회참여 등은 외면한국불교 훼손하는 망언 그쳐야 며칠 전, 평소 비구니 교단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지인이 비분강개한 어조로 전화를 했다.“스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비구니스님들을 ‘남자 승려들에 빌붙어 아부하는 여자스님들’로 매도하며, ‘이런 이들이 비구니계를 꽉 잡고 있다. 위쪽에 있는 지들끼리만 서로 돌봐주고 그런 관계가 형성돼 있다’고 주장하는데, 도대체 합리적 추론과 체계적인 논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야할 학자가 어떻게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습니까?”이것은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얼마 전이었다. 교계신문에 실린 기사에 눈길이 머물렀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도움받기 꺼려하는 스님’이라는 머리기사였다.“포교와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은 병마로 인한 고통, 경제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실상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지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스스로 감내하는 경우도 많다. 수행자로서 스스로 건강을 지키지 못했다는 주변의 시선으로 인해 투병사실을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다.스님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포교와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종단과 교구본사에서 나서 의
청담동 주식부자로 유명세를 떨치던 이희진이란 젊은이가 9월5일 사기혐의로 구속돼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허위 주식정보를 이용해 헐값에 매수한 장외 주식을 비싸게 팔아 부당 이익을 챙긴 혐의인데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 숫자만 3000여명이고 피해액도 무려 1000억원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희진은 대주주와 결탁해 대주주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개인 투자자들에게 시세보다 50~100%이상 비싸게 팔았으며, 자신이 매수해 둔 장외 주식 일부에 악재가 있었음에도 이를 숨겨 비싼 가격에 판 혐의를 받고 있다.
“도대체 우린 중(僧) 정신이 없다.”지난해 조계종 총무원장스님은 요즘의 스님들이 출가 승려로서 가치관을 갖추고 있지 못한 현실을 질타했다. 비록 표현은 거칠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승가에 대한 총무원장스님의 진솔하고 절박한 현실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중 정신’을 갖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는 스님이 출가 사문(沙門)으로서 여법한 가치관을 갖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사문이란 출가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사람이기에 사문의 가치관은 탈세속적이어야 한다. 즉 스님은 탐냄(貪), 성냄(瞋),
더워도 너무 더웠던 올 여름, 스님들이 모여서 법률 특강을 들었다. 이른바 ‘김영란법’ 특강이었다. 그게 신기하여 일간지들이 갖가지 제목으로 기사화 했다. ‘스님들도 김영란법 열공 중’ ‘스님도 김영란법 적용 대상?’ ‘조계종, 종교계 처음으로 김영란법 특강’ ‘김영란법 공부하는 스님들…왜?’ 등등.김영란법의 정식 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로 법안을 발의한 김영란(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김영란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법에 사람 이름이 붙는 것은 세 경우로 나뉘는데, 발의한 사람의
며칠 전이었다. 어느 일간지의 한 면 상단에 실린 기사 제목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했었다. “10년 내에 한국불교 존립할 수 없는 상황 올 수도 있다”라는 기사였다. 그것도 기자가 쓴 기사가 아니고, 조계종 포교원장 지홍 스님의 말씀이기 때문이었다.스님은 “탈(脫) 종교화 시대에 종교가 사회의 요구와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다”며 이에 따른 출가자와 신도의 급감과 고령화, 군소 사찰의 어려운 운영문제 등을 불교의 위기로 꼽았다. 또한 “더 심각한 것은 종교가 자본주의 병폐에 물들어 승가가 사회적 요구에 부흥하지 못하는 것”이
올봄 조계종은 총무원장 선출제도로 어느 때보다 쟁론이 뜨거웠었다. 그리고 현재 그 쟁론은 학자들간에 율장의 유·무용론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사부대중 100인 대중공사’의 총무원장 선출제도 브리핑자로서 전국의 사찰을 다녔으며, 총무원장 선출제도에 대한 중립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직선제를 대변하는 것으로 오인 받아 중앙종회에서 곤욕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전국 사찰에서 총무원장 선출제도를 브리핑하면서 무엇보다 아쉬웠던 일은 이런 개인적 곤욕이 아니라 한국승가가 율장을 현대사회에서는 지킬 수 없는 규범으로 아예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