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사방이 눈으로 덮여 있는 스위스의 설산 꼭대기에 헬기를 타고 올라간다. 칼바람을 맞으며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풍경을 바라보다 장비를 확인한 후 스키를 타기 시작한다.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광에 감탄하고 시원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바람을 맞으며 두어 시간 무아지경으로 즐기다보면 어느새 마을이 보인다. 지친 근육을 풀어주는 극락 같은 야외 온천에 들어가 알프스산맥의 풍광을 즐기는 여유로운 휴가의 모습은 청년 A의 버킷리스트 1번의 내용이다.지친 이들을 깨달음 지혜로말끔하게 씻어주는 극락물물의 차갑고 따뜻함 정도는우리 마음으로 조절
우리의 본질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정해진 실체적인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정해진 자성은 없지만 그렇기에 인연을 따라 다양한 것을 이루기도 합니다. 나를 얼마나 활짝 열어놓느냐에 따라 우리는 비좁은 내가 될 수도 있지만, 무한하고도 드넓은 가능성의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를 가두지 않고 확장하면서 활짝 열어놓을 수 있을까요? 그 하나의 방법으로 자연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자연과 교감하는 삶을 사는 것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비좁은 곳에
오랜만에 강원도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냥 여행이 아니라 꽃다운 20대를 우리 절에서 보내고 서른 살을 넘겨 강원도 남자와 인연을 맺은 조카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평소에 한 번씩 가던 강원도 길이지만 왠지 그 날은 기분이 다릅니다. 조카는 어려서부터 유독 저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많이 놀아주지도 못했는데, 대학을 들어간 조카는 어느 날 저를 찾아 남원 실상사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리곤 이런 저런 인연으로 대학을 졸업한 조카는 재단에 소속된 절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정든 딸자식 결혼을 앞두고혼수를 챙기는 어머니 보며비록 자신
스님이 되고 나서 특이한 관점이 생겼다. 어느 집에 가든 이상하게 작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해인사에서 출가해 20명은 거뜬히 생활하는 넓은 행자실, 1000명은 거뜬히 수용하는 공양간, 수백 명이 함께 예불 가능한 큰 법당, 수천 명이 운집해 정대불사하는 넓은 도량을 누비며 살았기 때문일까? 3평짜리 작은 공간에서 살아가던 내게 출가는 공간감각에 대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탐욕 부딪칠 때 분노 꽃피고어리석음이 고통의 씨앗 돼욕심 없는 무한한 마음만이인간 속 문제 단번에 해결해극락세계를 다루는 경전의 양은 엄청나다. 우리나라의 국민들
만약 내 아기가 다른 집 아기보다 늦게 걷기 시작한다면, 혹은 옆 집 아이에 비해 영어도 수학도 심지어 운동도 못한다면, 어울리던 또래 친구들은 다 원하는 특목고에 진학을 했는데 내 아이만 가지 못했다면, 다른 남편들은 잘만 진급하는 것 같은데 우리 남편만 진급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남들과의 ‘비교’에서 옵니다.현실 자체는 나쁜 일 없지만다만 비교가 괴로움 만들어박탈감보다 우월감 더 위험당당하게 독자적으로 살아야현실 자체만을 놓고 보면
올해로 제 나이가 50살이 됐습니다. 10년 터울이 될 때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홍역을 치릅니다. 생각이 머리에서만 돌고 정리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글로 옮겨보았습니다. 내 머리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았습니다. 한 참을 적고 또 적어보았더니 좋은 생각도 있고, 엉뚱한 생각도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적힌 한 어구가 있습니다. ‘도대체 알 수가 없구나.’ 그리곤 끝을 맺었습니다.어떻게 살까를 고민하지만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아 주변 살피며 대화하다보니아
절에서 생활하면 청소를 참 많이도 합니다. 생활장소를 청정히 하는 것이 마음의 번뇌를 닦는 것과 연관이 있어서겠지요.부정적 감정 수명 오직 90초이는 그저 연약한 존재일 뿐가만히 바라보고 대발원하면수행의 꽃 피우는 원동력 돼어느 날 대중들이 운력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띵가띵가 놀고 있는 사미를 발견한 비구가 걸레를 빨아오라는 미션을 줍니다. 사미는 속으로 ‘이 비구가 나를 너무 괴롭힌다’라고 생각했지만 티를 내면 ‘참회’가 예상되기에 억지로 그 순간을 모면했습니다. 걸레를 빨기 위해 강가로 간 사미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불
보통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은 ‘내가 많은 것을 안다’ ‘지식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도 이처럼 ‘내가 불교를 좀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불교의 이론과 방편에 대해서 좀 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불법 그 자체는 안다거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이 법은 알음알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헤아림의 대상이 아닙니다.불법은 알음알이 아니기에분별로는 진리 알 수 없어‘부처 되겠다’ 굳은 발심이진리 확인하는 유일한 길우리가 머릿속으로 분별해서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