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권 말인 1997년 초부터 “설마, 설마…”하던 외환위기가 현실이 됐다. “위기가 아니다”고 고집하던 정부도 어쩔 수 없게 되어 11월22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IMF의 처분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험난한 시절을 맞은 것이다. IMF 실사단의 구조조정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금융기관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직장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극소수 부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민은 여느 겨울보다도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12월18일 열리는 제1
이 사진은 장영자(이하에서는 장씨)가 남편 이철희와 함께 1982년 5월4일 구속되던 장면이다. 그가 구속되면서 시작된 이른바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일반시민들과 언론에서 ‘역사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이라고 한 이 사건으로 공영토건 등 중견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하고 해태제과 등 여러 기업이 피해를 입었다. 또 이들 기업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조흥은행과 상업은행 행장이 구속되는 등 금융권이 요동쳤고, 주식시장이 교란되고 대량 실직사태가 발생하면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
‘10‧27법난’이 일어난 지 38년이 지났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이하에서는 전씨로 칭함)은 분명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전씨와 불교계는 이런 악연으로 맺어졌다.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고 그 뒤 국회에서 이른바 여소야대 상황이 되어 ‘5공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전씨 처리가 중요 이슈가 되었다. 결국 1988년 11월23일에 전씨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내설악 백담사로 들어갔다. ‘10‧27법난’을 일으켜 불가와 악
1987년 1월14일, 서울대 2학년 재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센터)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경찰과 정부는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식으로 둘러대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다행히 이를 알아챈 검사(최환)와 사건의 단서를 접하게 된 기자의 용기로 이 비극은 세상에 알려졌다. 화장을 한 아들의 유해를 임진강에 뿌리던 아버지 박정기씨는 눈물을 쏟으며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고 했던 짧은 한 마디가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절이게 했다.이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
이 연재 69회 ‘도심포교 새 지평 연 불광법회’에서 1974년 창립 이래 도심 포교의 새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전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자극을 준 불광법회(아래에서는 ‘불광’으로 표시)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기대감을 이렇게 드러내었다.“불광이 2013년 10월13일 웅장한 새 법당을 준공하고 제3차 도약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는데, 최근 들려오는 어두운 소식에 광덕 스님의 ‘반야바라밀과 보현행원’ 원력이 묻혀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불광’이 하루 빨리 창립정신을 회
1983년 조계사와 1984년 해인사에 이어 1986년 9월7일 가야산 해인사에서 또다시 승려대회가 열렸다. ‘9·7해인사 승려대회’ 로 불리는 이 대회에는 스님 2000여명이 모여 ‘불교관계 악법 철폐’ ‘불교자주화’ ‘사회민주화‧조국 통일’을 요구했다. 당시 해인총림 부방장 혜암 스님의 법어로 시작된 대회는 집행위원장 월주, 준비위원장 종하, 대회장 법전(당시 해인사 주지) 등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주요 역할을 맡았고, 이는 이 대회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대회에서는 전두환 독재정권 아래 신음하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민
1983년 8월6일 설악산 신흥사 주지 자리를 둘러싸고 칼부림이 벌어져 한 명이 죽고 중상자가 발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사건 직후부터 ‘돈은 물론, 부모형제의 핏줄까지도 절연하고 출가의 길에 들어선 속세단절의 그 엄중한 선언을 무색케 하는 승려들의 잿밥싸움’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이 문제를 여러 차례 보도하면서 불교계를 질타했으며 그 뒤로 오랫동안 ‘신흥사 승려 살인사건’이라는 부끄러운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종단 내부 문제에 가능한 간여하지 않고 발언을 아끼던 종정 성철 스님도 사건 발생 25
1974년 10월16일, 서울 종로구 대각사에서 불광법회가 창립되었다. 대각사는 일찍이 용성 스님이 풍금을 직접 치며 법회를 시작했던 바로 그곳인데, 이제 손상좌 광덕 스님이 시대와 도심환경 변화에 따른 ‘맞춤 법회’를 시작하여 노 스님의 유지를 구현한 것이다.창립기념법회를 마치고 찍은 이 사진에서 앞줄 가운데 법주(法主) 광덕 스님이 계시고 양 옆으로 동국대 총장을 지낸 조명기 박사와 불연 이기영 박사가 앉아 있다. 스님과 불연은 1960년대에 스님이 봉은사 주지 시절 대불련 지도법사와 지도교수로 인연을 맺은 이래 학생 수련회와
매년 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열리는 연등회는 불교인만의 축제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제는 아시아 각국 출신 이주민 불자들이 적극 동참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의 외교력 향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연등회는 지난 201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2호로 지정되어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예산 등 다양한 지원을 받게 되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30여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종이를 접어 크기에 맞추어 자르고 철사를 구부려 틀을 만들며 얇은 종이를 물들여 유리병에 감고 철사로 칭칭 감아 주름을
문화재 수집에 일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준 수 많은 인연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외종 형 월탄 박종화와 휘문고보 시절 스승인 춘곡 고희동, 그리고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이하 ‘위창’)의 역할이 매우 컸다. 특히 위창은 처음 전형필을 만난 자리에서 이 젊은이의 그릇을 알아보고 오늘날 한국 문화재의 상징이 된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으며 그 뒤 문화재를 제대로 감식하는 눈을 뜨게 해주고 이순황 등 훌륭한 인재들을 연결시켜주었으며 고비마다 자문을 아끼지 않았다.아래 관련 사진은 1938년
“중앙승가학원이 큰 교육기관으로 발전되어 많은 인재가 배출되길 바란다.”도제양성 한목소리 내면서도총무원장 축사도 없이 출범초대 학장 맡아 10년 동안승가학원 발전에 동분서주1979년 4월14일 서울 돈암동 보현사에서 열린 중앙불교승가원(중앙승가대학교의 전신, 이하 ‘승가원’) 개원식에서 석주(昔珠) 스님이 기대를 담아 전한 법어 중 한 대목이다.같은 해 2월24일 설립 발기회의가 열린 후 두 달이 되기 전에 개원식을 가질 정도로 승가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개원에 앞서 이미 3월18일 학인 모집에 나서 이날 연수부에 42명,
옛날에는 음력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을 그냥 ‘사월 초파일’, 간단히 ‘초파일’이라고 불렀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민족의 영광스러운 순간과 고난의 역사를 함께하며 동고동락했던 불교였지만 막상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뒤로는 서자 취급을 받았다. 기독교에 비하여 방송 허가를 받아내는 데에 수십 년, 군종장교 파견에도 십 수 년이 늦었다. 그리고 교조의 탄신을 기리는 이 날을 국가 공휴일로 인정받는 데에 30년 가까이 늦었으니 대한민국이 종교 차별국가였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기독교만 우대 종교차별 속용 변호사 공휴권 청구 패소이후