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불교 문헌 속의 많은 철학적 주제를 넘나들면서 종종 시간에 대한 다양한 논증과 관념을 목격하였다. 그때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란 알려 하면 할수록 더욱 모르게 되는 것임을 되새기곤 하였다. 내가 끝내 시간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큰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시간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인간의 종(種)에 머물면서, 앞으로도 계속 ‘시간이 온다’거나 ‘시간이 간다’는 식의 말을 쓰며 살아갈 것이고, 가끔은 시간에 대해 나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어떤 견해를 늘어놓을 것이
불교는 수행의 종교로, 경전과 어록은 마음에 대해 설하고 있다. 경전에서 ‘마음’이란 사상이 삭제된다면, 건물로 치면 기둥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마음은 건물의 기둥이요, 근간이다. 마음은 이론[경전]과 실천면에서 중요사상이요, 수행체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마조의 대표 사상은 즉심시불(卽心是佛)·비심비불(非心非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인데, 모두 마음을 시발점으로 심지법문(心地法門)이 전개된다.심지란 대지(大地)가 모든 만물을 생성해내듯이, 마음이 만법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데서 대지에 비유했다. 마조의 손주인 황벽은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화엄종 교단의 조직에 전념하였다. 의상의 교화 활동은 근엄 성실한 출가 수행자로 일관하면서 저술이나 개인적 수행에 머물지 않고 제자 양성을 통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교화 활동은 평생 도반이었던 원효(617~686)와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원효는 환속한 거사의 신분으로서 저술과 개인적 교화 활동에 전념하고 제자의 양성이나 교단의 조직적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아직도 저는 쓸데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끝도 없이 방황하고 넘어지고 또 그걸 수없이 반복하며 살고 있는 청년입니다. 2주에 한번, 불교집회에 참석해야만 만나볼 수 있는 법보신문을 보며 이렇게 글을 쓰자 마음먹은 이유는 다름 아닌 발심 때문입니다. 3년 전 아버지께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시고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큰 의구심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먼가. 무엇을 원해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건지.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착하게도 했다가 악하게도 만드는 이 생각이라는 건 도
강화 8경의 으뜸은 적석사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일몰, ‘적석낙조(積石落照)’다. 길, 산, 섬, 호수, 바다. 그리고 논·밭 사이로 난 길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 떨어진 붉은 노을이 빚어내는 풍광은 장관이다. 해수관음상 이마에 붉은빛이 감돌면 기도하던 사람은 자연스레 뒤돌아 이 절경을 마주하는데 그 찰나 서방정토를 꿈꾼다. 불자뿐인가. 절길 따라 고려산에 오른 사람 모두 노을 속에 자신을 맡긴 채 숨을 고른다. 세파에 요동친 마음을 쉬게 하려는 거다. 왜일까? 적석사 주지 제민(濟民) 스님은 “평온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
한 친구는 이렇게 표현했다. ‘무해한 사람들’. 그 표현에 동의한다. 청년명상힐링캠프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여정을 마친 뒤에도 인연을 이어갔다. 배움과 성장의 여정을 함께하며 지지해 주는 벗은 의지를 발휘하게 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의지, 나 역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지.도반들과 선무도선요가강남센터를 찾아 채희걸 법사의 지도로 수련을 시작했다. 세계명상마을에서의 수업이 새로운 경험이었다면, 센터에서의 수련은 동작 하나하나의 의미와 느낌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과정이었다. 온라인으로 명상 모임을 이어가기도
황룡사는 10여 년 전부터 매월 사찰 순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국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는 순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도입니다. 도량에서 1~2시간씩 기도를 정성스럽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참여자들에게 신심을 불어넣으며 함께하는 염불에서 뭉클한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콘서트에서 가수가 노래할 때 팬들이 같이하며 점점 팬들의 소리가 커져서 가수보다 팬의 소리가 더 우렁차게 울리는 이른바 ‘떼창’이 법당에서도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목표로 하다 보면 법회를 진행하는 자도 함께하는 사람도
반갑습니다. 좋은 날 오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이 자리를 벗어나면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항상 이 자리가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이 시간이 항상 좋은 시간이어야 하고, 오늘이 좋은 날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만 시간을 해야 익숙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숙련공이 되기 위해서 그런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지금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진실한 불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불할 때 절을 일곱 번 하는 칠정례(七頂禮)를
‘대념처경’은 사념처(四念處)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위빠사나명상의 소의경전이다. 4념처란 몸을 관찰하는 신념처(身念處), 느낌을 관찰하는 수념처(受念處), 마음을 관찰하는 심념처(心念處), 법을 관찰하는 법념처(法念處)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념처’라고 쓰지만, 경전의 문맥에서 보면 ‘염처’보다는 ‘수관(隨觀)’이란 말이 더 적절하다. 즉 신수관(身隨觀), 수수관(受隨觀), 심수관(心隨觀), 법수관(法隨觀)이다. 수관이라는 말은 ‘따라서, 쫓아서 보고 관찰함’이란 뜻이다. 즉 신수심법이라는 4가지 마음챙김의 대상에서 어떤 현상이 일
지난 연재에 이어 ‘화엄경’의 성기(性起) 사상을 살펴보자. ‘여래성기품’에서 말하는 성기란 원래 여래의 지혜인 여래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것인데, 불성현기(佛性現起)가 줄여진 말로서 성(性)의 기(起), 혹은 성의 현현(顯現)이다. 즉 번뇌가 전혀 없는 부처가 중생에 현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법계가 여래로 되어 출현하는 것, 중생의 마음 가운데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는[現起] 그대로가 바로 여래의 성기이다. 이는 수행에 의해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생이 이 점을 모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무실 무허(須菩提 如來所得法 此法無實 無虛)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이 법은 진실하지도 않고 허망하지도 않느니라.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얻은 이 법은 진실한 법도 아니요, 허망하지도 않다. 여래가 증득하신 이 경계는 집착을 내는 생각으로나 느낌 감정으로는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법을 법이라고 하면 이미 법이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법이라고 하면 법이 아닌 인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허망하다고 하면 허망하지 않는 것 또한 생기는 것이니, 또 다시 허망한 인과가 생기기 때문
‘지금 여기 감사일기’라는 책을 낸 후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책 소개와 함께 감사일기란 무엇인지, 어떤 이로움이 있는지 자주 이야기하게 된다. 100일간 감사일기와 분노일기를 쓰면서 지금 여기서 감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연습을 하는 것이 책 내용의 핵심이다. 몇 년간 감사일기를 쓰면서 감사한 마음을 알아차리며 살고 있지만 아상을 내세우며 감사한 마음을 놓치는 나를 늘 발견하고 더욱 겸손해진다.이미 있는 그대로 완전함을 깨닫고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추가하는 것은 사족
목표는 오로지 합격이었다. 교육부에서 아이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펼치는 나라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며 세상은 편협한 이분법으로 분별되기 시작했다. ‘합격한 나’와 ‘그렇지 못한 불완전한 나’. 지옥에 사는 불완전한 존재가 행복할 리 없었다. 우울과 불안은 어느새 감정의 표면을 넘어 심연까지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사람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뜻밖의 친구는 책이었다. 작가의 문장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지만 결코 나를 함부로 평가하
저는 ‘10년 앞을 내다보면 10년 동안 외로울 수밖에 없고, 100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100년 동안 홀로 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진병길 원장이 10년, 100년을 내다보고 이 신라문화원에서 문화 관련 일을 시작한 것을 처음부터 지켜봤습니다. 마음이 좀 아릴 때가 있었고 조마조마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진 원장님 아버지, 어머니, 가족들이 볼 때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까 싶습니다. 저렇게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성을 가지고 가는 길은 정말 어렵습니다. 진병길 원장님이 30년이라는 세월을 해온 문화 사업이 모두
4념처명상은 열반으로 가는 길이자 실천방법이고 성취 수단이다.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통찰 지혜가 일어나게 하고, 그 통찰 지혜로써 열반을 증득해야 한다. 그래야만 근본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고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4념처명상은 열반도(涅槃道)이고 해탈도(解脫道)이며 청정도(淸淨道)이다. 그럼 4념처명상, 위빠사나명상은 어떻게 닦는 것일까? 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관찰하는 명상법인가? 식물이나 동물을 관찰하는 방법인가? 아니다. 4념처명상은 바로 ‘나(I, 我)’라고 불리는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나를
① 교상미에 새로운 정사가 셋교상미는 마갈타의 서쪽, 바라문교의 왕국.이 나라의 세 사람 상인이 부처님을 찾아 왔지. 고사까와 꾹꾸따, 그리고 빠와리까 세 사람.식량과 먹거리를 5백 수레에 가득 싣고, 수레마다 일꾼을 따르게 하고, 먼 길을 와서“삼계의 스승이신 부처님. 가르침을 주소서.”오체투지로 부처님을 뵈옵고,부처님과 불제자들께 공양을 올렸지.보름 동안 부처님 설법을 듣기로. “참으로 배워야 할 가르침이다.” “참으로 힘이 되는 가르침이다.”“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르침이다.”감동을 한 셋 상인이 뜻을 모아 여쭙는다.“부처님
왜 그런 거 있지초면인데 익숙한 사람 같은말하자면 그녀는 그녀대로나는 나대로 걸어왔지만낡아가면서 서로 닮아가는기억 속먼저 핀 꽃잎 날리는데고운 손 펴는 녹음 앞에서 어찌눈물이 나려 하는지깔깔거리는 어린것들아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줄게영원히 네 곁을 지켜줄게맹세하고픈,왜 그런 거 있지꽉 쥐어짜면 주르륵 흐를 것같이윤기 나는 햇살보리밭 비탈 논 왈츠를 추는 새들이런 날 나는호수에 떠 있는 섬,섬에 갇힌 호수로 간다(고성만 시집,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고요아침, 2019)이 시에 나오는 “왜 그런 거 있지?”의 ‘그런 거’는 대략
나는 대승(大乘)으로 분류되는 유식 문헌을 연구해온 사람이지만 최근에 이르러 명료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저 대승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대적자들로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심한 모욕과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내가 알게 된 바로는, 대승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환청에 시달렸다. ‘대승의 법은 부처님 설이 아니라 마구니 설이다. 그것을 좋아하는 너희는 정법을 무너뜨리는 사자충(獅子虫: 죽은 사자의 몸에서 저절로 생겨나 그 몸을 파먹는 벌레)이다.’ 마구니설, 사자충, 이런 말들은 불법이 혼탁해진다고 느낄 때마다 불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조를 기점으로 중국불교사를 조망해보면, 마조 이전은 교학불교의 완성이요, 마조 이후부터 실천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이 크게 발달하고, 조사선 시대에 들어서도 선사들은 대승경전의 본각(本覺)·돈오(頓悟) 사상을 수행의 근원으로 하였다. 대략 마조를 지나 황벽희운이 활동하는 무렵까지 경전의 본각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황벽 때까지도 아직 어록이 발달하지 않음. 어록이 등장한 이후로는 선사들이 경전이 아닌 어록을 중심으로 수행함].몇몇 대승경전은 선종의 사상적 근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하였는데, 마침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이 전면적인 전쟁으로 폭발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 당군의 해상 침공 계획을 본국에 전해주기 위하여 급히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당군 침입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 가운데 불교적인 면에서는 밀교계통인 신인종 승려인 명랑의 문두루법(文豆婁法)으로 당군의 격퇴를 기원하였고, 다음 해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기원하였다. 처음 당군의 침공 사실을 전해왔던 의상은 그 기원 법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상에게 당의 침공 계획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