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쌍계사에 세워진 ‘대공탑비문’에는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한 내용, 부친의 수행 성품, 어머니의 태몽, 어려웠던 가정형편, 삭발 후의 수행과정, 선사의 생김새와 용모, 당시 왕들과 진감선사의 일화, 홍법 활동과 의미, 법력과 성품 등 진감선사에 관한 내용이 한 권의 책이라 할 정도로 빽빽하다. 비문에 표시된 ②부분을 보면 진감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지방에서 벼슬하던 사람이었으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다 신라로 이주하여 금마(현 익산)에 살았고 아버지는 최창원(崔昌原) 어머니는 고(顧)씨였다. 30세 되던
하이고 약인언 여래유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왜냐하면 만약 어떤 이가 ‘여래께서 설한 바 법이 있다’ 라고 한다면, 곧 부처님 법을 훼방하는 것이 되는 것이니, 내가 설한 바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니라.만약 어떤 사람이 무념(無念), 무법(無法), 무설(無說)을 알지 못하고 ‘여래가 설하신 법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불법과 불설을 통달하지 못한 까닭이니, 부처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가 있느니 없느니 분별하는 것이니, 부처님 법을 훼방하는 것과
어느날 밤늦게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방 안의 전등이 깜빡깜빡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론 멀쩡했기에 “어 이거 뭐지”하고 잠을 청하려는 찰나 이상하게도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불안을 떨쳐내려 해도 어두컴컴한 수령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4시간 정도 뒤척이다 번뇌망상에 휩쓸리지 말라는 김태완 무심선원장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오른손으로 허벅지를 “탁” 치면서 “어떠한 이유도 없는데 어디서 망상에 빠져있는가” 하고 스스로 다그치니 머리가 깔끔하게 맑아졌다.이런 신기한 체험을 여
엊그제 마흔두 번째 100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생각해보면 10년 세월이 훨씬 넘었다. 그 시간을 함께해 주신 불자님들이 감동이었다. 축원문을 굳이 찾지 않아도 가족의 스토리를 모두 알 수 있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시험을 치를 자녀가 있는 가족, 건강하였던 남편이 갑자기 건강을 잃어 방황했던 가족 그리고 뜬금없이 학교를 그만둔다는 아이들이 있는 가족,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세상을 달리하신 가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상의 고통을 함께해 온 겹겹의 인연들…. 누군가가 행복지수에 대하여 말하였던 기억이 난다. 행복의 기준은
‘구름 가까이에 선 골짜기 돌아/ 스님 한 분 안 보이는 절간 마당,/ 작은 불상 하나 마음 문 열어놓고/ 춥거든 내 몸 안에까지 들어오라네. … …’(마종기 시 ‘개심사’ 중) 절로 들어서는 길은 드세지 않다. 좀 더 깊은 숲으로 난 한적한 오솔길이다.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라 새겨진 작은 돌 두 개가 순례객을 맞는다. ‘마음 씻는 곳, 마음 여는 절’. 사적기에 따르면, 혜감 국사(慧鑑 國師)가 창건(654)하며 개원사(開元寺)라 하던 것을 처능(處能) 스님이 중창(1350)하며 개심사로 고쳤다고 한다. 작은 산길
[1723호 / 2024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정서적 변화가 크고, 감정이 쉽게 고조되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부처님과 같이 귀함을 깨닫고 사회를 선도하는 어른으로 거듭나길 발원합니다.”조현태 동국대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교법사가 법보신문을 불교종립 초·중·고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 법사는 “종립학교 학생들은 매주 법당에서 종교와 철학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에 찾아와 편하게 놀기도 한다”며 “
“불교를 책으로 배워서 신심 깊은 불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절에 다녔고, 가능하면 초하루법회는 참석하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넘쳐나는 시대에 법보신문이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전법과 포교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법보신문이 재소자에게도 많은 변화를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현미 불자는 언론 환경이 점차 열악해지는 현실에서 법보신문의 역할에 힘을 더하고자 하는 마음을 전했다.“할머니가 절에 가실 때면 머리에 쌀을 이고 가셨는데, 제가 따라가면서 그 공양미를 들고
“천안 각원사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교육도량입니다. 2002년 조계종 신도전문교육기관으로 인증받아 지금까지 2774명의 신심 깊은 불제자를 배출했습니다. 각원사불교대학 졸업생들은 지역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원사 사부대중의 이 같은 노력에도 젊은 불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불교 미래불사인 대학생·청소년 포교에 원력을 더하고자 합니다.”한진우 각원사불교대학 총동문회장이 교도소, 군법당, 병원법당, 관공서 등에 법보신문을 보내는 법보시 캠페인에 동참했다. 한
“법보신문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신문입니다. 법보(法寶)라는 이름처럼 부처님의 보배로운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신문으로 항상 응원하고 지지해왔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신문을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법보신문이 전달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물론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인연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조계사 템플국장 선해 스님이 교도소, 군법당, 병원법당, 지자체 등에 법보신문을 보내는 법보시캠페인에 동참했다. 스님은 “인터넷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지면
“부처님 가르침을 주변에 전하는 것이 꼭 불자 수를 늘려 교세를 확장하자는 것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음식을 맛있게 하는 곳을 발견하면 친구들에게 그 맛집을 알려주고 싶은 것처럼, 전법은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고 얻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법은 주변 이웃들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보살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보신문에 담긴 부처님 가르침과 스님들 법문, 불자들의 다양한 신행 이야기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기원합니다.”김한일 한국불교문화사업단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습니다. 법당에 앉아 많은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취업, 내집마련 등 걱정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돕겠다는 생각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더라도 베푸는 것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보시의 공덕이기도 합니다. 법보신문 법보시 캠페인을 통해 많은 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고 보시의 공덕을 알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마음치유아카데미 원장 혜성 스님이 최근 법보신문을 교도소·군법당·병원법당·관공서 등에 보내는 법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장인 이창재 교수는 2013년 비구니스님들의 수행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를 제작한 감독이다. 일반인들에게 일 년에 단 두 번만 문이 열리는 비구니 수행도량 ‘백흥암’에서 펼쳐진 스님들의 치열한 정진담은 진한 감동과 함께 묵직한 울림을 전한 수작으로 꼽힌다. 천상 불자일 것 같은 이창재 교수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게 특별해 보이지 않았고 굳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무심선원을 알기 전에는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다. 신심 깊은 불자인 어머니를 따라 가끔 기도와 수행을 따라 했을 뿐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땐 108배, 철야 삼천배를 하기도 했다.가족 7남매 중 여섯번 째 여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참선을 자주했다. 어느 순간부터 큰 사찰의 보살선방에 들어가 30여 년간 하안거 동안거를 지내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선방에서 참선만 하고 있던 여동생이 “오빠도 마음공부 한번 해볼래?”라고 권유했다. 오래전부터 지켜보며 든 호기심에 같이 정진해보고 싶었지만, 무릎이 아파 가부좌를 틀지 못한다고 거절했다.
11세기 후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화엄종을 개혁하고 천태종을 개창함으로서 중앙불교계는 교종 계열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 계열의 천태종과 조계종 등 4개 종단으로 개편되었다. 특히 화엄종에서는 의천이 고려 초기에 균여의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서 종단의 주류가 의천의 문도들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의천이 세상을 떠난 뒤 70년만인 의종 24년(1170)의 무인들의 정변, 그리고 뒤이은 명종 26년(1196)의 최충헌의 집권을 계기로 하여 불교계는 또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중앙불교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선종 계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이치를 알고 깨달은 분입니다. 우리는 ‘나’라는 것에 집착하면서 화도 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자꾸 엎어져서 다시 일어나는 삶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끊임없이 부처님을 떠올리고 부처님의 따뜻한 미소를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붓다처럼’에 나오는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오늘 아침 한 불자님이 심각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습니다. 주변 사람과 불편한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로 너무 힘들다고 했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가장 힘든
원각사는 세조11년(1465) 창건 이후 예종대까지 왕이 직접 방문하거나 왕실의 제사 또는 기우제를 시행하는 등 높은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성종 이후 점차 사세가 축소된다. 특히 연산군대가 되자 1503년 1월 18일에 도성 외곽에 거주하는 승려의 원각사 출입을 금지하였고, 1504년에는 연산군이 이곳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실질적으로 법등이 끊기게 되었다.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경성을 번듯한 황제의 도시로 조성하기 위해 근대적 도시개조사업을 시작한다. 이 무렵 해관
해심심의밀의보살은 부처님의 경지는 상대적 대립으로 이루어진 변계소집의 언어로는 나타낼 수 없고 조금이라도 설한 바가 있다면 이는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 설법은 쓸모없다는 말인가? 해심심의밀의보살의 해명을 들어보자.“선남자여 그렇다고 본사께서 일이 없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성자의 성스러운 지혜와 견해는 명칭과 언어를 벗어난 것으로 중생들에게도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임시로 명칭과 언어를 세우신 것입니다. 위없는 깨달음을 드러냅니다.”불교의 성자는 부처님과 권현보살들이다. 교리상 소승의
나는 올 초부터 가짜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해 오면서, 되도록 내 생각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지난 글에선 나의 마음과 더불어 운명을 함께 하는 나의 몸에 대해 사색하였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자의 몸[他身]’이라는 주제로 옮겨오게 되었다. 나는 이번 주제의 독특함에 흥미를 느끼지만, 많은 사람이 그 내용에 흔쾌히 동의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긴 해도 그것 또한 미륵의 후예들만의 기이한 학문적 열정으로 도달한 결론이니, 그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저 미륵의 후예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가면서 그
‘대념처경’의 핵심 주제는 4념처 명상이다. 신수심법 네 가지 대상에 마음챙김을 확고하게 확립시키는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 바로 4념처 명상이다. ‘대념처경’은 이 4념처를 위빠사나 방식으로 설명했다. 이 명상으로 지혜와 통찰력을 얻고, 그 지혜와 통찰력은 해탈과 열반, 깨달음의 성취로 수행자를 인도한다. 불교수행자라면 사마타 명상에 머물지 말고, 반드시 4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입장이다. 그동안 29회에 걸쳐서 4념처 명상을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대념처경’ 결어 부분을 살펴보면서 4념처 명상을 총정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